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인천보감(人天寶鑑) 1990 년 2 월(96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소동파(蘇東坡 : 1036~1101)가 말하였다.
“어머니께서 나를 가졌을 때 꿈에 비쩍 마른 애꾸스님 한분이 문 앞에 오셨다는데, 열살 남짓 되어서는 내 꿈에 자주 보였다. 그러니 나는 전생에 스님이었던가 보다. 또 내 아우 자유(子由)가 진정 극문(眞淨克文), 수성 상총(寶聖常總)스님과 함께 고안(高安)에 있을 때 그들이 사계(師戒)스님 만난 꿈 이야기를 똑같이 했으니 아우가 사계스님의 후신(後身)임에 틀림없다.”
소동파는 진정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전생에 이미 법을 만난 듯하오니, 바라옵건대 더욱 채찍질하시어 저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하였다.

그가 금산사(金山寺)에 갔을 때 마침 방에 들어가는 불인(佛印了元 : 1032~1098)스님과 마주쳤는데 불인스님이 말하였다.
“여기에는 단명학사[端明殿學士 : 소동파의 직명]가 앉을 자리가 없소”
“스님 몸[四大]을 빌려서 선상(禪床)을 만들지요”
“내가 한마디 물을 테니 대답을 하면 내 몸을 선상으로 쓰되, 대답을 못하면 옥대(玉帶)를 끌러놓고 가시오”
소동파가 옥대를 책상에 풀어놓으면서 물어보라 하니 스님께서 물었다.
“내 몸[四大]은 본시 공(空)하고 5음(五陰)도 있는 것이 아닌데 그대는 어디에 앉겠다는 것이오?”
소동파가 대답을 못하자 스님은 서자를 불러 옥대를 산문의 가보로 길이 간직하게 하고 대신 중 바지 하나를 내주였다. 이에 소동파는 절구(絶句) 두 수를 읊었다.

병든 몸은 허리의 옥대를 감당키 어려웠고
둔한 근기는 날랜 기봉에 나가 떨어졌다네
마침 가비원(歌婢院)에 걸식할 판에¹
구름 덮인 산에서 승복과 바꿔 입었네

病骨難堪玉帶圍 鈍根仍落箭鋒機
會當乞食歌婢院 換得雲山舊衲衣

객사에 사람 들르듯
많은 사람 거쳐온 이 옥대가
흘러 흘러 나까지 온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로다
비단 도포를 잘못 떨어뜨려
딴 것과 혼동하여
거짓 미치광이 만회(萬回)에게
벌어다 주었네²

此帶閱人如傳舍 流傳到我赤悠哉
錦袍錯落揮相稱 乞與詳狂老萬回

삼장법사 현장(玄藏 : 622~684)스님은 27세에 서역으로 법을 구하러 갔다. 진주(奏州) 난주(蘭州) 경주( 州)를 거쳐 과주(瓜州)에 이르러 옥문관(玉門關)을 나서니 관문 밖에는 정탐꾼들이 살고 있었다. 점점 가다가 사막에 이르니 악귀와 온갖 짐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였으나 그때까지는 멀리 달아나지 않다가 반야심경을 외우자 그 소리에 모두 사라졌다.
갠지즈 강가에 왔을 때 도적떼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문은 단정하고 이름답게 생겼으니 신에게 제사 지내면 길하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휘두르려는데 스님이 말하였다.
“내 이미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안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음을 맞도록 조금만 기다려다오”
마침내 미륵록보살을 염하였다.
“원컨대 정토에 나서 묘한 법문을 듣고 신통 지혜를 성취하여 이 땅에 도로 하생하여 먼저 이 도적들부터 제도하고 그들에게 훌륭한 수행을 닦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는데, 그 발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천둥 번개가 치고 회오리바람에 나무가 부러지니 도적들이 깜짝 놀라 사죄하고 흩어졌다.


상국(相國) 배휴(裵休)는 하동(河東)사람인데, 신안 태수(新安太守)로 있을 때 희운(黃檗慶希運)스님을 만났다. 희운스님은 처음에 황벽산에서 대중을 버리고 대안정사(大安精舍)로 들어가 노역하는 무리들과 섞여 숨어 살았다.
공이 절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다가 소임자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의 진영(眞影)입니다.”
“진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
소임자가 대답을 못하자 다시 물었다.
“이곳에 선 닦는 사람은 없습니까?”
“요즘에 한 스님이 절에 들어와 노역을 하고 있는데 자못 선승송같은 데가 있습니다.”
공이 모셔오라 하여 스님이 이르자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게 마침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데 스님네들이 말씀을 아끼시니 대신 한말씀 해주십시오.”
스님이 물으십시오 하니, 공은 앞에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하였다. 스님이 ‘배휴 ! ” 하고 낭랑한 소리로 부르자 공이 “예 ! ” 하는데 “어디 있느냐?” 하였다. 공이 당장에 그 뜻을 깨닫고 마치 상투 속 구슬을 찾은듯 기뻐하며 말하였다.
“스님께선 진짜 선지식이십니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법을 보여주시면서 어째서 이런 데 숨어 계십니까?”
이때부터 제자의 예를 올리고 다시 황벽산에 머무시기를 청하였다.
공은 조사의 심법을 훤히 깨치고 교학까지도 두루 꿰었으니, 제방 선사들은 모두들 “배상국은 황벽스님 문하에서 헛 나온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진(晉)나라 유민(遺民)인 유씨(劉氏)는 이름이 정지(程之)여며 팽성(彭城) 사람이다. 한(漢)나라 초원왕(楚元王)의 후손으로 그의 조부는 진나라의 높은 벼슬아치였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숭상 환현(桓玄)과 태위 사안(謝安)이 조정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여산(盧山)의 혜원(慧遠)스님을 찾아뵈었다. 그 후 뇌차종(雷次宗)과 주속지(周續之)가 함께 와서 혜원스님과 살게 되었다. 혜원스님은 “여러분 모두는 아마도 정토에 노닐기 위해 여기에 왔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에게 결사문을 짓도록 명하여 이 일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 결사[白蓮社]의 인원은 백여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 훌륭한 사람이 18명이었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염불을 할 때면 언제나 자주색 금빛 몸을 한 아미타불이 그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부끄럽고 행복하여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저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고 저에게 옷을 덮어주십시요”
그러자 갑자기 부처님께서 나타나 이마를 어루만져주고 가사를 끌어다 그의 몸을 덮어주었다. 뒷날 그는 또 꿈에 자기 몸이 칠보로 된 큰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옷에는 백련화 청련화가 어우러져 피어 있었으며 물은 맑고 맑아서 끝간 데가 보이지 않았다. 못 가운데 한 사람이 있어서 못물을 가리키며 “8공덕수(八公德水)이니 마셔보아라”하기에 그가 물을 마셔보니 맛이 감미로왔다. 이윽고 꿈을 깨고 나서도 털구멍에서 신비한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그는 말했다. “이는 나에게 정토의 인연이 다가온 것이다. 누가 육화중(六和衆 : 스님들을 가리킴)을 위해 나를 증명해줄 수 있겠는가?”조금 있으니 대중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그는 불상 앞에서 향을 사루고 재배한 뒤 축원하였다.
“제가 석가모니불께서 남기신 가르침으로 아미타불이 계심을 알게 되었으니 이 향은 마땅히 먼저 석가모니부처님께 공양하옵고 다음에 아미타불께 공양하고 아울러 시방의 불보살님들께 공양하옵니다.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정토에 가서 나게 하여 주십시오”
축원을 마치고 이 부딪치는 소리를 세번 내더니 장궤 합장한 채 죽었다.

왕일휴(王日休)거사는 용서(龍舒) 사람인데 품행이 단정하여 젊어서 국학(國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득 “서방정토에 귀의함이 최고의 일이로다”하고 탄식하였다. 이때부터 베옷에 채소밥을 먹으며 매일 천배(千拜)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정토에 날 과업올 장엄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마음이 순일한데 더 고행을 할 것까지야 없지 않습니
까?”하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경에 말하기를 적은 복덕을 닦은 인연으로는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하였으니 한 마음으로 고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생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거사는 집에 있을 때에도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으며 앉아서는 반드시 좌선을 하고 누울 때는 의관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얼굴과 눈에서는 빛이 났으므로 보는 사람들은 그를 도인이라고 믿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두루 친지들과 작별하면서 그들에게 정토수행을 힘써 닦으라고 부탁하였다. 밤이 되자 소리를 가다듬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다가, “부처님께서 나를 맞으러 오신다”고 외치며 우뚝 선 채로 세상을 떠났다.

정상좌(靜上座 : 國淸師靜)는 처음에 현사(玄沙師備 : 825~905)스님을 뵙고 묘한 종지를 얻은 뒤 천태산에 살았다. 33년 동안 한번도 산을 내려오지 않고 3학을 폭넓게 공부하여 깨끗한 수행으로 고고하게 살았다. 한번은 선을 닦은 이가 물었다.
“좌선할 때면 생각[心念]이 갈래갈래 흩어집니다. 스님께서 지도 좀 해주십시오”
사정스님이 대답하였다.
“그대 생각이 흩어지는 그때 흩어져 달아나는 바로 그 생각으로 흩어져 가는 곳을 찾아 보아라. 찾아 보아도 가는 곳이 없다면 흩어지는 생각이 어디 있겠느냐? 찾는 그 마음을 돌이켜 찾는다면 찾는 그 마음이 또 어떻게 존재하겠느냐?”
“또한 생각하는 마음[能昭之智]도 본래 공(空)하며 생각할 대상[所緣之境]도 고요[寂]한 것이다. 그런데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음은 고요할 주체[能寂之人]가 없기 때문이며, 생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음은 생각할 대상[所照之境]이 없기 때문이다. 주관과 대상이 다 고요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니 이것이 마음 근원으로 돌아가는 긴요한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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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唐나라 삼국 裵休가 중의 바지를 입고 아가씨 방을 찾아가 걸식한 일이 있다.
2. 당의 측천무후(測天武后)가 비단도포와 옥대를 만회(萬回)스님에게 주었다는 고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