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이 뜨거울수록 초록행진에 박차를 가하는 비자나무 숲길이 하늘을 감춘 채, 길손을 반기고 있다. 하얀 백학봉이 들어앉은 쌍계루 연못의 출렁이는 아름다움과 수려한 풍광에 쌓여 우아한 여름이 머물고 있는 백암산 계곡이 동공을 사로잡는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치솟은 도량 탑이 들려주는 선사의 만년설법에 매료되어 선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고불총림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년)에 여환조사가 개창한 호남 불교의 요람이다. 고려 중연선사가 크게 중수하여 정토사로 바뀌었으며, 각진 국사가 오래 머물면서 정진도량으로 유명했다.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선사가 중창을 발원하면서 법화경을 독송하자 흰 양의 무리들이 독경 소리에 이끌려 내려와 사명을 백양사로 고쳤다고 전해진다. ‘골산에서 도인이 많이 난다.’는 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백양사는 가난하지만 고승대덕이 끊임없이 탄생한 도량이다. 조선시대 서산, 소요, 진묵, 백파, 학명선사 등, 기라성 같은 대선사를 비롯해, 근대에 있어서 용성, 석전, 만암, 서옹, 청화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들이 수행과 실천의 장을 펼쳤다. 또한, 한국불교의 종정, 교정을 여섯 분이나 배출한 백양사는 조선의 억불과 전란의 격랑 속에서도 민족의 아픔을 함께하며 크나큰 법력으로 한국 불교를 이끌어 왔다. 수많은 선승들의 자취가 서려 있는 운문암은 고려 각진 국사가 수행하기 위해 처음 창건하였으며, 근대에 선원 문이 열린 것은 1923년이다. 용성 스님이 운문암에 주석하면서 고암, 석암, 금포스님 등이 정진하여 선풍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만암, 인곡, 운봉, 법전스님 등이 정진하여 호남의 선풍을 드날렸다. 한국전쟁 이 후에도 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운문암에 서옹스님이 1984년 선원 문을 다시 열었다. 초당만 남은 운문암 터에, 1988년 선방을 새로 짓고 납자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선수행 도량의 옛 명성을 되찾았다. ‘북 마하연, 남 운문’으로 회자되어 운문선원을 찾는 운수납자들의 발길이 구름처럼 몰려들자 1993년 백양사 경내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고불선원을 개원하여 방부를 들였다. 서옹스님은 5일마다 벽암록을 제창하여 끊임없이 후학들을 일깨우며 선종 사찰로서 위상을 굳건히 하였다.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과학문명이라는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과 같다.”는 서옹스님은 정신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하는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참사람 운동을 주창하였다. 또한,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의 경지를 묻고 답하는 무차선회를 개최하여, 조사선이 뜻있는 사람들 누구나 참구할 수 있는 보편적 수행법으로 출가자나 재가불자 모두에게 나침반이 되길 희망하였다. 선수행 명당으로 불리는 백양사는 고불선원과 백학봉 아래 위치한 운문선원, 두 곳의 선방을 운영하고 있다. 2012년 사리탑 뒤편에 선방을 신축하여 재개원 한 고불선원은 9명의 스님이 정진 중이며, 구참 스님 위주로 수행하는 운문선원에서는 11명의 스님이 하루 9시간 이상 정진에 몰두하며 깊은 침묵에 잠겨 있다. 두 철 이상 연속해서 방부를 들이지 않는 고불선원은 반살림과 목욕, 삭발 일에는 김밥과 간식을 챙겨 좌선으로 약해진 다리와 긴장된 몸을 풀기 위해 산행에 나선다. 산행에서도 정진을 쉬는 것은 아니다. 좌복을 벗어나더라도 예리하게 세운 선기에 달려드는 번뇌 망상은 가차 없이 잘려나간다. 부처의 마음을 얻어 깨달음의 자리 차지를 위해 화두와 벌이는 치열한 싸움은 시공을 초월하여 한 순간도 멈춤이 없다. “초라한 거처에서 빨래며 청소를 손수 하셨던 서옹스님은 매우 자상하셔서 늘 다가가고 싶은 스승이었으나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아주 엄격하셨어요.” 스승을 회고하는 고불선원 선원장 무아스님은 “공부에 의문이 생기면 언제든 탁마를 받을 수 있도록 문을 열려 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1대1 지도를 하셨지요.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죽비를 옆에 놓은 후, 자신을 먼저 점검 하고 수좌들을 다 부르셨어요. 노장님 방에 들어서면 “한 덩어리가 돼?” “안 됩니다.” “유치원 아이가 100m 달리기를 할 때 선생님이 땅! 하면 좌고우면 하냐?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한달음에 뛰어가는 것처럼 공부는 그렇게 지어야만 되는 것이야.” 스승은 포행 길에 나서서도 뒤를 따르는 제자에게 쉼 없는 가르침을 전해주셨다. “화두를 입 안에 넣어서 어금니로 씹어라. 이렇게, 으드득, 으드득……. 화두를 꼭 꼭 씹어서 들어라.”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간절히 하라는 설법으로 오롯한 정신세계를 열어주기 위해 애쓰시던 스승이셨다. 스승이 가신 후에야 치열하게 정진하지 못한 회한과 크고도 넓게 드리웠던 스승의 그림자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절절히 배어내는 무아스님은 “공부에 진척 없이 화두 점검이 거듭되던 어느 날 이었어요.” “노장님은 왜, 안 될까? 거참, 왜? 안 되는 거지?” 탁마는 수없이 거듭되어도 막막하기만 하던 끝에 용기를 내었다. “스님은 초참 때부터 화두가 여여하게 들리셨습니까?” “어! 잘 안 되었지, 허 허…….” 제자의 당돌함을 온화하게 감싸는 자비스러움과 법 앞에 날카로운 위의를 한 몸에 지니셨던 스승의 목소리가 지금도 우레와 같이 들려온다. “화두를 어금니로 씹어라. 으드득……. 으드득……. 이렇게,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