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선림보훈집(禪林宝訓集) 1989 년 3 월(85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간당행기(簡堂行機)스님의 말씀

옛날엔 몸을 수행하고 마음을 다스리면 다른 사람과그 도를 나누어 가졌고 사업을 일으키면 다른 사람과 그 공로를 함께 하였으며, 도가 완성되고 공덕이 드러나면 남과 그 명예를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도는 완전히 밝아지고 공덕은 다 성취되었으며 명예는 영화로왔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방법만 고수하며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을까 염려할 뿐 아니라, 또 선(善)을 따라 의로움을 힘써 자신을 넓히지도 못한다. 또한 자기의 공로를 독점하여 남이 그것을 차지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덕 있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김으로써 자신을 크게 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도는 가리워지고 공로는 손상되며 명예는 욕스러워지는 꼴을 면치 못한다.
이것이 고금 학자의 큰 차이다.

2
“도를 배우는 것은 마치 나무∙를 심는 일과도 같다. 잎이 무성해야 베어서 땔감을 공급하고 좀 자란 뒤에야 찍어서 서까래를 만들며, 더 자라면 베어서 기둥을 만들고 완전히 커져야 대들보가 되니, 이는 노력을 많이 들여야 그 쓸모도 커진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
때문에 옛사람은 그 도가 견고하고 커서 좁지 않고 그 지향하는 목적은 멀고 깊어서 지나치게 세속적이지 않았으며, 말은 고상하여 천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때를 잘못 만나 추위와 주림으로 언덕이나 골짜기에서 죽었다 해도, 그가 남긴 가풍과 공덕은 백천년토록 뻗쳐 후인들이 본받고 전하였던 것이다.
가령 지난날 짧은 도로 구차하게 용납하고 가까운 목적으로 영합되기를 구하며, 비롯한 말로 세력 있는 이를 섬겼더라면 그 이익은 자기만을 영화롭게 하는 데 그쳤을 뿐, 남은 은택이 후세에 두루 미칠 수 있었겠는가.”

간당행기

영지원조(靈쏠元照)스님의 말씀

영지사(靈芝寺) 원조(元照)스님이 말하였다.
“참소〔讀 : 훌륭한 이를 해칠 목적으로 하는 절실한 말〕와 비방〔謗 : 단순히 남의 단점만을 들춰내는 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참(讀)은 반드시 방(謗)을 의지하여 일어난다고 해야 하리라. 이는 비방에서 그치고 참소까지는 가지 않는 경우는 있어도 참소하면서 비방을 곁들이지 않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깊숙한 참소는 증오와 질투로 시작하였다가 신의를 가볍게 보는 결과를 낳는데, 그것은 아첨하는 소인들이나 하는 짓이다.
옛날에도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보필하는 자,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자, 의로움을 안고 벗이 된 자들이 있어 군신이 서로 마음을 얻고 부자가 서로 사랑하며 벗들은 서로 친하였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의 깊숙한 참소에 녹아나서 반목(反目), 빈축하며 사이가 벌어져 서로 등지게 된다. 그리하여 서로를 원수처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성현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별하지 못했다가 오랜 후에 밝혀진 것도 있고, 살아서는 몰랐다가 죽은 후에 밝혀진 것도 있으며, 죽음에 이르도록 분별하지 못하고 영원히 은폐된 경우도 있으니 이런 것은 이루 다 셀 수조차 없다.
자유(子游)는 이렇게 말했다.
“임금을 섬기면서 너무 꼿꼿하게 간언하면 자기에게 욕됨이 돌아오고, 친구간에 충고가 잦으면 사이가 벌어진다.”
이는 사람들에게 깊숙이 참소하는 말을 멀리하도록 주의를 시킨 것이다.
아아, 참(讀)과 방(謗)을 반드시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경사(經史)에 이를 기록하여 다 밝혀 놓았기 때문에 공부하는 이들이 보고 그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더러는 자신이 비방하는 입에 빠져들어 답답하게도 죽을 때까지 스스로 밝히지 못한 자가 있었다. 이는 틀림없이 헐뜯는 사람이 아첨한 것이리라.
또다른 소인들이 그의 앞에서 다시 남을 혈뜯는 경우에 이르러서도, 들어주며 당연하게 여기니 이를 총명하다 할 수 있겠는가.
기막히게 헐뜯는 사람은 교묘하고 민첩하게 싸우고 얽어매며 영합하고 뒤집어 씌우면서 멍청한 이들로 하여금 마치 귀신에게 흘린 듯하게 한다. 그리하여 죽을 때까지도 살피지 못한 자가 있게 한다.
공자께서도 이 문체에 대해서는 ‘자기도 모르게 점점 스며드는 헐뜯음과 피부가 저릴 만큼 애절한 하소연’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이는 점차적으로 스며와서 사람들이 미리 알아채지 못함을 경계한 것이다.
지극히 효성스런 증자(曾子)의 경우에도 어머니는 그가 반드시 살인을 했으리라고 의심하였으며,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왕과 방공과의 대화에서도, 시장은 숲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거기에 호랑이가 있으리 라고 꼭 의심할 것이라 하였다.
더러는 이런 태에 넘어가지 않은 자도 있었으니, 바로 그런 이를 총명하고 원대한 군자라 말한다.
나는 어리석고 졸렬하며 엉성하고 게을러서 다른 사람에게 아부하고 부질없이 기쁘게 하지는 않았다. 드디어는 이 때문에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자신을 반성하며 이렇게 말했다.
‘상대방의 말이 과연 옳은 것일까. 옳다면 나는 당연히 허물을 고치리라. 그렇게 되면 상대방이 바로 나의 스승이다. 상대방의 말이 결과적으로 잘못일까. 그렇다면 상대방이 부질없을 뿐이다.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
이런 판단이 선 후로는 귀로 듣고만 있었지 입으로는 따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살폈느냐 살피지 못했느냐 하는 것은 그들의 재능과 식견이 총명하지 못한가에 있었을 뿐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잘잘못을 따져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인심이나 사려 하겠는가. 그러나 오랜 후에 밝혀질는지, 뒷세대에 가서야 밝혀지지 않을는지는 모를 일이다.
문중자(文中子: 수나라 양제 때 사람, 王通)는 말하기를 어떻게 비방을-그치게 할까. 그러니 저러니 따지지 말아야 하리라. 하였다.
나는 이 말씀을 명심하리라.

영지원조

뇌암도추(憹菴道樞)스님의 말씀

1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깨닫기를 기약하고 진실한 선지식을 찾아 의심을 해결하여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알음알이〔情見〕가 다하지 못하면 바로 이것이 생사의 근본이다.
알음알이가 다한 곳에서는 모름지기 그것이 다한 까닭을 참구해야 한다. 이는 마치 사람이 집 안에 었으면서 하나라도 미비한 일이 있는지를 근심하는 것과도 같다.
위산스님은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인연따라 일념(一念)에 돈오(頭惜)하는 본래 이치를 얻긴 했으나, 그래도 시작없이 흘러온 습기(習氣)는 한꺼번에 다 없애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납자들에게 현전(現前)하는 업식(業識)을 말끔히 제거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며, 따로 수행문이 있다 하여 그리로 나아가게 해서는 안된다."
위산스님은 고불(古佛)이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혹 그렇지 않았더라면 죽는 마당에 손발을 허우적 거리며 여전히 끓는 물에떨어지는 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혹 그렇지 않았더라면 죽는 마당에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여전히 끓는 물에 떨어지는 새우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으리라.

2
율장(律藏)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승물(增物)에 네 가지가 었다.
첫째는 상주상주숭물(常住常住慣物)1), 둘째는 시방상주숭물(十方常住增物)2), 셋째는 현전상주승물(現前常住價物)3), 네째는 시방현전상주승물(十方現前常住慣物)4)이다.
상주물은 털끝만큼이라도 범해서는 안된다. 그 죄가 가볍지 않다고 선성 후성(先聖後聖)이 그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셨는데도 듣는 사람이 더러는 반드시 믿지도 않으며, 믿는다 해도 꼭 실천하지는 않는다.
나는 세상에 나아가 도를 행할 때나 혹은 물러나 은둔할 때나 언제고 이 문제를 절실히 염두에 두고 지냈다. 그러면서도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 게송을 지어 자신을 경책하였다.

시방승물 산처럼 무거운데
만겁천생인들 어찌 쉽게 돌려 주랴
모든 부처님 말씀 믿지 않으면
뒷날에 어떻게 지옥을 면하랴
사람몸 얻기 어려우니 잘 생각하라
축생이 되었을 땐 세월이 길리라
쌀 한 톨 탐하기를 우습게 알면
부질없이 반 년의 양식을 잃으리라.

十方僧物重如山
萬劫千生荳易還
金口共譯曾未信
他年爭免鐵城關
人身難得好思量
頭角生時歲月長
樓笑食他一拉米
等閔失去半年種

3
「열반경(混盤經)」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어떤 사람이 대열반에 대한 설법을 듣고서 한 구절 한 글자마다 그대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는 생각〔相〕을 내지 않고, 나는 설법을 듣노라 하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부처님은 이러이러 하시겠구나 하는 생각, 어떠어떠하게 설법하리라는 생각들을 모두 내지 않는다면 이러한 의미를 모양없는 모양〔無相相〕이라 한다.”
달마대사가 바다를 건너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았던 것은 앞서 말한 무상(無相)의 뜻을 밝힌 것이지, 대사 자신이 새로운 뜻을 제시하여 따로 종지를 세운 것은 아니다.
요즈음 학자들은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선종(輝宗)은 별도의 종지이다”라고 말하며, 선을 으뜸으로 여기는 자는 교(敎)를 비난하고 교를 으뜸으로 여기는 자는 선을 틀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두 갈래로 종지가 갈라져 서로가 시끄럽게 헐뜯으며 그만 두질 못한다.
아-아, 지식이 천박하고 고루하여 한결같이 이 지경이 되었다. 이는 어리석지 않으면 미친 자이니, 매우 탄식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