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성교단의 방해
선사의 새 불교운동을 가장 먼저 비방하고 방해한 곳은 다름아닌 기성교단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수차례 사람을 보내 회유하기도 하지만 기성교단과는 뜻이 맞지 않으므로 거절하게 된다. 그때 당시 자신의 뜻을 밝힌 글을 보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오로지 시비의 장(場)이로다. 포교전도는 선반 위에 올려두고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원컨대 첨화상(僉和尙)은 나를 자유로이 놓아 두소서........ 나는 오로지 역경 이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여기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선사의 뜻은 확고부동하였다. 선사의 승적(僧籍)은 처음에 해인사와 범어사에도 두었으나 뒤에는 이 둘을 모두 탈퇴함으로 무승적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선사가 심혈을 기울려 하고 있는 역경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고 시시비비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제의 앞잡이가 된 일부 승려들은 용성을 전과자이니, 마구니이니, 외도이니 하였으니, 총독부에서는 기성교단을 인정하지 않고 왜색화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일제를 싫어하는 선사로서는 왜색교단에 동참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며 부패되고 타락한 이들과 함께하지 아니했다. 결과적으로 청정교단운동(청정교단운동)과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새불교운동을 사갈시하거나 방해하는 강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2) 일제의 간섭
일제치하의 탄압으로 교단구성과 재산보존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대각교가 합법적으로 재단을 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재산이 있었으나 그 보존의 길이 없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나 선사가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일베로서는 요시찰 인물에 해당했으며 일체의 활동을 제한했던 것이다. 선사에게는 많은 유혹과 회유가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외길을 걸었던 것이다. 선사가 조금의 융통성만 보였더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재산의 보존과 재단의 구성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는 일제의 협조하지 아니했을 뿐만아니라 스스로 승적까지도 버리고 창씨개명을 반대하면서 호적까지도 버림으로써 결국은 무호적 무승적으로 지내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재산의 법적인 보호를 보장받을 수있단 말인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1934년에는 신탁은행에 재산을 신탁하여 독립보존하다보니 그 기능을 활발하게 발휘할 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일제의 마수는 수차례에 걸쳐 대각교를 해산하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특히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불교과 불교촉탁으로 있던 홍성모씨가 그 중심인물이었다고 본다. 그러다가 1939년 4월에 총독부에서 종교단체법(77)을 제정하여 국가공인 종교제(宗敎制)를 실시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버티어 나갈 수 없게 되었다.
(3) 대각교 조직의 문제성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외부적인 원인도 있었으나 그에 못지않게 내부적인 요인도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용성 자시니 후진양성에 실패했다는 접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용성의 제자 가운데 현 한국불교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그 문도들의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지만, 선사의 사상을 직접 계승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때 당시에 용성선사는 독립운동가로서 일경의 눈초리가 항상 뒤따랐으며 요시찰인물로 지적되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까지도 전국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심지어 비난하고 그의 회상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제자들은 선사가 역경을 해두면 경비가 든다고 하여 그 원고들을 불 속에 넣는 일까지도 있었다고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기도하다.
선사는 불교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 같다. 즉 「중앙행정에 바라는 희망」이란 글에서 ꡒ아무리 많은 투자를 하더라도 종교 배반자만 양성할 뿐ꡓ이라고 하고 있다. 선사는 대각교단의 기간요원 양성에서 참신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으며, 운영면에서도 비조직적인 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중단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같다.
20 대각교 운도의 부흥
용성선사가 대각교를 창립한 지 18년만에 간판을 내리고 1940년 입적하자 그 열기는 시어갔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뜻있는 문도들과 신자들에 의해 신탁되었던 재산을 1953영에 되찾음으로써 대각교회 중앙본부규약이 제정되어 다시 결속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 조직은 문화공보부에 재단법인 대각회(大覺會)로 등록되어 활발하게 사상의 계승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오늘날 재단법인 대각회는 약 78개의 사찰이 소속되어 있으며, 포교․역경․문집의 출판․유고정리․유적지 정화산업․후계자 양성․장학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의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들은 1950년대 대처비구정화운동에서도 중심이 되엇다. 그러므로 현재의 조계종단의 승려 중 약 30% 정도가 그의 문하에 속하고 있다. 이것은 선사가 일제치하에서도 청정교단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심초사 노력하였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 1962년에는 국가공로상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한글날에는 역경사업의 공로가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은공무공훈장이 추서되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용성선사의 대각교운동의 중단과 부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선사의 이러한 운동을 어떤 사람들은 신흥종교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선사의 이러한 운동은 앞에서도 누누이 강조했 듯이 새 불교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꾸준히 선사의 사상을 계승발전시켜 한국불교의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단과 교단의 구성원들의 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