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종문십규론 (宗門十規論) 1989 년 6 월(88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7. 말만을 기억하며 그때그때 오묘한 작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병통
생각건대 반야를 배우는 사람에겐 누구나 스승의 법이 있다. 스승의 법을얻었다면 대용(大用)이 실현되어야 비로소 조금은 가깝다 하겠다.
오직 스승의 법문을 설명해 놓은 말만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빼어나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알음알이(見知)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경계가 스스오가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으로 줄이는 것이고, 경계가 스승을 넘어서야만 스승의 가르침을 펼칠만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육조(六祖)가 도명상좌(道明上座)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해준 말은 모두가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니, 비밀스러움은 그대쪽에 있다”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알겠다. 말이나 방, 할이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인데, 종횡으로 오묘한 작용을 어찌 남에서 깨닫기를 바라겠는가.
부정한다면 황금과 구슬도 그 빛을 잃고 긍정한다면 기와 부스러기도 빛을 더한다.
행하려면 행하여 이치와 현상을 동시에 닦고 작용할 때 가서 작용하여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은 진짜 장부의 일이지 아녀자의 일이 아니다. 말만 받아드리고 의미에 막혀 종푸에 대하여는 입만 나불거리면서 오묘하게 이해했다 여기는 것을 절대로 하지말라.
하물며 바편을 빌려서 깨치거나 헤아려서 알수 있는 것이 아닌 이런 경우에 있어서랴.
지혜는 드넓은 세계를 벗어났고 정신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에 계합하니 용상(龍象)의 발자욱을 나귀가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8. 경전에 통달하지 못하고서 마구 인용하여 증거를 대는 병통
생각건대 불법을 펼피려고 경전의 법문을 인용하는 경우에는 우선 부처님의 의도를 밝혀야 하고 다음으로 조사의 마음에 계합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펼쳐 성그지 촘촘한지를 비교해 알수 있다. 혹 이치를 알지 못하고서 가풍만을 지키느라 마구 인용하여 증거를 든다면 스스로 비난을 자초할 것이다.
그런데 수다라의 비장(秘藏)이 모두 자취를 가리키는 것이며, 원돈상승(圓頓上乘)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가령 백천 가지 삼매와 항하사만큼의 법문을 이해한다 해도 자신을 더욱 수고롭게 할 뿐, 그 일과는 상관이 없다. 하물며 나아가 방편(權敎)을 싸잡아 실리(實敎)로 귀결시키고 지말을 거두어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이겠는가.
진실하고 청정한 법계 속에는 한 티끌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더구나 한법도 버리지 않는 불사(佛事) 짓는 측면에 있어서랴.
사실대로 죄상을 판결하고 바탕에 입각하여 갈래를 푸는 정도를 면치 못한다면 우리 조사 문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경전에 능토한 사람과 옛것에 박식한 진실된 부류가 많다. 그들은 칼끝 같은 말재주를 과시하고 창에 쌓아와서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니 말로는 펴기 어렵다. 이제껏 기억해 왔던 말들이 모조리 남의 보배를 헤아린 격이니 이 문중에 다른 점이 있음을 비로소 믿어야만 교외별전(敎外別傳)인 것이다.
후학들은 스스로를 매몰시키지 말아야 하니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종풍을 욕되게 할 것이다. 익히고 닦을 필요가 없다 하여 조그마한 것을 얻고 만족해서는 안된다. 말도 Rjoeke지 못했는데 근본을 어떻게 밝히겠는가.
9. 운율도 맞추지 않고 이치에도 통달하지 못했으면서 계송 짓기를 좋아하는 병통
생각건대 종문에서 계송을 짓는 격식은 단조, 장조, 혹은 요즈음 가락, 옛가락 등 여러 가지다.
성색(聲色)을 빌려 작용을 나타내는데,혹은 현상을 토해서 본체를 설명하기도 하고 이치에 입각해서 진제(眞諦)를 논하기도 한며. 현상을 거슬러 세속을 바로잡기도 한다.
이렇게 취향에 차이가 있긴 하나 시작이야 다를 수 있겠는가. 모두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드러내고 부처님의 삼매를 찬탄한 석이다. 후학을 고무하고 선현(先賢)을 풍자하는 데에는 글을 통해서 뜻을 주장한다 하여 함부로 지어서야 되겠는가.
제방의 중창들과 참학하는 뛰어난 사람들을 잠깐 살펴보았더니, 계송 짓는 것을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글 짓는 것을 지말적인 일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감정나는 대로 지어서 영락없이 속된말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자신들은 “거친 것에 구애되지 않고 더러움을 가리지 않는다”하면서 세속을 벗어난 자들의 말이 으뜸가는 이치로 귀결된다고 표방하려 한다. 식자들은 이것을 보고 비웃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대로 믿고 퍼뜨려 명분과 이치가 점점 없어지고 불교문중이 더욱 박복해진다.
보지도 모했는가. 화엄경의 일만 수 계송과 조사의 일천편 계송이 모두 문체가 아름답고 지극히 정제되어 잡다하지 않음을. 어찌 실없는 농담이나 속된 글과 같았겠는가.
후세에 와서는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글을 짓는 것을 실답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옛것을 살펴보아야 이치에 맞을 것이다.
혹 천부적인 자질이 부족한 경우라도 소박함을 다행이라 여기면 되었지 꼭 뛰어난 자질에만 의지하고 훌륭한 사람만을 흠모할 필요가 있는가.
치졸함으 내보여 격식을 이것저것 잘못 짜맞추어 누를 끼치는가. 거짓에 혹하여 뒷날의 수치를 더해서는 안될 것이다.
10. 자기 단점은 변호하면서 승부 다투기를 좋아하는 병통
생각건대 천하에 종림이 번창하여 선방도 매우 많고 모여 사는 대중들도 오백명을 밑돌지 않는데 무례한 법이 한둘이야 없으랴. 그 사이에 혹은 도를 간직한 인재와 청정한 수행을 닦는 사람이 있어 잠시 대중의 사정을 보아 힘써 조사의 법석을 이으려한다. 그리하여 시방의 도반들을 모으고 한곳에 도량을 세워 아침에는 법문을 청하고 저녁에는 참구하면서 노고를 꺼려하지 않는다.
또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고자 초심자를 지도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명성을 날리고 물질을 탐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마치 종이 망치를 기다려 울리듯 병에 따라 치료하듯 하는 것이다.
법비(法雨)가 내리면 크고 작고를 가림 없이 적시고 법뢰(法雷)가 진동하면 멀고 가깝고 간에 모두 울리나 시들고 무성하고자 스스로 달라지니 움찔하면 틀린다. 그러나 본래 이것저것 고르는 마음으로 선택 가능한 법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풍모만 바라보고 법을 받아 주지의 지위를 훔친 경우가 있다. 그들은 스스로 세간을 초월하는 최상승법을 얻었다 여기면서, 자기 단점을 변호하고 남의 장점은 헐뜯는다. 그리하여 시장에서 속이고 푸줏간에서 험담하면서 큰소리치며 세력을 뽐내고 말재주를 믿고 자랑한다.
또한 시끄럽게 일 벌이는 것을 자비로 여기고 주제넘는 것을 덕행으로 착각하여 부처님의 계율을 어기고 사문으로서의 몸가짐을 버린다. 그러면서 도리어 이승(二乘)을 능명하고 삼학(三學)을 배척하는 전도(顚倒)를 저지른다. 더구나 큰 법도로 점검하지 않고 그런 사람을 도인이라 인정하는 경우에 있어서랴.
상법, 말법 시대를 만나 마군은 강하고 법은 약한데 여래의 법복을 빌려 입고 국왕의 은혜와 위엄을 훔치는 이가 있다. 입으로는 수행하여 해탈할 것을 말하나 마음으로는 망상을 희롱하니 원래 부끄러운 줄 모르는데 어찌 죄와 허물을 피하겠는가. 지금 이러한 무리들을 차례로 적어 후학을 겨책해야 할 것이다.
반야를 만난 인연도 작은 일이 아니다. 스승과 제자를 선택하는 도는 더욱 어려우니 스스로 깨달음을 잘 간수할 수 있어야 끝내 큰 그릇을 이룰 것이다.
따끔한 충고를 강요했으니 나도 비방을 달게 받겠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여, 서로 돕고 고무해 주기를 바란다.


*바로잡음
4월호 5p에 나오는 분양선소는 소양운문(詔陽雲門)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