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불갑사는 백제 침류왕 원년(384년) 중국 절강성을 거쳐 법성포로 들어온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에 의해 전해진 백제불교 최초의 사찰이다. 법을 가진 성인이 도착하여 법성포法聖浦란 이름이 붙었으며, 모든 사찰의 으뜸이 된다하여 불갑사佛甲寺라고 하였다. 중국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나 고구려 불교와 달리 백제불교는 인도 고승에 의해 직접 전래되었기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고 있다.
불갑사에 선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 각진 국사가 공민왕의 명에 의해 머물게 되면서 부터이다. 평소 국사를 따르던 수행자 천여 명이 모여들어 40여동의 전각에 500여 칸의 대가람으로 장엄하게 중창되었다. 산내에도 31암자를 건립하여 수많은 수행자들이 머물며 정진하는 호남 선불교의 터전이 되었으나 정유재란으로 전소되었다.
배불정책으로 억압 받은 조선시대에도 법릉 해릉 채은 청봉 용암 설파 설두 대선사가 거쳐 가면서 가람을 중창하여, 200-300여명의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참선 수행도량으로 맥을 이어왔다. 근래에는 향로전에서 소수의 납자가 실참 정진하였으며, 금화 설제 만암 수산스님 등, 선지식이 주석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대도량이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 수산스님(1922~2012)이 주석하면서 쇠락한 가람을 중수하기 시작하였으며, 고시공부를 위해 불갑사를 찾았다 제자가 된, 불갑사 주지 만당스님이 스승을 도와 옛 자료를 모으고 사적기를 바탕으로 대대적인 복원 중창을 거듭하여 유서 깊은 천년고찰의 위상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불갑사를 수행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온 힘을 쏟고 계시는 만당스님은 경내 곳곳을 자상하게 설명하시고 무각선원으로 안내해 주셨다.
불갑사 무각선원은 선문의 꽃을 피우기 위한 수산스님의 원력으로 개원되었다.
불교의 중흥을 위해 수많은 가람을 일으킨 수산 스님은 “중 벼슬 닭 벼슬만도 못한 것이니,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묶이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하시며 걸망하나 둘러메고 미련 없이 떠나는 소탈한 모습으로 올곧은 수행자의 길만을 묵묵히 걸으셨다.
“중생의 고통은 소유에서 출발한다. 평생 이룰 수 없는 것에 집착하기 보다는 현재 내 손안에 있는 행복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의 문제이다”라는 엄격한 가르침으로 반선반농半禪半農의 가풍을 실천하며 평생을 청빈한 수행자의 삶으로 일관하셨다.
“세속이 왜 저리 시끄러운지 아는가?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세상에 큰 울림을 주신 수산스님은 깨달음이 없는 그 자리가 바로 마음자리이므로,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으라는 깊은 의미를 담은 무각선원無覺禪院을 열어 후학들을 제접하였다. 조실로 주석하며 공양 후, 수좌들과 차담을 나누면서 공부를 점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로 여기며 후학들의 가르침에 열성적이셨다.
1996년 양진암 터에 선원 불사를 시작한 무각선원은 98년 7명의 납자가 첫 안거에 들었으며, 99년 하안거부터 납자들의 방부를 들이고 본격적인 수행정진이 시작되었다.
안거에는 약 10여명의 납자가 방부를 들이는 무각선원은 쾌적한 수행 환경을 위하여 방사 신축 불사가 진행 중인 관계로 이번 동안거는 방부를 들이지 않았다.
안거는 선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선방 기둥에 멈추어선 벽시계도 맨살 드리운 대나무 시렁도 선승이 비워둔 공간으로 선기를 뿜어내고 있다. 멈추어진 채로 안거에 든 그들의 한철 공부는 얼마나 단단히 여물어질까? 벼락같은 한 소식 크게 울려 세상의 고통과 번민을 단번에 떨칠 수 있는 날을 기다려 본다.
굽은 허리와 덧댄 시간으로 천년을 기워 입으며 의연하게 도량을 지키는 일광당, 고단한 세월의 무게에 눌려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도 끊임없이 내어주는 세심정, 그 순수한 아름다움에 반해서 마음을 씻으려고 다가서 보지만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 사찰을 가든 산사의 향기는 그윽하더라도 백제 천년을 고이 품은 역사와 세월이 만들어내는 불갑사의 향기는 더욱 특별한 내음과 색채를 담고 있다. 상사화가 피어 있는 가을철에는 눈부신 화려함과 만날 수 있고, 고요한 즐거움으로 내면의 향기에 젖어드는 봄날에는 아름다운 마음걸망이 한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