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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의 산실, 해인총림 소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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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 影池 - 글·사진 | 김선주 2026년 09월 535호
법을 구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까지 온 혜가에게 달마는 어찌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법을 구하려고 하느냐?’고 하였을까? 무릎까지 쌓이는 눈을 맞으며 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스스로 팔을 잘라 바치는 신심을 보인 후에야, 비로소 법을 받을 수 있었던 위법망구의 정신은 무섭도록 치열한 혜가선사의 구법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눈 쌓이는 집이라는 뜻의 퇴설당(堆雪堂)은 혜가선사의 구도정신에서 유래되었다. 당호만으로도 자신을 버리는 철저한 수행과 설중단비의 견고한 의지를 요구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눈 무더기 쌓인 굴 밖에 서서, 불퇴전의 수행 자세로 굳은 신심을 다지게 한다.

해인사에 선원이 생긴 것은 경허 스님이 조실로 추대 되면서이다. 1899년 경허스님은 정혜결사를 추진하고, 17명의 대중들과 동안거에 들어 사명대사에서 단절되었던 선불교의 활발발한 선풍을 되살렸다. 퇴설당을 중심으로 도도히 이어진 선불교의 맥은 용성, 동산, 경봉, 금오, 효봉, 성철, 전강, 향곡, 일타스님 등, 수없이 많은 선지식들을 배출하였다. 해인사는 끝없는 용맹정진으로 서릿발 같은 법음을 토해 내며 한국 불교의 크나큰 등불을 밝힌 선지식의 산실이다.

소림원은 퇴설당에서 옮겨온 해인사 중심선원으로 용맹정진 시에는 100여명이 정진하는 한국 최대 규모의 선방이다. 해인사 선풍으로 유명한 용맹정진은 선원대중 뿐 아니라 강원 율원과 암자의 대중들까지 참여한다. 하안거에는 7월 1일부터 8일까지 동안거에는 납월 1일부터 8일까지 일주일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화두와 싸우며 수마와도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고행의 시간이다. 정신적 육체적 한계에 도전하는 납자들의 등줄기와 어깨에 내려치는 장군 죽비가 수도 없이 부러져 나갔다고 하는 소림원의 선향은 진하게 우러나고 있다.

달마가 지키고 선 108평 소림원 선방에는 36명의 푸른 납자들이 하루 10시간씩 쉼 없는 정진을 이어가고 있다. 납자들의 굳은 결의가 전해지는 꼿꼿한 기풍과 형형한 푸른 눈빛이 선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엄격한 수행 풍토에서 서슬 퍼런 선승들의 뜨거운 가르침이 있었기에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침묵의 진동으로 오늘도 내 안의 우주를 끊임없이 두드리고 있다.

맑은 차를 내어 주시는 선원장 효담스님은 “일반인들은 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공부가 어렵게 느껴집니다.”라고 하시며 무엇보다 선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을 강조하신다. “깨달음이란? 수행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만들어진 나를 내려놓는 그 자체가 깨달음인 것이지요.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생각이라는 장애물을 걷어내고 참나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나는 결코 참나 일 수 없습니다. ‘나’라는 생각이 들어가는 순간, 생각과 감정에 휩쓸려서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현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며,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여 근심과 불안으로 지금 이 순간을 괴롭게 만듭니다.
사물이 보이든, 생각이 일어나든,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지 않고 일어나는 그 자리에 의식을 두고 생활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을 생활화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바로 선인 것이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무엇인지 다시 여쭈었다.
“행복이란 가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권력이나 돈, 명예를 구하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지게 되지요. 세속의 가치가 사라질 때의 괴로움은 끝없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나 속에서 스스로 기쁨을 창조할 수 있는 본래 면목이 영원한 행복입니다.”

꽉 찬 머리를 어떻게 비울 수 있을까? 밖으로만 내달리고 있는 생각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부처와 중생, 선과 악, 옳고 그름, 이 모든 상대적 개념이 빚어지는 연유는 바로 이기적인 나 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생심이든 깨달음이든, 그 무엇도 생각을 일으켜 구하거나 바라면 이미 어긋나고 만다. 망상과 화두가 둘이 아니요, 지구와 섬이 둘이 아닌 무아의 자리, 분별과 대칭이 불가능한 참나의 자리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다. 지금 내게 진실로 어려운 것은, 온갖 분별이 만들어 내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일 일것이다.

저 멀리 산문 밖에서 부는 바람소리는 거세지만 법보 종찰의 높고도 깊은 법음은 산중을 가로 지르며 퇴설당 마당으로 엄숙히 내려앉는다. 설중단비의 청천 벽력같은 가르침이 준엄한 모습으로 성성히 살아 있는 해인의 장중한 바다는 푸르디 푸르고도 고요하다. 그 기세에 불어오던 바람이 속진의 잔재까지 쓸어 안고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