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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법당 대적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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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야 - 이상해 2001년 09월 235호
우리 나라의 많은 사찰들은 일반인들에게 사찰 경내 출입을 개방하고 있다. 참배의 목적으로 사찰을 찾는 사람들도 있지만, 관광의 목적으로 와서 절집을 한 번 휙 둘러보고 바쁘게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현대인들이 정신을 피폐시키는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조용한 분위기가 감도는 사찰을 찾아 평안한 마음으로 합장 예배하며 분분한 분별심을 잠재우고 자신을 가다듬게 하는데 사찰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름난 사찰들이나 산수가 수려한 곳에 자리 잡은 사찰들일수록 실망스런 경우가 많다. 이들 사찰들은 낮 시간 동안 관광객들로 붐빈다. 시장을 방불할 정도다. 낮 시간, 이들 사찰들의 주인인 스님들은 절을 찾은 손님들에게 그들의 공간을 내어 주고 사원 깊숙한 곳으로 물러나 정진한다. 이들 사찰들의 진면목을 알려면 스님들의 일과가 시작되는 새벽에 사찰 경내를 참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스님들의 일과는 새벽 세시에 시작된다. 속인들에게는 새벽이지만, 스님들에게는 아침이다. 새벽 세시 법당 앞 뜰 안에 들어서면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사위는 고요하며, 공기는 상큼하고 차갑다. 이 시간, 스님들의 일과는 찬 바람을 가르는 도량석과 사물소리로 시작한다. 딱, 딱, 두웅, 둥, 두두둥, 둥둥둥둥···점점 빨라지는 법고 소리에 이어 목어, 운판, 범종이 울리면 고요에 잠긴 산 속의 만물은 깨어난다. 승방에도 하나둘 불이 켜지고, 곧 이어 가사를 두른 스님들이 대열을 만들며 어둠 속에서 법당으로 향한다. 곧, 법당에서는 커졌다, 작아졌다, 다시 커지면서 긴 여운과 짧은 여운이 이어지는 스님들 독경이 목탁소리 속에 이어진다. 이 새벽 예불이 끝날 무렵이면 멀리 산등성이의 윤곽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밝음이 땅으로 젖어 깔려 들어오기 시작한다.
우리 나라 사찰들을 정말 제대로 알려면, 거기에 살며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의 삶의 모습을, 그 중에서도 스님들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새벽 예불에 참석해 보아야 한다. 이를 접해 보지 않고는 사찰을 제대로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새벽 예불은 스님들의 참 모습을 읽게 해 주며 우리를 무명無明에서 벗어나게 한다. 새벽의 사찰은 관광객들로 인하여 스님들의 생활이 박제된 한낮의 절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해인사 역시 마찬가지다. 해인사의 진면목을 알려면 낮 시간에는 곤란하다. 해인사 새벽 예불에 참석하고, 그 감동을 경험하며 새벽 기운이 온 몸으로 번짐을 느낄 때 왜 이러한 터에 해인사가 자리 잡았는가를, 스님들의 생활은 어떠한 것인가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것은 해인사가 어떤 종교공동체이고, 거기에는 어떤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삶의 가치관이 수행되고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 수도하는 스님들의 생활, 그 집단, 그 터 속에 사원 건물들이 자리 잡은 모습과 격식은 새벽 예불과 함께 세속의 우리에게도 큰 의미를 차지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든 것은 사찰의 중심 건물인 법당과 크게 관계된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법당의 중심에는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다. 범어梵語로 바이로챠나(Vairocana)인 비로자나불은 영원한 빛, 곧 진리를 상징한다. 대적광전이라 함은 비로자나불이 대적광토大寂光土에 항상 계시면서 시공時空을 통하여 《화엄경》을 두루 설법하고 계시는 자리라는 의미를 가진다.
현재의 해인사 대적광전 자리는 지금부터 1,200년 전인 서기 802년에 순응 스님과 이정 스님이 해인사를 창건한 바로 그 자리다. 창건 당시의 해인사 법당은 비로전毘盧殿이라 하였다. 지금의 대적광전 건물 이름은 1488년(조선 성종 19)에서 1490년에 이르는 3년간에 걸쳐 인수仁粹, 인혜仁惠 두 대비의 지원으로 학조學祖 스님이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후 붙인 이름이다.
성종 때에 크게 확장된 해인사는 임진왜란(1592-8년)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1695년(숙종 21)부터 일곱 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를 입는다. 그 중에서도 1817년(순조 17)에 난 불이 가장 컸다. 이 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수백칸의 건물이 모두 타버렸는데, 그 때의 관찰사 김노경金魯敬(1766-1840)이 계획을 세우고 영월影月·연월淵月·제월霽月 스님이 중건하였으나 전날의 규모를 그대로 복구하지는 못하였다.
지금의 대적광전도 18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8년 중건한 건물이다. 대적광전을 중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김노경의 공덕비가 해인사 입구 길상탑 부근 비석거리에 있다. 비문에는 중건 내용이 적혀 있다.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인 1817년 2월 1일 해인사는 장경판전을 제외하고 전소되었다. 이 때 김노경이 희사한 사재 일만냥, 경상도 70여 현의 군수들로부터 모금한 일만냥, 또 합천군수 서봉보徐鳳輔가 낸 일천냥, 그리고 해인사 스님들과 신도들이 낸 성금으로 해인사는 완전히 복구되었다. 대공덕주 김노경의 공덕비는 1821년 여름에 세웠다.
김노경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756)의 아버지다. 김노경은 아들 김정희로 하여금 시주를 권하는 <해인사중건권선문海印寺重建勸善文>을 1817년 쓰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대적광전이 완공되자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짓도록 하였다. 이 상량문은 1961년 보수공사 때 들보에서 나왔다. 가로 485cm, 세로 94cm 크기의 감청색 비단에 자경字徑 3cm 크기의 금니金泥로 1행에 20자씩 67행을 중후한 해서체로 쓴 상량문이다.
추사는 《법화경》의 <화성유품化城喩品>과 《아미타경》에 나오는 부처님들 이름을 상량문 끝에 붙이는 육위사六偉詞에 포함하여 노래함으로써 화재를 진압하기를 기원하였다. 육위사와 상량문 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영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들어올려라(兒郞偉抛樑東).
동방은 아축비불, 수미광불, 묘음불, 금강승보살이
가장 먼저 마귀를 항복시키네
(東方阿須彌光妙音金剛勝菩薩最降伏降魔).
어영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들어올려라(兒郞偉抛樑南).
남방은 허공주불, 덕운법혜불이오, 그 다음으론 수미등불, 일월등불이네
(南方虛空住德雲法慧佛次復須彌燈次復日月燈).
어영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들어올려라(兒郞偉抛樑西).
서방은 무량수불이 무외행으로 정진하고, 대광불, 대명불이 해지는 곳을 정관하였네
(西方無量壽精進無畏行及大光大明正觀日沒處).
어영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들어올려라(兒郞偉抛樑北).
북방은 운자재불과 운자재왕불이 함께
중생을 자비로 비호하니, 무심무착한 까닭이네
(北方雲自在雲自在王俱衆生蔭慈覆無心無着故).
어영차! 대들보를 아래쪽으로 내려라(兒郞偉抛樑下).
하방은 명문불, 명광불, 또 달마불이 크게 사자후를
내지르니 하늘을 떠받치고 법의 깃발을 세웠네
(下方名聞佛名光復達摩大放獅子吼撑天竪法幢).
어영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들어올려라(兒郞偉抛樑上).
상방은 금단천이고, 향광의 대염견불, 무상사라수불, 잡색보화엄불이네
(上方金團天香光大焰肩無上娑羅樹雜色寶華嚴).
가지가지의 모든 색상이 다 이 곳으로부터 나타나니
(種種諸色相. 悉從此地現),


이는 바로 광명해요(此是光明海),
이는 바로 반야해요(此是般若海),
이는 바로 청정해요(此是淸淨海),
이는 바로 묘법해요(此是妙法海),
이는 바로 원각인이요(此是圓覺印),
이는 바로 수능엄인이요(此是首楞印),
이는 바로 금강인이요(此是金剛印),
이는 바로 법화인이라(此是法華印).
원컨대 이 세계, 이 해인에 길이 머물기를 비나이다
(願長住此界, 此海而此印).

상량문 육위사에 노래한 이 비방秘方으로 인하여 그 뒤부터 해인사에는 과연 큰 화재가 없었다. 이 상량문은 30대 추사체를 아는 데 전형을 보이는 글씨라고 하지만, 추사가 해인사에 남긴 유일한 글씨이기도 하다. 추사는 전국의 많은 사찰들에 글씨를 남겼지만,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판의 수백만 글자가 틀린 자나 빠진 자가 없이 바르게, 그것도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필체가 한결같음을 보고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요, 마치 선인仙人들이 쓴 것 같다”고 찬탄해마지 않으면서 건물에 현판 글씨를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대적광전에는 건물 네 면에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인 남쪽에 걸린 <대적광전大寂光殿>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밝혀지지 않았고, 서쪽의 <법보단法寶壇>, 동쪽의 <금강계단金剛戒壇>, 후면인 북쪽의 <대방광전大方光殿> 현판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의 글씨다.
대적광전 정면 여섯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차례로 걸린 주련 중에서, 처음 두 기둥의 글씨는 고종(1852-1919) 임금이 어린 나이일 때에 쓴 글씨다. 유심히 살펴보면, 아직 자기 것으로 완성되지 못한 글씨체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네 기둥의 글씨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0-1898)의 글씨다. 주련의 글귀는 《화엄경》 제11권 비로자나품 제6 대위광동자게송이라고 한다. 여섯 주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대광명을 두루 비치심이여(佛身普放大光明), 상호도 지극히 청정하시다(色相無邊極淸淨).
구름이 일체 국토에 충만하듯이(如雲充滿一切土), 곳곳에서 불공덕을 찬탄하네(處處稱揚佛功德).
광명이 비치는 곳에 넘치는 환희여(光相所照咸歡喜), 중생은 고통을 씻은 듯이 잊는다(衆生有苦悉除滅)
(번역은 해인사 내부 자료를 참조하였음)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해인사 전경에는 대적광전이 중층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원래 중층 건물이었던 것을 1817년 화재 이후 단층으로 지으면서, 비례감을 벗어난 현재의 건물로 세웠을 가능성을 읽게 한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로, 규모는 크나 건물의 짜임새에서 건물 뒤에 있는 대장경 판전에 비하여 훨씬 떨어진다. 아마, 화재 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신심 하나로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적광전은 정면에서는 어간으로만 출입하게 되어 있고, 동·서 양측면에는 전면쪽과 후면쪽으로 출입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배면에서는 중앙 한곳만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1971년 지관 스님이 중수하면서 동·서 양측면에 출입문을 더 내었고, 1993년에는 법전 스님이 처마를 밖으로 더 빼내어 지붕을 고쳤다.
현재 법당 안에는 일곱 불상이 모셔져 있다. 법당 안을 향하면서 볼 때, 왼쪽부터 철조 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고, 그리고 맨 가운데에 본존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다시 그 옆으로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이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
본존 비로자나불상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그 왼편에 있는 또 하나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가운데의 본존불을 모시기 전까지의 본존불이었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그 좌우의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과 더불어 삼존불로서, 고려시대에 가지가 셋인 큰 은행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존불은 처음에는 경상북도에 있는 금당사金塘寺에 모셨다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가야산의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용기사가 폐사가 되면서 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의 불상들은 조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와 같이 대적광전 불단에 주불 비로자나불과 양대 보살상 사이에 작은 불·보살상이 중첩되어 모셔져 있는 것은, 끊임없이 해인사가 중건되었음을 읽게 한다.
2002년 8월이면 해인사 대적광전은 1200년을 맞게 된다. 육십갑자가 10번씩 2회 지나간 긴 시간이다. 이 1200년은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의 개념에는 빗댈 수 없는 찰나에 속하는 짧은 시간에 속할지 몰라도 세속의 많은 중생들이 구제를 받아왔고, 또 해인사를 거쳐간 많은 고승과 대덕이 정진하였던 지난날이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을 기리고 앞날의 발전을 위한 일을 도모한다면 의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사의 건물이나 불사가 주는 아름다움은 모든 미적 감각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일지 몰라도, 사찰에 담긴 정신이 주는 아름다움은 감각적인 것에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곧 사찰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가는 깨달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현대인을 올곧은 정신세계로 통하게 하는 길이다. 그런 일을 이 기회에 도모하는 것은 현대사회와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