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선림보훈집 (禪林宝訓集) 1988 년 12 월(82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1
수암스님이 말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환난을 생각해 미리 방지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생사의 큰 환난을 생각하여 도를 닦아 방지하고 드디어는 이 도를 크게 경영하고 원대하게 전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도를 구하는 일은 현 실정에서 멀다. 절실하게 당면한 이익을 구하는 것만 못하다”라고들 한다. 이리하여 들뜨고 화려한 것만 다투어 익히고 털끝만한 이끗도 비교하고 헤아리면서 눈앞의 일만 희망하고 구차한 계교를 품는다. 때문에 한 해를 주선해 갈 계획조차 세우지 않으니, 더구나 생사를 염려하겠는가. 그러므로 납자들은 날로 야비해지고 총림은 계속 피폐되며 기강이 실추되어, 드디어는 밋밋하다가 거의 구제가 불가능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슬프다 생각치 않아서야 되겠는가.

2
수암스님이 말하였다.
옛날 운거산(雲居山)에 유람하다가 고암(高菴) 스님이 야참(夜參)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지극한 도는 너무 곧아서(徑挺: 直指) 상식을 벗어나 있으니, 모름지기 마음을 진실히 하고 뜻을 바르게 하여 교만과 꾸밈과 치우친 사견을 일삼지 말아야 한다. 교만과 수식은 속임수나 아첨에 가깝고 삿됨과 치우침은 올바른 중도가 아니므로 지극한 도와는 모두가 일치하지 못한다.” 나는 나름대로 그 말씀이 이치에 가깝다 생각해서 각고의 의지로 실천해 가다가 불지선사(佛智先師)를 뵙자마자 크게 깨닫고 평생 행각의 목적을 저버리지 않게 되었다.

3
수암스님이 말하였다.
월당(月堂)스님은 주지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도를 실천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았다. 화주(化主)를 보내지 않았고, 찾아가서 배알하는 것도 일삼지 않았다. 해마다 대중을 헤아려 소득을 따라 물자를 사용하였다. 납자들 가운데 화주하려는 마음을 먹는 사람이있으면 그들을 물리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부처님이 비구에게 경계하기를 발우를 지니고 신명을 도우라 하셨는데, 스님께서는 왜 거절만 하고 용납하지 않는지요?” 월당스님은 대답하였다. “우리 부처님께서 살아 계셨을 때에는 가능했으나 요즈음 그렇게 하면 반드시 이익을 좋아하는 자가 있어서 자신을 파는 데까지 이를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월당스님의 이 말이 점점 불어나는 악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신 절실하고도 현명하며 실제에 걸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요즈음의 세대를 보건대 어찌 자신을 파는 데 그칠 뿐이겠는가.

4
수암스님이 시랑(待郞)인 우연지(尤延之)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대우(大愚), 자명(慧明), 곡천(谷泉), 낭야(琊琊)스님이 도반이 되어 분양스님을 참방하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하동 지방은 추위가 극심한지라 모두들 가기를 꺼려했으나 자명스님만은 도에 뜻을 두어 아침 저녁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읍니다. 밤에 좌선하다가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자신을 찌르고는 이렇게 탄식하였읍니다. “옛사람은 생사의 큰일을 위해서 먹지도 자지도 않었다던데,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토록 방종하여, 살아서는 시대에 도움이 못 되고 죽어서는 후세에 남길 이름이 없으니, 이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고는 하루아침에 하직하고 되돌아가 버렸읍니다. 그러자 분양스님은 “초원(楚圓) 이 지금 떠나버렸으니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겠구나” 하고 탄식하였습니다.

5
수암스님이 말하였다.
옛날 덕 있는 주지는 솔선하여 도를 실천하였을 뿐, 구차하게 명리를 구하느라고 인의를 저버리고 방자한 적은 없었다. 옛날 분양스님은 상법•말법 시대의 풍속이 얄팍하여 학자 교화하기 어려운 것을 매양 탄식하였다. 이에 자명스님이 “이는 매우 쉬운 일인데 문제는 법을 주관하는 자들이 잘 인도하지 못하는 데 있읍니다”고 하자, 분양스님이 말하였다. “순수하고 성실한 옛사람도 이삼십 년을 지내고서야 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자 자명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성철(聖哲)의 얘기가 아닙니다. 훌륭하게 도에 매진하는 자라면 천일 공부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명이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이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분양 지방은 많이 추웠으므로 여기서 야참(夜參)을 마쳤다. 다른 어떤 비구는 분양스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모임에는 대사(大士)가 여섯〔자명 원(慈明圖), 대우 지(大愚芝), 낭야 각(璥倻寬), 곡천 도(谷泉道), 법화 거(法華擧), 천승 태(天勝泰)〕이나 있는데 왜 법을 설하지 않는지요?” 그러더니 천일이 못된 삼년 안에 과연 여섯 사람이 도를 이루었다. 분양스님은 이 얼로 게송을 지었다.
호승(胡僧) 금석(金錫)의 광채
법을 청하러 분양에 이르렀네.
여섯 사람큰 그릇 이루리니
법을 펴 드날리라 권하네.

6
투자 의청(投子義淸) 스님이 은사 수암스님의 초상화를 그려 놓고 찬(찬贊) 을 지었다.

나의 스승 수암스님
당당하기 당할 자 없네.
하루 종일 한끼 공양에
자리에 눕는 일 없네.
선정에 깊이 드시어
들고 나는 숨마저 잊으셨는지.
명성이 대궐에 퍼져
선덕전에서 선을 논할 제
용안(龍顔)이 활짝 펴지사
비단을 내리시었네.
세번 굳이 사양하시니
천자 더욱 칭찬하셨네.
진실한 도인이시여
초목도 빛을 드날립니다.
못난 제게 법을 물려주시니
향 사루어 찬을 지어봅니다.

이 찬(贊)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른바 청출어람(靑出於藍) 이라 하겠다.

7
불지선사(佛智先師)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연조(東山演祖) 께서는 경룡학(耿龍學)에게 ‘나에게 원오(圓悟)가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고 새에게 날개가 있는 것과 같다’ 하셨다. 그 때문에 승산인 자암거사(紫巖居士)가 이렇게 찬탄하였다. ‘스승과 제자(師資)가 서로를 인정하며 동시에 만나기를 희망하니, 그들의 한결같은 정분을 누구라서 이간질하겠는가.’ 자압거사는 말의 이치를 안다 할 만하다. 요즈음에 제방(諸方)의 큰스님들은 딴 마음을 품고 납자를 거느리며, 한편 납자들도 세력과 이익을 끼고 큰스님을 섬기는 경우를 보게 된다. 주인과 객이 서로 이익을 다투고 상하가 속이고 업신여기니 어떻게 불교가 일어나고 총림이 성대해지겠는가.”

8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려면 진실하고 간절해야 한다. 멀어 진실하고 간절하지 못하면 느껴지는 바도 그에 따라서 얕으리니, 어떤 사람이 그런 말에 기꺼이 감동하겠는가. 옛날 백운(白雲)스님께서 나의 스승님을 전송하실 때 사면(四面)에 머무시면서 간절하게 말하셨다. ‘조사의 도가 해이해져서 쌓아올린 달걀마냥 위기에 처해 있으니, 멋대로 방일하며 헛되게 세월만 까먹고 지극한 덕을 못쓰게 해서는 안된다. 넓게 받아들이는 도량으로 세상을 이익케 하고 중생을 보존할지니, 이 일을 가지고 불조의 은혜에 보답하거라.’ 당시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누구라서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투자(投子), 그대는 지난날 부름을 받고 대궐로 들어가 천자를 대면하였으니 실로 불교 집안의 다행이라 하겠다. 자기를 낮추고 도를 높이어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지 자신을 뽐내고 자랑해서는 안된다. 예로부터 선철(先哲)들은 겸손과 공경으로 자기를 보존하고 덕을 완전히 하였으며, 세력과 지위를 영화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청아함은 한 시대를 진동하였고, 아름다음은 만세토록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내 죽을 날이 멀지 않아 다시는 못 볼까 염려스러우니, 때문에 이를 간절히 부탁한다.”
수암스님은 젊어서 기상이 훤출하였다. 큰 뜻〔志〕이 있어 기개와 절도를 숭상하였으며, 들떠 쏠리는 일도 없고 자잘한 것까지 다 따지지도 않았다. 마음은 모든것을 용납하였으며, 몸은 의로움을 따랐다. 재해가 목전에 닥쳐도 실색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여덟 절의 주지를 역임하고 네 개 군(郡)을 편력하면서 이르는 곳마다 열심히 도를 실천하여 일으켜 세우는 것을 마음가짐으로 하였다. 순회(淳熙) 5년(1178년)에 서호(西湖)의 정자원(凈慈院)으로 은퇴하였는데 이런 게송을 지었다.

황도(皇都)의 큰 절에서 육 년을 쓸고 닦았더니
기와 쪼가리가 제석범천궁(帝釋梵天宮)이 되었네.
오늘 집이 완성되자 갈 길 가시니
지팡이의 판면에서 청풍이 일어나네.

사람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무시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작은 배로 수수(秀水)의 천녕사(天寧寺)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병을 보이더니 대중과 이별하고 임종을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