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루의 기둥도, 심검당과 요사채의 기둥도 구부러지고 휘었다. 울퉁불퉁 생긴 대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며 절집을 지키고 선 나무 기둥에서 경허스님의 법음이 쩌렁쩌렁 귓전을 울린다. ‘비뚤어진 나무는 비뚤어진 대로,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쓸모가 있다.’ 차별 없는 평등을 일갈하며 스승 만화화상의 설법을 그 자리에서 정면으로 반박한 경허스님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경허 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마음을 갈고 닦으며 보림을 한 개심사는 한국 선불교 중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특히 경허스님의 세 달로 불리는 수법제자 가운데 둘째, 혜월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인가한 곳으로, 선승의 체취가 진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지난해 경허 스님 열반 100주년 세미나에서 스님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에 대해,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분별심일 뿐”이라고 일축하시는 주지 동덕스님은 그들은 단순히 일반 어록만을 읽고 파계를 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상황에도 마음의 동요가 없다는 것을 무애행을 통해 직접 보여 준 것이다.
선사들의 어록을 무조건 추종하는 것도 옳지 않으며,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어록은 일반인이 보는 관점과 수행을 통해 안목이 열린 사람이 보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행적이란 겉으로 드러난 외형의 일부분으로 심오한 내면이 배제되었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대한 비판은 경허 스님의 경지를 능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승속도, 학문의 경계도 초월한 경허스님의 보이지 않는 경지는 수행을 통해 직접 그 이치를 체득하지 않고는 행적에 대해 누구라도 자신 있게 언급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성철 스님의 주장은 조사선은 돈오돈수라 했고, 송광사의 보 조스님은 돈오점수를 주장하셨다. 돈수나 점수냐의 사정을 가리려고 하는 것도 우리의 중생심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안목에서는 시비 자체가 끊어져 버린다. 굳이 따지자면 그 세계에서는 돈오돈수라 해도 옳고 돈오점수라 해도 옳은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돈오점수라 해도 틀리고 돈오돈수라 해도 틀리는 것이다. 정말 그 세계를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저녁이면 반야당 좌복 위에 마음을 앉히고 낮에는 주지로 절 살림을 맡아하시는 동덕 스님은 불자들을 향해 “절은 부처님께 불공 올려서 집안 잘살게 하려는 곳이 아니고, 부처되는 방법을 배우는 학교이며, 자신을 부처로 만드는 공장이다. ‘성불 하시오.’ 하는 인사는 자주 하지만 입에 붙은 이름일 뿐, 실질적으로 성불하기 위한 부가적인 노력이 너무 부족하다” 며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내신다. 스님자신에 대해서도 “경허, 만공 스님 이상의 경지가 되어 석가모니, 달마가 와도 맞장 떠서 이길 수 있어야 중노릇 제대로 한 것인데, 좀 더 열심히 못산 것이 한이 된다. 염라대왕 시자가 찾아와도 죽음에 대한 한 치의 두려움 없이 ‘네 놈들이 뭔데 나한테 오라 가라 하냐? 내가 알아서 한다.’하고 큰소리 칠 정도가 되어야 자기에게 자신이 있는데 현실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완전한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스님은 좌복 위에 두고 온 마음을 찾아 외진 산길을 걸어 선방으로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하신다.
보현선원은 입적한 전 주지 선광 스님이 경허 스님의 선풍을 되살리기 위해 영구암을 증축 하여 1995년 4월 선원을 개원하였다. 개심사에서 한참을 돌아올라 상왕산 중턱에 자리한 보현선원은 매 결제마다 10여명의 선객이 안거에 들어 하루 8시간씩 좌선하며 심안의 불꽃을 태운다. 걸출한 선승의 체취에 흠뻑 젖은 반야당, 지혜의 검을 찾기 위해 스스로를 구속하며 묵언정진으로 이어지는 선객들의 구도행이 치열하다. 경허당 앞마당에서 봄볕을 기다리는 청벚꽃의 움트림이 터질 때, 보현선원 반야당에서도 깨달음의 노래가 구구절절 흘러나오길 기대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품어 안은 손길이 대대로 더해진 절집, 제 멋대로 휜 나무들이 한데 어울려 심오한 조화를 이룬다.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천하의 명검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개심사를 찾아온 일본 헌병대장을 활발한 선지禪旨로 단숨에 제압한 혜월 스님의 기백이 서린 심검당 현판은 세속의 티끌까지도 싹둑 잘라 낼 것 같은 느낌이다. 혜월 스님의 천연스러움과 경허 스님의 청량한 법음이 하나로 어우러진 무언의 설법이 저절로 마음을 열게 만드는 절집, 그래서 개심사 인가 보다. 속세의 먼지 훌훌 털어 버리고, 열려진 마음에 차곡차곡 챙겨 넣은 산사의 법향을 한 아름 포개어 안고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