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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지리산 실상사 불교유적(중)-증각 홍척스님의 실상산문과 후백제 연호가 새겨진 편운하상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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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의 명보를 찾아서 - 이태호 1995년 09월 163호
지난 달에 살펴본 실상사 연혁 가운데 의암스님이 중수(1821년)한 지 육십여 년 뒤의 폭약 방화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고 했으나, 포광 김영수 박사의 전집인 「한국불교사상논고」나(원광대출판국, 1984)에서 다행히 그 이유를 밝혀 놓은 것을 보게 되어 소개하고자한다.
ꡐ호남의 고적ꡑ 이라는 글모음 속의ꡐ남원군지실상사南原郡之實相寺’ 라는 꼭지에서 이를 적고 있다. 포광 선생은 1913년부터 법주사 주지로 간 1916년 까지 실상사 주지로 있었으며 이러한 변란은 불과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884년 (고종 21 , 갑신)에 함양 사람 양재묵이 실상사는 승려가 천 년을 살고 나면 속인이 천 년을 살 것이라는 이른바 ꡐ승천년 속천년 僧千年 倚千年ꡑ 을 주장하는 술사의 말에 현혹되어 일부러 절을 불질러 버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실상사가 양재묵이 방화 변란을 당하자 월송대사는 큰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ꡓ자를 양윤문이라 말하는 이 무도한 양재묵아. 네 이렇게 이른바 양반이라는 화적놈으로서 수천 년 고찰을 이렇게 참혹하게 소화시키니 이것은 신이 공노할 일이다. 몇 차례라도 사찰을 재건 불능할 때까지 방화할거라고 호언장담한다고 하니, 네 멋대로 방화할 태면 방화하여 보아라, 나는 몇 번이고 재건하고야 말 것이다ꡑ라고 하였다. 이처럼 양반 한 개인이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천 년 고찰 실상사를 방화하고 스님들을 내몰려고 위협한 것을 보니 19세기 후반 무렵에는 기문둔갑 술사들이 이 지리산 일대에 만연하였나 보다.

잊혀진 후백제 연호를 쓴 우리나라 불교 유산 가운데 최초의 예인 편운스님의 부도와 그 부도에 행적을 기록한 사연
증각 홍척 스님의 제자 가운데 잘 알려진 수철스님 말고 또 한 분 편운스님이 있다. 실상사 입구에서 왼편으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 분쯤 수고하면 숲속에 조계암이라는 옛 암자터에 세워진 뚜껑 덮인 발우 모양의 이상스런 부도를 만나게 된다. 그 부도의 탑신 면에는 해서로 스승과 주인공 및 건립 연대 뿐만 아니라 건립 연대의 연호까지도 적었다. 그 내용은 ꡒ창조홍척제자創祖洪陟隆弟子 안봉창조安筆創祖 편운화상부도 片雲和尙浮圖 정개십년경오세건正開十年庚午歲建ꡓ인데 ‘실상의 개창조인 홍척스님의 제자로 성주 안봉사의 개창조인 편운 화상의 부도를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운 사실을 밝혔다.
여기서 문제는 편운 화상의 부도를 건립한 해인 정개正開 10년의 정개라는 연호이다. 이 정개라는 연호는 우리 나라는 물론 중국에도 없는 것으로 통일신라말 태봉 궁예가 정개政開 연호를 사용한 적은 있지만 그 정개와는 한자가 다를 뿐만 아니라 궁예의 정개는 오년밖에 사용하지 않아 편운스님의 정개 10년과는 무관하다.
더더욱 남원은 궁예의 세력 범위도 아니다. 910년보다 육십 년 앞선 경오년은 문성왕 12년 850년인데 이는 법 형제간인 수철의 업적 연대가 893년이고 스승인 홍척스님의 입적 연대를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하는 상황에서 스승보다 먼저 입적할 이유도 없고 비슷한 연배인 수철과 사십삼년이라는 많은 차이가 나서 91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듯 싶다. 수철 열반 십칠 년 뒤에 법형제 편운스님이 열반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자연스럽다. 자, 그렇다면 왜 편운스님보다 십칠 년 먼저 입적한 수철스님은 천우 2년이라는 당의 연호를 사용했는데 유독 편운 스님은 중국 연호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적이 없는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효공왕 14년 무렵은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왕이라 자칭하던 효공 5년으로부터 십년째되던 경오년이다. 더욱이 궁예도 중국 연호를 쓰지 않고 무공 武恭 성책 聖冊 수덕水德 만세萬世 정개政開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당시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견훤도 자기 연호가 없을 리 만무하다. 역사는 패자의 것은 기록되지 않는 법으로 우리는 후백제왕 견훤이 사용한 연호를 알지 못한다. 견훤이 전주에서 후백제
왕이라 스스로 이름한지 십년째가 되던 때가 경오년이라는 사실은 그냥 우연으로 넘겨 버리기에는 여러 정황이 너무 분명하다. 편운스님 부도에 기록된 한자 스물넉 자가 말하려는 사연은 자못 크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편운스님의 부도에 새겨진 정개라는 연호는 후백제의 견훤이 사용한 연호이며 멸망한 후백제의 알려지지 않은 연호라 는 사실을 끌어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글 쓴이의 견해가 아니라 포광 김영수 선생이 이미 1928년 「불교」라는 잡지에 발표한 선생의 탁월한 견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이러한 견해가 그 뒤 미술사 학계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포광 선생의 견해에서 한 발짝 더 나가 893년 심원사 수철 화상 탑비를 끝으로 924년 봉암사 지증 대사 탑비까지 삼십일 년 동안 탑비가 세워지지 않는 상황에서 왜 910년에 유독 편운스님만 그것도 탑비가 아니라 부도에 후백제의 연호까지 새기면서 건립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이전의 부도 들은 묘탑 주인공의 당호조차 기록하지 않고 부도와 탑비가 함께 세워지는 것이 보통인데 편운 부도는 그렇지 않는 점 또한 특이하다. 이는 조선 시대 연곡
사 소요 대사 부도나 미황사 부도들 가운데 부도에 탑비의 성격을 곁들이는 행적을 기록하는 경향들의 가장 앞선 사례로 주목된다. 이는 당시 탑비는 왕실의 허가를 얻어야 세울 수 있었던 불문율에서 후삼국 전쟁기의 소란한 와중에 왕실의 허가는 얻을 수 없고 부도는 세워야겠고 해서 당시 남원 지역이 후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었으므로 후백제의 연호를 쓴 것이지 않을까 억측해 본다. 나아가 편운스님이 후백제왕 견훤에 우호적인 스님일 수도 있다.그 이유는 고려 시대에 실상사에 불적이 건립된 분명한 사실이 거의 없고 고려 시대의 폐사 기간을 가진 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국사 석가탑의 상륜부는 실상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떴다
절 집안에 들어서면 중심 법당인 보광전 앞에 동서로 나란히 건립된 두 기의 삼층석탑이 우리의 눈을 가로 막는다. 쌍탑은 크기나 모습이 비슷하며 특히 쌍탑 상륜부가 거의 완전히 남아 있어 불국사 석가탑 상륜부를 복원할 때 이를 본떳을 정도라고 한다. 1980년 2월 2일 도굴꾼에 의하여 크게 파손된 것을 문화재 관리국의 기술진들이 원형대로 복원하였다(높이
8.4m, 보물 제37호).
이 쌍탑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면 같은 양식으로 두 탑이 동시에 건립되었다는 지금까지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더 분명한 것은 발굴해 보면 알 일이지만 쌍탑의 크기나 각 세부의 모습, 상륜부 배치 방식도 보면 볼수록 달리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보광전의 지하 유구도 고려 시대 초기의 중창유구라고 하지만 9세기초 홍척 국사 당시의 가람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알지 못한다. 쌍탑을 정밀 실측한 적도 없어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말할 수는 없는 형편이지만 금당지와 쌍탑과의 상관관계가 퍽이나 어색하다. 더 나아가서 뒤에 살펴볼 목탑지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통일신라 유물들 - 석등, 철불, 동종편
실상사 경내에 남앗 지금까지 전하는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로는 앞서 살펴본 증각 홍척스님의 묘탑과 탑비, 쌍탑, 수철스님의 묘탑, 수철스님 탑비의 비좌와 이수-조선 후기 1714년에 새로 만든 비신은 제외-이며 이외에도 석등과 철불 및 동종편이 알려져 왔다.
석등은 쌍탑과 보광전 사이의 중앙에 위치하며 간주석은 장구 엎어 놓은 것과 같다. 전체적인 형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이나 임실 용암리 석등과 비슷하여 이 지방에서 유행된 석등 형식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이 석등의 측면에는 등을 켤 때 오르내릴 수 있는 용도로
사용된 석조 계단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유일한 예로서, 석등이 공양구로서의 장식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나아가 실용적인 야외조명기로서 사용된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이 석등의 조성 연대는 쌍탑과 더불어 증각 홍척스님이 실상사에서 선문을 연 828년 흥덕왕 3년부터 홍척스님이 열반하신 9세기 후기 사이 가운데 가장 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9세기 후기로 보인다(높이 5m, 보물 제35호). 약사전에는 보물 41호로 지정된 통일신라 시대의 최대 철불상의 하나인 철불자상이 모셔졌다. 전체 높이가 이백육십육 센티미터의 거불인 이 불상은 좌상으로서, 꼿꼿하게 앉아 바로보고 있는 정면관이며, 좌세는 두발을 양무릎 위에 올려 놓은 완전한 결가부자이다. 손은 철이 아니고 나무인데 이는 1987년에 새로 조성한 목재 손이며 이 손 모습은 복장 속에서 나온 모양과 똑같이 문명대 선생이 설계하고 박용심이 제작하여 조성했다. 이 불상의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 들어 엄지와 세째 손가락을 거머잡고, 다른 손가락은 활짝 편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을 무릎에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올려 놓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손가락들은 대부분 부러졌고, 손목도 파손이 심하여 지금은 원철제 손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은 아미타불의 하품중생인 이므로 이 불상은 아미타불이라 할 수 있으며, 약사불이라 부르게 된 계기를 짐작할 수 있어 쓴웃음이 나온다.
법의는 양 어깨를 모두 덮은 통견이며 대의를 걸치는데 어깨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굵은 띠모양의 옷깃과 이 안은 U자형으로 넓게 터져 가슴이 많이 노출되었고 그 아래로 엄액의 -大衣안에 위 內衣로 입던 옷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걸쳐 입는다-가 보인다. 옷주름은 물결 주름식의 부드럽고 유현한 주름으로, 특히 팔의 주름 같은 것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대좌는 흙으로 만든 사각형의 대좌이나 복원할 때 무릎 앞부분이 거의 파손되어 무릎 윗부분만 남아 있어서 지금은 나무로 보수한 상태이다.
실상사의 철불좌상은 9세기 중엽을 전후해 그 조성이 부쩍 늘어난 철불의 한 예로서 구체적인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양식적인 면에서 볼 때 8세기의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이상적 사실 주의가 조금 해이되고 활력이 감퇴된 9세기의 현실적 사실주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들 한다. 곧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아랫배 등에서는 긴장감이 나타나고 있으나, 8세기에 나타나던 유연한 탄력감이 아닌 경직되고 이완된 모습을 보여준다. 또 신체 비례면에서 볼 때 이 철불은 머리와 전신이 1대 3이고, 얼굴과 전신은 1대 5.2로서 858년의 보림사 불상-머리와 전신이 1대 2.5, 얼굴과 전신이 1대 5.1 -이나, 863년의 동화사 불상-머리와 전선이 1대 2.8, 얼굴과 전신이 1대 5.2-보다 머리와 얼굴이 전신과 비교할 때 조금 큰 편이고 865년의 도피안사 불상-머리와 전신이 1대 3, 얼굴과 전신이 1대 5.2-과 867년의 축서사 불상-머리와 전신이 1대 3, 얼굴과 전신이 1대 5.3-과 거의 동일한 비율을 보이고 있어 대체적으로 9세기 중엽 불상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형태나 선 같은 것은 대체로 863년의 동화사 불상과도 친연이 있으며, 887년의 불국사상과도 상통하고 있다. 즉 의문의 세부 수법은 동화사 불상과 비슷한 편으로, 어깨나 팔의 계단식 수법이나 다른부분에 물결식을 보이는것 등은 통일하며 이것이 더 진전되면 도피안사나 축서사상의 평행계단식의 문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실상사의 철불좌상은 9세기 중엽경에 조성된 초기 철불의 걸작으로서 당시의 철불상의 실례를 보여주며 수철
사천 근을 들여 주조한 통일신라 시대의 걸작품이다. 이 불상은 현재 지리산 최고봉인 천황봉과 일직선상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정기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호국적 이념에서 이 곳에 안치하였다고도 하나 9세기 홍척 국사 당시의 안목이 아니라 적어도 고려말 이후 늦으면 조선 후기의 풍수적 입장일 것이다(높이 266cm, 보물 제41호).
실상사 경내에서 발견된 동종 몸체파편은 이미 상반부가 깨어진 채로 발견되었으나 유곽, 비천상, 당좌 등에서 우수한 조각수법을 볼 수 있다. 하대는 아래위에 가는 연주문대를 둘러 장식하고 그 안에는 당초문대를 정교하게 조각하였는데, 당초문 속에는 비천상과 당좌 바로 아래에 원형문이 있어 성덕대왕 신종의 양식과 비슷하다. 종신에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구의 주악비천과 당좌가 배치되어 있다. 당좌는 중앙에서부터 연꽃, 인동화문, 연주의 순으로 무늬가 장식되었다. 또 주악상은 구름 위에서 천의와 영락을 위로 날리고 있는 형식이 성덕대왕 신종과 상원사 동종을 연상하게 한다. 생황과 피리를 불고 있는 비천의 풍만한 모습은 신라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 종은 남아 있는 부분의 입지름으로 보아 상원사 동종보다 약간 큰 규모였으리라 추정되는데, 9세기 중엽 무렵에 주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높이 28~99cm , 입지름 96~99.5cm ; 동국대학교 박물관소장).
이 밖에도 실상사 산내 암자인 백장암에는 통일신라 시대의 9세기 후기의 석탑과 석등이 남아 전한다. 석탑은 높이 오 미터에 달하며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석탑이다. 전체를 화강앙으로 건조한 이 석탑은 현재의 백장암 남쪽 아래 경작지에 남아 있어, 석탑 바로뒤에 서있는 석동과 같이 원위치로 생각되며 그 북쪽에 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뚜렷한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장암이 이 곳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구조와 각부의 장식적인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여주는 이른바 예술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특이한 모습의 석탑이라고 하겠다.
이 석탑은 각부의 구조가 특이할 뿐 만 아니라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 밑에 섬세하고도 화려한 조각이 가득히 조각되어 더욱 더 주목된다. 즉 초층옥신석 시편에는 보살 입장과 신장상 두구씩을, 이층 옥산 각 면에는 주악천인상 두 구씩을, 삼층의 사면에는 한 구씩의 천인 좌상을 각각 양각하고 있어 만면에 조각이 화려하며, 이층과 삼층 옥신석의 하단에는 난간을 둘렀다. 또 상단부에는 삼층에 다같이 목조건축의 두공형을 모각하였다. 일층과 이층 옥개석 하면에는 앙련을 조각하였고 삼층옥개석 밑에는 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이와 같이 각 부 구조에서 전형적인 양식에 구애되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볼 수 있고 각 부재의 표면 조각에서도 특이한 의장을 찾을 수 있는 점이 통일신라시대의 아름답고도 특수한 형식의 탑이라 하겠다. 석등은 높이는 2미터 5O센티미터에 달하며 보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연화대석 위에 간주를 세우고 그 위에 연화대석을 놓았으며, 화사석과 옥개석,상륜부까지 전체의 부재가 완전한 석등이다. 화창구에는 창문을 고정시키는 못구멍이 있는데 이것은 통일신라 석등에서 혼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 석등은 하대의 연화대석과 상대의 난간에서 동지주 등 주목되는 부재가 많은데, 각부의 비례가 잘 맞는 우수한 석등의 하나이다.

우리는 한국최초의 구산선문인 실상산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묻힌 땅을 딛고 산다. 실상사 쌍탑의 왼편 앞쪽에 건물지로 보이는 초석 유구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이 건물지는 초석 유구옆에 가운데가 구멍 뚫린 네모난 석반이 그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목탑 상륜부 바로 아래에 놓이는 석반으로 상륜부 하중을 지붕 중앙에 골고루 전달해
주는 역할은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지는 목탑지로서 그 사용 연대는 발굴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선 시대의 유구는 아니며 최소한 고려시대의 유구로 보여지
며 그렇다면 쌍탑과 석동 그리고 보광전 지하의 금당유구의 배치 상태에서 이 목탑지는 자못 엉뚱한 위치에 자리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실상사의 발굴은 절실한 형편이다. 우리나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개창된 실상산문의 가람배치뿐만 아니라 그 산문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아직도 땅속에 잘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