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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과 선초의 불교적 상황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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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89년 04월 86호
조선조가 개국된 이래 계속되어 온 거센 배불정책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교전적의 국역사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퍽 놀라운 일이며 이를 보면, 표면적으로는 억압받고 있는 불교가 내연으로는 사상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난 호에서는 여러 가지로 문란하고 타락한 승정(僧政)의로 말미암아 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까지도 척불(斥佛)사상이 싹터 있었던 고려 말 불교계의 말폐적인 현상에 대하며 살펴보았다.
조선조 초기에 접어 들면서는 정치와 종교의 기본 방침을 수립하는 과정을 담당했던 조 준(趙浚)이나 정 도전(鄭道專)과 같은 유신들이 중심이 되어서 척불이 시작되었다.
태조가 즉위한 후에 사헌부에서는 불사(佛事)를 경계하고 승니(僧尼)를 대량으로 퇴거시킬 것을 주장함에 따라서 평생 동안 불교를 신봉했던 태조도 정치적 여건상 어쩔 수 없이 척불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배불(排佛)은 태종에서 세종 초기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태종 7년에는 불교의 종파를 7종으로 제한했고 사찰의 수도 여든여덟개로 축소시켜 종파와 사찰의 대정비 작업을 단행하였으며, 이제까지 내려오던 왕사와 국사제도를 없애고 도첩제(度牌制)를 엄하게 하였다.
그 뒤 세종 6년에는 일곱 개의 종파를 통합하여 조계와 천태와 총남(總南)의 삼종을 선종(禮宗)으로, 화엄과 자은(慧恩)과 중신(中神)과 시흥(始興)의 사종을 교종(敎宗)으로 했으며, 흥천사(興天寺)를 선종의 대본산으로 하여 선교양종으로 통합하였다. 한편 성종과 연산군과 중종과 명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불교에 대한 탄압이 가장 극심하여서, 성종은 절을 새로 짓는 것을 엄중히 규제하였고 승려들의 환속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였으며. 연산군 즉위 10년에는 흥천사와 흥덕사의 선교 양대 본산의 불상을 철거시키고 원각사를 놀이터로 만드는 등 그 횡포가 극에 달했다.
그 뒤 중종도 척불로 일관하여서 연산군 때처럼 중지되었던 승과를 완전히 폐지시켜서 자연히 선교 양종의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승려들은 환속했으며.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몰락하였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가 섭정하였는데, 그녀는 당시 금강산에 있던 보우(普雨)대사를 천거해서 봉은사와 봉선사를 각기 양종의 본산으로 부활시키는 한편, 승과와 도첩제를 부활시키고 보우를 판선종사대선사(判輝깜事大禮師) 봉은사주지가 되도록 하는 등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는 듯하였으나. 그 뒤 명종20년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또 다시 척불이 시작되었다.
아무튼 조선조가 개국된 이래 계속되어 온 거센 배불정책 속에서도 불교를 숭앙하는 국왕들이 때때로 등장하여 불전을 국역하는 등 많은 불사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특히 즉위 초년에는 배불정책을 썼던 세종은 그 뒤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서 세종 25년에는 사찰의 중창과 수리를 허락했으며, 30년에는 경복궁에 내불당(內佛當)을 지었고.
3l년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지어 때마침 창제된 국문으로 출간하는 등 차츰 숭불의 경향을 나타내기도 했다. 일찍부터 세종의 영향으로 안평대군과 함께 홍준선사(弘漫輝師)에게 경학을 배워서 불법과 인연을 맺은 세조는 즉위하자 자신의 왕위 찬탈로 인한 여러 가지 비리를 속죄하는 뜻으로 더욱 호불교(護佛敎)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문수보살 설화로도 유명한 오대산 상원사를 비롯한 월정사, 청학사, 양주 회암사 영암 도갑사 금강산 표훈사 등 여러 사찰을 중창하도록 허락하고서 그의 보호를 받게 하였다. 9년에는 태조가 복전으로 삼았던 흥복사를 중흥하여 대원각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기에 12층 석탑을 세우며 큰 불상과 종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세조는 수많은 불전의 국역과 인경(印經)을 하였는데. 그는 몸소 에 사업에 주력하면서 신미(信眉) 수미(守眉) 홍준(弘鴻)등의 스님들과 윤 사로(尹師路), 황 수신(黃守身), 김 수온(金守溫), 성 임(成任)들로 하여금 이 사업을 진행시켰다. 특히 세조 3년에는 해인사 대장경 오십 부를 인출하여 각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소장시키는 한편, 7년 유월에는 간경표감(刊經都藍)을 설치하고 세조 자신이 훈민정음으로 번역한 여러 경전들을 차례로 간행하였다. 세조종 국역 간행된 불서로는 월인석보, 능엄경, 묘법연화경, 반야심경약도, 현정기, 아미타경, 원각경, 들이 있으며, 성종조(成짜朝)에도 몽산화상법어약록, 천수천안관자재보살대비심다라니경, 금강경삼가해, 영가대사증도가남명, 천선사계송, 오대진언, 불정심다라니경들을 간행했고, 연산조에도 육조법보단경. 진언권공, 복우자수심결을 간행했다.
또한 중종 때에도 오대진언부영협약초를 간행하였으며, 그뒤 명종조에는 관음대다라니부영험약초, 불설대보부모은중경 등 수많은 불전의 국역이 국왕의 손으로 또는 사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불전의 간행으로 보아서 조선 초기에 주류를 이루었던 사상적인 면을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초기에는 대승경전 중에서도 금강경과 법화경을 중시한 것으로 보이며, 선종의 어록들이 포함된 점과 진언의 영험과 관세음보살의 영험이 첨가된 점을 살펴볼 때 불교의 민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이조의 억불정책을 전술했거니와 그 억불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교전적의 국역사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퍽 놀라운 일이다. 더욱이 국역의 실무를 담당한 주역들에게는 승려들도 있었지만, 유신(備닮)들이 더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또한 그들의 찬문이나 발문들도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표면으로는 억압받고 있는 불교가 내면으로는 사상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조선 전기, 즉, 태조에서 13대 명종까지의 그 55년 동안의 불교사상사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일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사실 해인사의 인물사를 다루면서 너무 곁가지를 많이 벌여온 감이 있다.
그러나 고려말과 조선 전기의 불교사가 아직도 정리되어있지 않은 상태이고 기록도 전무(全無)한 상태나 다름없는 가운데, 더욱이 해인사를 살다 간 인물은 거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고 다만 세조조의 신미스님이나 학조(學祖)스님에 대한 기록이 몇 자 정도 있을 뿐이므로 할 수 없이 사명대사가 나타나는 조선조 중기까지 내려 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다보니 조선 전기의 불교사가 너무 공백상태가 되므로 참고로 이조 전기의 불교사를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호에서는 조선 전기 불교사를 장식했던 함허(1376~1433)대사와 설잠(雪岑) 김 시습(1435-1493)과 보우(普雨? -1561)대사의 사상을 소개함으로써 조선 전기의 사상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일단락을 지으려고 한다.
다시 한번 해인사의 인물사라는 제목에서 벗어나서 이 글을 진행하고 있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