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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石文의 명품 최치원 차운시次韻詩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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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천추寶藏千秋 - 종현 2014년 07월 3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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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차운시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를 했다. 최치원 둔세시의 차운次韻은 만巒, 간間, 산山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치원을 추앙하며 지은 차운시에는 모두가 만, 간, 산이 들어간다.
한자가 가지고 있는 뜻글자의 속성상 만, 간, 산을 넣어 뜻풀이를 하면 차운시는 대개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최치원의 차운시로는 수십여편이 알려져 있지만 2002년 4월 해인지에 소개된 차운시를 한 번 더 소개 한다.
매천황현이 1887년경에 이 곳 농산정에 이르러 남긴 차운이다.
뢰랑백절쇄중만雷硠百折鎖重巒 돌 부딪치며 백 번을 굽이 흘러 겹겹의 산 잠그니
옥동춘류자취간玉洞春流紫翠間 옥동의 봄 물이 자줏빛 푸른빛 사이로 흐르네
산자고운시익저山自孤雲詩益著 이 산이 고운의 시로부터 더욱 드러나니
농산미필선장산籠山未必善藏山 산을 에워쌌으나 반드시 산을 잘 감추질 못했구려
세상의 시비야 산을 시켜 차단했지만 오히려 시가 빛남으로서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됬다는 추모의 마음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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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번호에는 홍류동에 있는 차운시 소개 2탄이다.
홍류동 계곡 안쪽 암반에 약간은 어설프게 새겨진 차운시가 있다.
얇은 선각線刻으로 새겨진 차운시로 종이에 펜으로 습작하듯이 편안하고 부드럽게 써내려간 시이다. 얼핏 보면 가벼이 막 쓴 것 같지만 이 역시 화강암에 새긴 석문으로 일정한 깊이의 얇은 선으로 새겼기 때문에 더 난해한 각刻작업이었지 않나 생각해본다.
평면 바닥에 줄도 잘 맞지 않아 들죽날죽해 보이지만 최치원 둔세시를 차운한 7언절구의 흠모시이다. 아마도 선비들이 모임을 갔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곧바로 각 작업을 한 것 같다.
7언절구 4행시로 최영석崔永錫 을축乙丑(1865)년이라 쓰여 있다.
본인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 시기가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 글 꾀나 읽던 선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몇 몇 글자는 확인을 할 수 없어 눈 밝은이가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최영석崔永錫 자 치범穉範
본관 해주海州
1801년생 관직 현감(縣監)
부 최황崔璜 처부 윤자형尹滋亨

최영석崔永錫 乙丑 (1865)
오조번년입차만 吾祖番年入此巒 당시에 우리 선조 이 산에 들어오셔,
잔■백세고운간 残■百歲孤雲間
부앙지금천재하 俯仰至今千载下
■만유수불녹산 ■巒流水不鹿山 乙丑■■重修■

환경 스님의 절승대가 있는 도로에서 산쪽으로 나지막한 바위에 희미하게 차운시가 한편 새겨있다. 정말 연구목적이나 미친(?) 사람 아니면 찾기 힘든 글씨인데 서체는 평범하고 바위에 실선으로 새긴 선각線刻 시이다.
사진을 찍고 시의 전문을 파악하는 데 많은 애를 먹었는데 수십번을 왕복하는 수고를 더한 후에야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차운시의 주인공은 백영伯永장석윤張錫胤 으로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1798년 현풍 현감에 재직하였을 시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훈 스님께 번역에 도움을 받았다.

긍당肯堂 장석윤張錫胤백영伯永 차고운시次孤雲詩
촉파궁창진상만觸破穹蒼眞上巒 신선이 사는 곳 인가,
도목은한주인간倒沐銀漢走人間 마음을 씻고 거닐다
지금첩석명유향祗今疊石鳴遺響 영원히 남을 교훈의 말씀,
계원문성은재산桂苑文星隱在山 문성(최치원)은 계원필경을 이산에 숨겼네.

장백영의 시가 한편 더 있다. 나무아미타불이 쓰여 있는 구선암 위쪽 도로가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새겨져 있으며 백영장영석이란 관지款識가 새겨져 있다.

긍당肯堂 장백영張伯永 題
고운금부재孤雲今不在 고운은 지금 가고 없지만
령아관산춘令我管山春 나로 하여금 춘산을 주관케 하네
취재현도객取載玄都客 관리로서 이고을에 취임하여 왔지만
만년홍동인萬年紅洞人 오랫동안 홍동인으로 남고싶네.

홍류동 주변 많은 바위에는 가야산을 순례한 많은 이들의 이름과 기록이 있다. 수없이 쓰여진 이름이나 기록들은 다 사연이 있고 역사가 담겨있다. 환경훼손과 낙서, 혹은 개인의 복을 비는 기복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조종祖宗이자 신라이후 우리 문인들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는 최치원 선생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치원선생의 성지로, 그의 행적을 추모하며 남긴 암반의 기록들은 목판에 새긴 팔만대장경과 함께 또다시 관찰아고 연구 하여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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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윤張錫胤 자 백영伯永 1764(영조 40)∼? 조선 후기의 문신.
1786년(정조 10) 별시문과 을과로 급제하였다. 1795년에는 장령掌令을 지냈다. 1798년 에는 현풍 현감에 재직하면서 추곡하우秋穀夏牛의 절반은 원곡元穀으로 바치고 절반은 돈으로 바꿔 바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802년에는 전라좌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지방 수령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이에 대해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 곳의 불합리한 실정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였다. 그해 응교應敎에 재직하다가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