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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 통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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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이윤수 1989년 04월 86호
지리산 십대 비경의 하나인 섬진강 푸른 물줄기를 끼고, 가로변의 아름드리 포플라나무처럼 오래된, 향토내 짙은 옛길이 구례에서 화개로 이어진다. 옛날부터 차밭과 화개장터로 이름난 화개에서, 이제 곧 봄이 완연하면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하늘을 덮는다는 벚나무가 십리를 뻗어 있는 길이 불교음악 ‘어산’의 태동지인 실리적 고가람 쌍계사에까지 이르고, 그곳에서 다시 이십리 산길을 오르면 첩첩이 이어진 지리산 산자락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칠불암(七佛庵)이 자리잡고 있다. 구례에 들어서면서부터 멀리서 갈래갈래 갈라지는 산자락에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윽고 기골이 장대한 능선이 그 웅장한 모습을 눈앞에 드려냈을 땐 가슴이 벅차 ‘아. 지리산!’이라는 탄식이 저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백두산의 큰 줄기가 남해에서 마쳤다는 산, 그 줄기마다 골이 많아 아흔아홉골로 불리는 산, 함양, 산청, 구례, 하동, 남원의 다섯 군과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휘감아 안고 있는 산, 진시왕이 불로초를 찾으러 보낸 신비의 산, 여순사건 이래로 다섯 해가 넘도록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뜨거운 피를 토하고 스러져간 빨치산으 메카, 지리산. 이 지리산을 시인 고 은씨는 이렇게 묘사했다.

“이 나라 산야에서 만일 소백산맥이 달려오다가 섬진강 어구에서 갑자기 멈춘 채 웅장하게 제 몸을 한 나라로 이룬 지리산이 없다면, 얼마나 볼 품이 없고 삭막하겠는가. 지리산을 깊이 파 보면 그런 삭막감과 함께 뜨거운 지리산의 화염이 솟아오를지도 모른다.”

지리산의 봉우리 가운데서도 꽤 높은 축에 드는 반야봉은 (落照)로도 유명하다. 이 반야봉의 남쪽, 해발 팔백 미터 쯤에 칠불암에 오르는 산길 중턱의 범왕마을까지는 버스가 하루에 두 번씩 드나든다. 이 버스를 놓치면, 황토길을 따라 쌍계사에서 세시간쯤 내리 걷든가, 만원권을 내고 택시를 타야 한다. 신라 아사왕 때(101년) 창건한 고찰로 김수로왕의 일곱 왖자가 인도에서 건너온 장유보옥선사의 가르침을 받아 동시에 성불한 자리라고 하여 칠불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칠불암의 아자방(亞字房)은 구들도사 담공선사가 신라 효공왕 때 축조한 건축물로 불을 한번 치피면 마흔닷새 동안 계속 따듯함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러나 빨치산 소탕작전 때 군경토벌대에 의해 칠불암의 십여 동은 아자방과 함께 재로 화하고 말았다.
칠불암 주지로 계시는 통광스님은 한때 불타 없어진 칠불암을 복원한 장본인이니, 아직 다 끝내지 않은 칠불암 복원 불사를 맡아오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나라 전통 건축물의 전문가로 통할 정도가 된 분이다. 속가의 나이로 곧 쉰을 바라보는 스님은 이십육 년 전부터 이 복원 불살르 꿈꾸어 왔으며, 드디어 이일을 착수한 지 십이 년 되는 지금에는 얼추 그 불사를 마무리짓는 단계에 있다.
통광스님은 작고 마른 체구 때문인지 그야말로 ‘청춘을 불사르며’ 칠불암 복원을 이룬 이답게 다부진 인상이 단박에 느껴진다. 오로지 칠불암과 함께 살아온 스님에게 저간의 얘기를 들어본다. 통광스님은 지리산의 의신이라는 동네에서 났다. 자랄 때 사람들이 “네 할아버지 어디 계시냐?”고 물으면 ‘아버지를 찾는군’하고 새겨들어야 했던 것은 한의였던 부친이 나이 오심에 본 늦동이었던 때문이다. 본디 한의학에 뜻을 품은 스님은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붉은 단풍과 빨치산으로 유명한 피아골의 연곡사를 찾았다. (“아마, 그때가 열여덟이었나?”하는 스님에게서는 칠불암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기억조차 할 필요가 없는 듯했다.) 그리하여 범어사의 지호스님과 상좌스님이 계신 석굴암에서 웃방 하나를 얻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곳 스님네들은 공부한다고는 하면서도 도통 책이라곤 들여다보지도 않으며 앉아서 졸기만 하는 것이었다. 궁금히 여기자, 그것은 조는 게 아니라 참선 수행으로서 화두를 들고 자성을 살피는 일이라고 스님들은 일러주셨다. 그러면서, “만 가지 법의 근원은 따지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무엇으로 돌아가는고”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 화두를 받자마자, 한의서는 한쪽으로 밀어둔 채, 마치 옛 선비들 공부하듯이, 허리에 줄을 매어 천장에 연결시켜 놓고서 ‘그 하나는 무엇으로 돌아가는지’를 참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초발심자경문을 읽다가, 문득 ‘만 가지 것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직 업보만이 내 몸을 따른다. 오직 삼일이라도 수행하면 천년 보배가 되나, 백일 동안 탐욕에 물들면 하루 아침 티끌이 된다’는 대목에 이르러 ‘내가 되고자 하는 한의란 과연 어떤 것일까’를 곰곰 생각하게 되었다. 인술로서 병고에 시달리는 이를 돕는다고는 하지만 돈벌이가 목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하루 아침에 티끌이 되기보다는 수행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고 그리하여 홀연히 범어사로 출가하였다. 수행길에 든 지 삼년째 되던 때 미음조차 넘기지 못할 만큼 위장에 큰 탈이 났다. 가만 두면죽을 것 같은 데에다, 한약방집 아들이니 약을 다려먹고 오라는 스님네들의 성화에 밀려 절을 나설 때에는 왠지 야속한 마음에 눈물도 찔끔 나오더란다. 편지 한 장 없던 속가의 집에 불쑥 들어가니, 일흔이 가까운 아버지가 별 말씀 없이 약을 지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님은 불심이 아주 장한 어른이셨어. ‘속퇴하려거든 이곳에 있고, 아니거들랑 이 약을 들고 다시 절로 떠나라’시며 승려면 어긋남 없는 수행을 해야 되고, 그래야 스님 아들을 두었다는 보람이 있는 거라면 쫓아내시는 아버지 때문에 또 한번 서운했었지. 물론, 지금에사 고맙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서 다시 찾은 곳이 연곡사였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아자방 얘길 들었다. ‘그 좋은 터를 어찌 안 볼소냐’하여 잡초 무성한 빈터에 온 때가 ‘아마도 갑진년’이라 하니, 1964년 10월의 일이겠다. 그곳에 와보니, 마치 오래 전부터 생활해온 듯 어찌나 반갑고 좋던지, 지리산 능선과 그을은 주춧돌을 보면서 해가 저무는 지도 모르고 넋없이 있었더란다. 돌아가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당황하게 된 스님은 문득 어디선가 들리는 사람의 소리를 따라 올라가 보았다. 따라가 보니 흙덩이와 돌덩이를 적당히 빚어 지은 움막집-지금의 운상선원〔雲上禪院〕-에서 범어사 시절의 도반을 만났다. 도토리에 쌀 몇 톨을 섞어 끓이다 뜸이 들 즈음에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춘 도토리 밥을 얻어 자신 스님은, 다음에 ‘어찌 신세질까보냐’ 하여 산아래 마을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탁발을 떠났다. 자꾸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어 “김치…좀…주세요”하니, 조막만한 김치 한 덩이를 덜렁 주는 것이었다. ‘내가 뭐 거진가’하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맘을 다부지게 먹고서 “김치 가질러 왔소!” 하고 힘차게 소리를 지르니, 보살들이 “스님, 우리 집에 맡겨놓은 김치라도 있습니까?” 하고 웃으며 푸짐하게 퍼주었다. 그 김치 하나로 그 겨울은 운상선원에서 났다. 이듬해, 그곳을 내려가려던 스님은 무엇에 이끌려서인지 모르게 칠불암의 빈 절터 앞에서 “부처님의 가피력 속에 꼭 복원하고 싶다”는 원을 세우게 되었고, 그 뒤로 다시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우거진 잡초와 대웅전 터의 산죽〔山竹〕을 베고 억새풀을 엮어서 작은 초막을 지었다. 불상 대신 ‘김수로왕 일곱 왕자’의 명호를 써 붙이고 촛불 대신 호롱불을 놓고서 작은 그릇에 모래를 담은 뒤, 땀을 비오듯 쏟아가며, 무릎이 짓무르도록 기도를 해서 문수보살 천일기도를 마쳤다. “인적이 없는 곳이라 불편함이 컸지. 그때 가장 큰 소원이 뭔지 알아? 허허, 달콤한 설탕물 한잔 마시는 거였어. 아무튼 빈터에 감자를 심고 무심경지에 들던 그 시절이 참 좋은 시절이었던 거 같군.” 아스라한 그 시절의 기억이 이젠 스님에게 즐거운 추억거리가 되어있는 듯하다. 머리가 반백이 되어버릴 정도로 심하게 앓던 위장병도 언제부터인가 씻은 듯이 내려가시면서 더욱 용맹정진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경봉 큰스님이 찾아오셔서, “칠불암을 복구할 사람은 자네 밖에 없네”라며 많은 격려를 주고 가셨다. 칠불암을 떠나 다니다가 정 힘들거든 오대산 적멸고궁에서 삼칠일-스무하루-기도를, 남해 보리암에서 칠일기도를 한 뒤에 칠불암에서 쉼없이 백일기도를 되풀이하라고 이르신 경봉 큰스님 말씀대로 오대산과 금산을 돌아 칠불사에서 절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 기도를 통해 통광스님은 관세음보살로부터 열쇠꾸러미를 받았고, 뜻밖에도 불심 깊은 화주들을 만나 큰 어려움 없이 불사에만 전념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천구백칠십팔년부터 시작된 칠불암 복원불사는 트럭이 쌍계사 부근에 내려놓고 간 돌이며 나무를 지고 오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대들보로 쓸 나무까지 지고 오는 것은 도무지 무리였기에, 절 집안의 나무를 베는 게 무슨 큰일이겠나 싶어 나무를 두어 그루 베다가 썼는데, 이것이 무허가 벌채죄라고 하여 하동경찰서에서 엿새를, 진주 구치소에서 또 엿새를 살다가 신도들의 도움으로 벌금을 낸 뒤 풀려 나왔다. “유치장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며 생활했지. 나무판자가 눈에 띄기에 그 위에 올라앉아 마음 편히 염하고 있었거든, 알고 봤더니 변기통 뚜껑이었네. 들어오는 사람에게 빨리 나가고 싶으면 관세음보살을 염하라고 일러줬더니, 여기저기서 관세음보살을 외치는데 유치장이 고스란히 염불당이 되더구만.” 진주로 송치되던 날은 ‘하루만 더 여기 있었으면 칠일기도 회향인데’하는 아쉬움까지 생기더라는 통광스님은 절 짓는 동안 깨달은 것을 반쯤은 푸념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일러주신다. “관공서 직원에게는 퉁명스러울수록 손해가 막심하더군.”
스님은 성지 중의 성지인 칠불암을 그냥 폐허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수행자로서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는 손해를 감수하고 불사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손을 댄 일이 ‘선방’불사였다. 스님네들이 편히 수도 정진할 수만 있다면, 설령 한동안 공부를 뒷전으로 제쳐놓아야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스님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일 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도토리밥을 지어먹던 운상선원은, 오는 사월 보름의 여름 결제일에 완공할 예정으로, 지금 인부들이 마무리작업을 하느라 한창 부산하다. 대웅전에는 부처님 외에 김수로왕과 일곱 왕자를 모셨다. 모두 은행나무로 빚어진 부처님들의 온화한 미소가 썩 일품이어서, 찾아온 이로 하여금 저절로 경배의 마음이 일게 한다. 소실되었던 아자방도 지금은 복구되어서, 열댓분의 스님들이 여기서 정진하고 있다. 문화재 전문위원들이 재현한 아자방은, 옛 전설만큼은 아니어도, 일반 구들보다는 더 오랫동안 따습다. “그동안 느긋하게 불사에 임했지. 열두 해째인데 아직도 진행중이잖아. 개금하고 범종 달고 사적비를 꾸미려면 세월이 또 얼마나 흐를지 모를 일이지.” 앞으로 사찰을 복원하려는 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통광스님의 권고를 제대로 새겨들어야 할 것 같다. “다른 일도 다 그렇듯이, 사찰 건축 일에서는 사람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일꾼을 쓸 때 누구나 인정하는, 전통 건축물에서만 오랫동안 연륜을 쌓은 전문 목수를 만나는 게 큰 일이야. 아무리 기계의 성능이 좋아지고 기술 좋은 목수라 해도 우리 나라 전통 건축물에 대해서 지식이나 애정이 없다면 별 수가 없거든. 현대의 발달된 기술과 공법만 믿는 경향에서인지, 요즘 산중에도 시멘트가 겉으로 드러나는 건물이 늘고 있는데, 이건 정말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싶어.” 칠불암 복원의 소임을 맡아온 통광스님은 애당초 지리산을 지키게끔 태어난 스님처럼 보인다. 웬지 스님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옹골찬 자신감은, 절묘하고도 장엄한 지리산의 정기에서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에서 나신 스님은 그의 오십평생의 삶을 오직 이곳에서 지냈고 또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할 지리산인(地異山人)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