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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당 법전 대종사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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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이 시대의 마지막 도인으로 불리던 절구통 수좌 법전스님이 해인사 퇴설당 경상 서랍 속에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드셨다. 한국불교를 다시 세운 봉암사 결사의 마지막 주인공이자 선문의 종장으로 존경 받으며, 오직 한길만을 걸어오신 스님을 추모하며 후학들이 되새기는 큰 가르침과 교훈을 간추려 옮긴다.

- 수행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삶의 제1법칙으로 삼았던 스님의 방에는 흔한 다구상도
없었다. 방 청소가 필요 없을 만큼 정갈하게 살았다. 속옷과 양말을 손수 빨았다. 평생 절
밖 음식은 드시지 않았고, 절 밖을 나가도 밥을 싸가지고 다니셨다. (원상스님 봉화사 주지)

- 불교 수행풍토를 개선하고 선가의 수행정신을 부활시키려는 강렬한 의지와 한국불교의
인재를 길러 내고자하는 원력으로 수도암을 세우셨다. 상좌들에게 엄격하셨다. 졸거나 예불
시간을 어기면 몽둥이가 날아 왔다. 목욕물을 너무 뜨겁게 데워도 난리가 났다. 산에 지천
인 나무도 함부로 지게에 지고 오지 못했다. 나무도 필요한 만큼만 써야 한다고 혼쭐이 났다.(원인스님 수도암 주지)

- 오랜 세월 옆에서 지켜봤지만 언제나 별로 말씀이 없으셨다. 아랫사람에게 시킨 일이 흡 족하면 잠깐 밝은 표정을 지으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표정하셨다. 시간나면 참선하고 마당에서 풀 뽑고 산에서 나무하고 포행 다니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스님 열반 후, 유품 을 정리하면서 정갈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서 평생 한 결 같은 수행자이셨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원철스님 해인사 승가대학장)

- 스스로 정한 규칙에는 어떤 외부의 조건에도 흔들림이 없으셨다.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타인에게는 배려와 양보의 삶을 일관하셨다. 배움보다 실천을 강조하시며, 끊임없는 정진을 당부하셨다. 이제는 공부 중에 의심나는 것을 여쭐 자리가 없는 것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빈자리이다.(원직스님 해인사 박물관장)

- 성철 스님은 법전 스님에 대해 ‘좌복 위에 법전이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동중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 등 삼중일여의 경지에 올랐다며 정진력을 크게 평가하셨다. 한번 참선에 들면 꿈적도 하지 않고 용맹정진 하는 모습에 절구통 수좌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절구통 수좌지만, 사판의 일도 최선을 다했다. 현재 해인사 도량의 모습을 갖춘 것도 법전스님이다. (원택스님 백련암주지)

- 지행합일이 철저히 몸에 밴 산처럼 자유로운 분이셨다. 본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공부라고 하시며 스승보다 뛰어난 눈 밝은 후학 한명 키우는 것을 원력으로 삼으셨다. 스님만큼 진정한 수행자를 키우려고 애쓰는 그런 어른이 또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박원자 불교저술가)

- 화두해라. 수행자에겐 화두공부 이상 가는 것이 없다. 철저히 화두참구하면 반드시 공부 결실을 볼 수 있다.
화두 안할 거면 경전을 보든지 기도를 해라. 경전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니 열심히 공부하면 공부의 맛을 볼 수 있다.
이도 저도 안할 거면 소임을 봐라. 열심히 소임 봐서 공부하는 스님들, 사부대중 불편하지 않게 해라. 소임을 볼 때는 대중화합이 제일이다. (2013년 생신을 위해 모인 상좌들에게 하신 당부말씀)

- 절구통 수좌’로 불렸던 법전 스님은 늘 과묵하고 고요했다. 실제로 엉덩이가 짓물러서 방석이 떨어지지 않은 적도 있다고 한다. 언젠가 참선을 마치고 보니 먹다 남은 순두부에 곰팡이가 새까맣게 피었더란다. 하루 찬밥 한 덩이로 한겨울을 버티기도 했다. 굶어죽을 각오로 홀로 태백산에 들어가 10년 두문불출한 일화도 유명하다. 인간 본능인 잠까지 물리친 초극의 경지다. 스승인 성철도 노상 “법전 발뒤꿈치만큼 이라도 따라가라”며 애정과 믿음을 보였다. (김석종 경향신문 논설위원)

도림당 법전대종사의 추모재와 사리 친견법회는 초재 합천 해인사, 2재 해인사 고불암, 3~5재 대구 도림사, 6재 김천 수도암, 7재 합천 해인사 순으로 봉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