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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12-22 13:41
해인사 주지 고경(古鏡, 1882~1943) 스님 19세 모습
 글쓴이 : 조찬용
조회 : 840  
1910년 해인사 해명학교(海明學敎) 학인(學人)들과 고경(古鏡, 19세) 스님과 정인홍의 영송(詠松)!

해인사 주지 고경(古鏡, 1882~1943) 스님 배려로,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이 20대에 해인사에서 용맹정진할 수 있었다.

애국지사이기도 한 고경(古鏡) 스님의 10대 때 모습을 조선총독부 유리건판에서 내가 최초로 발굴했다.

정인홍이 11세 때 해인사에서 공부하면서 지은 ‘영송(詠松)’은, 고경(古鏡)이 해인사 학생(학인) 및 승려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할 목적으로 즐겨 읆조리곤 했다.

전 해인사 주지 고경 스님이 합천경찰서로 연행된 것은, 1942년 11월 경이었다. 세속 나이가 61세 때였다.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다. 합천경찰서 일경들은 “이러한 시(詩, 영송)를 어떤 이유로 젊은 중[僧]들에게 일러 주었는가? 송(松)은 조선을, 탑(塔)은 일본을 지칭한 것이지?”라고 하며 자백을 강요했다. 스님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모진 고문에도 묵빈대처(默擯對處)했다고 한다. 현 해인사 홍제암 종성 스님이 작성한 '고경 스님 행장'과 '임기영자료연구소' 등에서 증언하고 있다.

고경(古鏡)은 풀려난 직후 1943년 1월 21일 합천경찰서(현 합천읍 사무소)에서 300m 떨어진 창성여관(昌成旅館, 합천동 556-2)에서 입적(入寂)했다. 일경들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해 36km 떨어져 있는 해인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여관에서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 전후에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허균 지음)를 일본인 합천경찰서장이 네 조각으로 동강냈다. 사명대사 석장비문에 항일정신이 새겨져 있다는 이유였다.

일본이 그렇게 탐내던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판)이 임란 때 보전된 것은 의병장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1536~1623)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인홍 부대가 해인사 인근 매안리에 주둔하고, 정인홍이 야천리(각사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25) 임란 때 유명 사찰들이 해인사를 제외하고 죄다 약탈 및 불타 버리지 않았나.

□ 영의정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이 11세 때인 1546년(명종1)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 지은 ‘영송(詠松)’이다.​

*소나무는 11세인 ‘정인홍’을, 탑은 함양군 수동면 출생으로 당시 정언(正言)이었던 32세인 ‘구졸암 양희(九拙菴 梁喜)’를 비유하여 지은 한시(漢詩)다. 그후 정인홍은 양희(이조참판) 맏사위가 된다.
고경 스님은, 소나무는 ‘조선’을, 탑은 ‘일본’으로 비유했다.​

작고 작은 외로운 소나무가 탑(주: 해인사 삼층석탑) 서쪽에 서 있으니 / 一尺孤松在塔西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서 서로 가지런하지 않네. / 塔高松短不相齊

오늘날 외로운 소나무가 작다고 말하지 마오. / 莫言此日松低塔

소나무가 자란 뒤에는 탑이 도리어 작으리. / 松長他時塔反低

*https://m.blog.naver.com/antlsguraud/221744563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