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선림보훈집 (禪林寶訓集) 1987 년 3 월(61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6. 오조법연(五祖法演)선사의 말씀
요즈음 총림에서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명성이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함은 범행(梵行)이 청백하지 않고 진실·정당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명예와 이양(利養)을 구하고 화려한 장식을 널리 자랑한다면 마침내는 식자(識者)들에게 비난받게 된다. 그러므로 요묘(要妙)를 덮어버린 상태에서는 도덕이 부처님이나 조사와 같다고 할지라도 듣고 보는 것이 의심스러워서 믿어지지 않는다.
그대들이 다른 날 만약 절의 주지가 되가든 마땅히 이로써 스스로 힘쓰도록 히여야 할 것이다.

우리 스님*1께서 처음 양기(揚岐)에 머무실 때, 집은 서까래가 무너져서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다. 마침 늦겨울이라 싸락눈이 침상에 가득하여 거처가 편안하지 못하니, 납자들어 정성을 다하여 고치겠다고 하였으나 스님께서는 이를 물리치시며 말씀하였다.
“우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기가감겁(減劫)에 당하면 높은 언덕이 깊은 골짜기로, 깊은 골짜기가 높은 언덕으로 변천이 항상하지 않으리라’ 하셨다. 어떻게 뜻대로 원만하게 만족하기를 구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출가하여 도를 배우느라 손과 발이 아직 편안치 못하면서 이미 사오십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공부는 한가하게 하면서 넉넉한 집을 짓겠느냐? ”
다음날 상당(上堂)하여 밀씀하셨다.
“양기가 잠깐 머물자 집의 벽이 성겨 온 침상에 가득히 진주같은 눈을 뿌린다. 추위에 목을 움추리고 가만히 탄식하며 옛 사람이 나무 아래에서 살았던 일을 돌이켜 기억한다.”

납자(納子)는 마음의 성(城)을 지키고 계율을 만들어서, 밤낮으로 이를 생각하고 아침 저녁으로 이를 실천해야 한다. 실천은 생각을 넘음이 없고 생각은 실천을 넘음이 없으니 그 처음이 있으므로 그 끝을 이룬다. 마치 농사꾼의 밭두둑같이 경계를 분명히 한다면 그 허물이 드물 것이다.

이른바 총림(叢林)이란 성인과 범부를 도야하고, 재지(才智)와 국량(局量)을 양육하는 땅이며 교화가 유출하는 곳이다. 비록 무리지어 살며 끼리로 모였다 할지라도 통솔하여 이를 다스려야 한다. 지금 제방(諸方)에서는 각기 스승을 계승하고서도 선대(先代)의 성인의 법도를 지키는 데에는 힘쓰지 않고 좋고 나쁨의 치우친 감정으로 자기의 주관적인 옳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개혁하려 한다. 후배들로 하여금 마땅히 무엇으로서 법을 취하게 하려 하는가?

중생을 이롭게 하고 도를 전하는 데는 사람을 얻는 일에 험써야 한다. 그러나 사람을 알기란 어려운 것으로서 성인 · 철인이라 하여도 고민하는 바이다. 그 말만 듣고는 그 행동을 보증하지 못하며, 그 행동만 구한다면 그 재능을 빠뜨릴까 염려스럽다. 스스로 처음부터 교유하여 그 사람 전체를 잘 살피지 못했다면 그 지조와 행동을 정탐하고 그 그릇과 재능을 관찰한 연후에야, 도를 지키며 도의 씀을 감추는 자를 얻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예를 팔고 외모나 꾸미는 자는 그 거짓이 용납되지 않으며, 비록 가만히 비밀스럽게 한다 하여도 또한 연원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무릇 관찰 · 정탐 · 살핌 · 들음의 이치는 참으로 하루아침과 하루저녁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남악 회양선사는 육조대사를 뵈온 후에도 오히려 15년이나 모시고 지냈으며, 마조대사가 남악선사를 뵈었을 때도 상종하기를 십여년이나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알라. 선대의 성인들이 법을 주고 받을 때 참으로 천박한 사람이 감히 전해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한 그릇의 물을 한 그릇에 전하는 것처럼 해야 비로소 큰 법을 감당하여 계승하는 것이니, 이것이 관찰 · 정탑 · 살핌 · 들음의 이치가 분명한 증험이다. 어떻게 교묘한 말 좋은 얼굴 빛과 편벽한 아첨으로써 선발된 사람들이겠는가?

주지의 예의는 은혜와 덕, 이 두 가지를 겸행하는 데 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없어도 안된다. 은혜롭기만 하고 덕이 없으면 사람이 공경하지 않고, 덕스럽기만 하고 은혜가 없으면 사람이 그리워하질 않는다. 은혜를 그리워 한다는 것을 알고 여기에 덕을 더하여 서로를 구제한다면, 펴는 은혜는 상하를 편안하게 하고 사방의 사람을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덕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고 은혜를 더하여 서로 도움이되게 하면 지닌 덕은 선각(先覺)을 계승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지도하는데 충분하다. 그러므로 훌륭하게 주지하는 사람은 덕을 지녀야 할 것이다. 덕으로서 기를 수 있으면 굴욕스럽지 않고, 은혜로서 실천할 수 있으면 은택이 있다. 이로 인해서 덕과 은혜가 서로 축적되고 은혜와 덕이 서로 행한다.
이와 같으면 덕을 닦지 않아도 불조(佛祖)와 동일하게 공경하고, 은혜를 수고롭게 허비하지 않아도 부모처럼 그리워한다. 오호(五湖)와 사해(四海)에서 도에 목적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라서 귀의하지 않겠는가? 주지가 앞으로 도덕을 전하고 교화를 일으키려 한다면 이러한 요점에 밝지 못하고서는 아니 되리라.

납자(納子)의 절의(節義)가 있어서 세울만한 사람을 보면 방장실에 드는 것을 준엄하게 거절하고 사랑스러운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편협하여 삿되게 아첨하고 하는 짓이 외람되고 좀스러워 가르치지 못할 사람을 살펴서 더욱 소중하게 사랑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헤아리지 못하였다.
아 아! 법연선사가 취하고 버렸던 것은 반드시 도가 있었으리라.

옛 사람은 자기의 허물 듣기를 좋아하고 착한 일 하기를 기뻐하였다. 관대하게 포용하기를 잘 했고 남의 나쁜 점을 숨겨주는 데 후덕하였다. 겸손하게 친구를 사귀었고 부지런히 대중을 구제하였으며, 얻고 잃는 것 때문에 그 마음을 둘로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광명이 크게 커서 옛날과 오늘에 밝게 비추는 것이다.

불감(佛鑑)에게 말씀하였다.
“주지의 요점은, 대중에 임하면 귀함이 풍성하고 가득찬데 있으며, 자기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간략함을 따라야 하고, 그 나머지 세세한 일은 모두 마음에 관계하지 말이야 한다. 사람을 채용하면 깊이 정성으로 밀어주고 말을 선택하여 일부러 정중한 쪽을 취해야 한다. 말이 정중하게 보이면 주인은 자연히 존대하고, 다른 사람을 정성으로 밀어주면 대중의 마음에 스스로 감동한다. 존대하면 존엄하지 않아도 대중이 복종하고 감동하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이루어진다. 훌륭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각각 그 회포를 털어놓고, 작거나 크거나 모두가 그 힘을 분발한다.
그가 가진 세력으로 어지럽게 공갈로서 협박하여 어쩔 수 없어서 따르게 하는 사람과 어찌 만배의 차이 뿐이겠는가?”

곽공보(郭功輔)*2 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성정(性情)은 원래 참으로 항상하게 지키지 않으면 변화에 따라 날마다 천류한다. 예로부터 불법(佛法)이 융성하고 쇠퇴하는 바가 운수에 있긴 했어도 그 이치는 교화로 말미암아 성립되지 않음이 없었다. 옛날 강서 · 남악의 모든 조사께서 중생을 이롭게 할 때 순풍(淳風)으로 부채질하고, 청정으로 절도있게 하고, 도덕으로서 덮고, 예의로 가르쳐 학자로서 보고 들음을 거두어 들이게 하며, 마음의 교활하고 간사함을 막으며, 즐기는 욕망을 끊고서 이양(利養)을 잊게 하였다. 때문에 날로 착하여지고 허물을 멀리하고 도는 완성되며 덕을 갖추었으나 스스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옛 사람만 못한 차이가 많다. 반드시 이도(道)를 참구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뜻을 확고하게 하여 바꾸지 말아서 깨달음을 기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재앙과 잘 잘못은 조물주에게 맡겨버리고 구차하게 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찌 성취하지 못할까 미리 근심하며 이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털끝만큼이라도 되돌아보며 염려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 싹텄다 하면, 오로지 금생에만 요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천생(千生) 만겁(萬劫)에 이른다 할지라도 성취할 시절이 없으리라.”


詿
*1 원주(遠州) 양기산(揚岐山)의 방회(方會)선사. 자명초원(慧明楚圓)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남악의 10세 법손이다.
*2 제형(提形) 사람 곽정상(郭正祥)을 이른다. 자(字)는 공보(公輔), 호(號)는 정공거사(淨空居士)이다. 백운수단(百雲守端)에게 도를 물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