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선림보훈집 1989 년 1 월(83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월당 도창(月堂道昌)스님의 말씀
1

옛날 대지(大智)스님께서 말세의 비구들이 교만하고 게으를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법도를 지어 이를 예방하셨다. 그들의 그릇과 능력에 따라 각각 소임을 정하였는데, 주지는 방장실에 대중은 큰 방에 거처하며, 예시한 십국두수(十局頭首)의 엄숙하기는 관부(官府)와도 같았다.
윗사람은 굵직한 일을 주관하였고 아랫사람은 세부 조목을 정리하여, 상하가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이 손가락을 움직이듯 서로 받들고 통솔하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배들이 법도를 따라 계승하여 공경하고 떠받들며 조심스럽게 실천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옛 성인의 유풍(遺風)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총림이 쇠퇴하여 납자들이 재능에 통한 것만을 귀하게 여기고 절개 지키는 것을 천시한다. 들뜨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진실함과 소박함을 가벼이 여기기를 날로 달로 더하여 점점 말세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편안함만 훔치는 정도였다가 빠져들어 익숙해진 지가 오래되면 으레 그런 것이려니 하고 비리(非理)로 여기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두려워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평소에는 달콤한 말로 굽신거리며 아첨하다가 틈이 생기면 사나운 마음과 속임수로 서로를 해친다. 여기에서 일을 이룬 사람은 훌륭하다 하고 패한 자는 어리석다 하며 존비(尊卑)의 질서나 시비(是非)의 이치를 다시는 묻지도 않는다. 일단 상대방에서 그렇게 하고 나면 이쪽에서도 똑같이 본받으니, 아랫사람이 말하고 나면 윗사람이 그를 따르며 앞에서 행하고 나면 뒤에서 따라 익힌다.
아-아, 성인이신 우리 스승이 원력을 바탕으로 백년 공부를 쌓지 않으셨다면 그 고질화된 폐단을 개혁할 수가 없으리라.

2
월당스님이 정자원(淨慈院)에 머문 지가 매우 오래되었다. 어떤 사람이 “스님께서는 도를 수행하신 지가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문하에는 제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묘담(妙湛)스님을 저버리는 것이 아닌지요?” 하고 말하자, 스님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뒤에 거듭 이를 따지자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이런 소리를 듣지도 못하였는가. 옛날에 오이를 심어 놓고 매우 아끼는 자가 있었다네. 그런데 무더운 여름날 한낮에 물을 주자 오이는 발꿈치 돌리는 순간 시들어 버렸다네. 무엇 때문이었겠나? 신경쓰기를 게을리해서가 아니라 물을 적시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니, 시들게 하기에 딱 알맞은 짖이었다네.
제방의 노숙(老宿)들이 납자를 끌어줄 때, 그의 도업이 안으로 충실한지, 재능과 그릇은 크고 위대한지를 관찰하지 않고 그저 성급하게 위하는 마음만 쓰려 할 뿐이지. 그리하여 납자들의 도덕을 보면 더럽고 언행을 보아도 도리에 어긋나 있으며 공평정대함으로 말하자면 삿되고 아첨스러우니, 사랑이 그의 분수에 지나쳐서가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한낮에 오이에 물을 주는 것과도 같다네. 나는 식견있는 사람들이 비웃을까 깊이 염려스럽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네.”

3
황룡스님이 적취암에 머무를 때 병으로 석달을 문 밖으로 나오질 못하였다. 그때 진정(眞淨)스님은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다가 머리와 팔을 태우기까지 하면서 은밀한 가피력을 빌었다. 황룡스님이 이 말을 듣자 꾸짖으며 말하였다.
“살고 죽는 것은 원래 내 분수이다. 그대는 참선을 했는데도 이토록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였는가.”
그러자 진정스님이 여유있게 대꾸하였다.
“총림에 저는 없어도 되지만 스님께서 없어서는 안됩니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진정스님이 스승을 존경하고 법을 소중히 하는 정성이 이 정도니 뒷날 반드시 큰 그릇을 이루리라.”

4
황태사 노직(黃太史魯直)이 일찌기 이렇게 말하였다.
“황룡 남(黃龍南)스님은 인격이 깊고 두터워 다른 것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으며 평소에 교만이나 꾸밈이 없었다. 문하의 제자들도 종신토록 그가 희노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심부름하는 일꾼에게까지도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우했다. 그리하여 다른 명성이나 기개에 흔들림 없이 자명스님의 도를 일으켰던 것이지 구차하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5
건염(建炎) 기유(己酉, 1129) 상사일(上巳日)에 종상(鍾相)이 풍양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문수 심도(文殊心導)스님께서는 난리에 곤액을 당하고 있었는데, 도적들의 세력이 성대해지자 그의 제자들이 도망을 가버렸다. 그러자 스님은 “재앙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하며 의연한 모습으로 방장실에 계시다가 끝내는 도적들에게 해를 당하였다.
무구거사(無垢居士)는 그 법어를 발췌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오직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본래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태어나도 삶에 집착하지 않으며, 한번도 소멸한 적이 없다는 것을 통달하고 죽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환(禍患)을 당해 죽을 찰나에도 자기가 지키던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있다 하였는데, 스님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스님의 도덕과 절의는 총림을 교화하고 모범을 후세까지 드리우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스님의 이름은 정도(正導), 미주(眉州) 단릉(丹積)사람이며, 불감(佛鑑)스님의 법을 이었다.

심문 운분스님의 말씀

1
납자들이 참선을 하다가 병통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병통이 이목(耳目)에 있는 자들은 눈썹을 솟구치고 눈을 노기등등하게 하며, 귀를 기울여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선(禪)으로 여긴다. 병통이 입과 혀에 있는 자들은 전도된 말로 어지럽게 할!할!(喝喝)하는 것을 선으로 여긴다. 병통이 손과 발에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며, 여기 저기 가리키는 것으로 선을 삼는다. 병통이 가슴속에 있는 자들은 현묘함을 끝까지 궁구하고 알음알음을 벗어나는 것을 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경우가 사실은 모두 병통이다. 진짜 선지식(本色宗師)이라야 깊숙한 기미에서 분명히 살펴낼 수 있으니, 보자마자 그가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를 알아차리며, 입문했을 때 깨칠 수 있을는지 못할는지를 분별해 버린다. 그런 뒤에 한 방을 날려 끈질기게 이어지던 그들의 미세한 번뇌까지 벗겨주며, 막힌 곳을 쳐서 진실과 거짓을 판정케 한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의 방편만을 고집하느라 변통(變通)에 어두운 일이 없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끝내 안락하여 일 없는 경지를 밝히게 한다. 그런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2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 사람 가운데서 빼어나면 영특[英]하다 하고, 만 사람 가운데서 영특하면 걸출[傑]하다” 하였다. 납자로서 지혜와 수행이 총림에 소문난자라면 어찌 영걸(英傑)한 인재에 가깝다 하지 않으랴. 단지 부지런히 탐구하여 거짓을 버리고 진실을 지녀 누구나 제자리에 쓰일 수 있게 한다면 절의 규모나 대중의 수에 관계없이 모두가 그의 교화를 따르리라.
옛날 백정의 풍혈(風穴), 우란(牛欄)의 약산, 대매의 상공(常公), 형초의 자명스님과 같은 분들이 모두 위와 같은 영걸이셨는데, 당시 그들과 어울리던 유유자적한 무리들이 이들에게 지위나 외모를 구했더라면 보고서는 반드시 업신여겼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영광된 사석(師席) 법좌(法座)에 올라 모든 사람들이 에워싼 가운데 불조의 도를 밝혔으니, 만세의 빛이 되는지라 총림에서 누군들 풍모만 바라보고도 쏠리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선배들은 아름다운 재질과 영걸(英傑)한 기상으로도 구구하게 시기를 만나지 못했을 즈음에는 수치와 더러움을 참고 세상에 뒤섞여 함께 어울리면서 이렇게 살아갔는데, 하물며 이보다 더 못한 자의 경우이겠는가.
아, 옛날은 지금과 같으니 피차 마찬가지다. 기어코 풍혈스님과 약산스님을 기다려 스승 삼으려 한다면 천년에 한번 만날 것이며, 꼭 상공스님과 자명스님을 도반으로 의지하려 한다면 백년에 한번쯤 나올 것이다.
모든 일은 은밀한 곳으로부터 현저한 데에 이르며, 공은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을 이루는 법이니, 배우지 않고도 성취하고 수행하기에 앞서 먼저 깨친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스승을 구하고 벗을 선택하며 도를 배우고 덕을 닦는 일이 가능하리라. 그렇게 되면 천하의 일 중에서 무엇을 시행한들 되지 않겠는가.
옛사람은 말하기를 “사람 알아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이 일은 성인도 부족하다 여기셨다” 하셨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이겠는가.

3
교회별전(敎外別傳)의도는 지극히 간요(簡要)하여 애초에 아무 말이 없었다.
선배들은 의심없이 실천하고 꾸준히 지켜나갔다. 그러다가 천희(天禧, 1017-1022) 연간에 설두스님이 박식과 말재주로 의미를 아름답게 한답시고 손을 대어 희롱을 하였으며, 참신하게 한답시고 교묘하게 다듬어서 분양(粉陽)을 계승, 송고(頌古)를 짓고 당세의 납자를 농락하였으니 종풍(宗風)이 이로부터 한번 변하게 되었다.
선정(宣政, 1100-1125) 연간에 이르러 원오(圓悟)스님이 여기에다 또 자기의 의견을 붙이고 이를 떼어내 「벽암집(碧巖集)」을 만들었다. 그때 옛날의 순수하고 완전한 경지에 매진하던 인재로서 영도자(寧道者), 사심(死心), 영원(靈源), 불감(佛龕) 같은 모든 노숙들도 그의 학설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새로 진출한 후학들이 그의 말을 보배처럼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아침저녁으로 외우고 익히면서 지극한 학문이라 말들 하며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없었다.
슬프다. 잘못되어 가는 납자들의 공부[用心]여.
소흥(紹興) 초에 불일(佛日)스님이 민 지방에 들어갔다가 납자들이 끌어당겨도 되돌아보질 않고 날로 달로 치달려 점점 폐단을 이루는 것을 보고는 즉시 그 경판(經板)을 부수고 그 학설을 물리쳐버렸다. 이로써 미혹을 제거하고 빠져든 이를 구원하였으며 번잡하고 심한 것을 척결하고 삿됨을 꺾어 바른 기를 제시하게 되었다.
이런 기세가 널리 확산되자 납자들이 이제껏 잘못되어 왔다는 것을 차츰 알고 다시는 흠모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일스님이 멀리 내다보는 고명한 안목으로 자비 원력을 힘입어 말법의 폐단을 구하지 않았더라면 총림에는 두고두고 걱정거리가 남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