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1986 년 2 월(48 호) 불교의 근본사상
흔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2연기(十二緣起)룰 시간적 개념으로 보아 생사윤회(生死輪뼈)의 한 과정으로 해석하는데 이와 같은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 된 것이라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緣起)란 곧 중도(中道)의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연기를 생사윤회의 모든 과정으로서 삼세양중인과(三世兩中因果)로 보는 시간적 개념의 해석에 치우치다 보니 연기가 즉 중도라는 올바른 해석을 한 사람이 별로 없었읍니다.
부처님께서는 남전장경(南殿藏經)에도 북전장경여(傳藏經)에도 부처님이 중도의 설명 뒤에 항상 증명중도〔證明中道)로서 연기를 인용하셨는데, 중도와 연기의 연결 부분의 이해에 있어서 많은 학자 돌이 적잖은 어려움을 겪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연기를 순간(巡官)에서 보면 생(生)을 바로 본다는 말이니 생을 바로 본다는 것은 없다는 견해가 없다는 말이며 역관(遊觀)에서 보면 연별(緣滅)한다는 것은 멸(滅)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었다는 견해가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으며 유념(有非無) 또한 있고 또한 없다(有亦無)는 것이니 이것이 곧 중도를 표현한 것이 됩니다. 중도(中道)의 한차4상조의 근본원리를 연기에서 표명한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연기를 삼세양중 인과설과 같이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연기를 근본적으로 잘못 본 견해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가전연이 부처님께 여쭙기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바른 견해입니까?』
부처님께서 가전연에게 말씀하시길
『세간에는 두 가지 의지가 있으니 었다함과 없다함이라. 취(取) 때문에 촉(觸)한 바니라. 취에 촉한 바 때문에 혹은 있다(有)함에 의지하고 휴는 없다無)함에 의지하나니라. 만일 이 취가 없는 사람은 마음이 경계에 매이더라도 취하지 아니하고 머물지(住) 아니하고 헤아리지(計) 아니하여 나의 고(苦)가 생(生)할 때는 생하고 고가 멸(滅)할 때는 멸하여 거기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미혹하지 아니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나니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세간의 집 (集)을 사실과 같이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며 세간의 멸을 사실과 같이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었다는 것은 없나니라. 이것이 두 극단을 떠나서 중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나니 이른바 「이것이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얼어나므로 저것이 얼어난다」는 것이다. 즉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내지 순대고취 純苦聚)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내지 순대고취가 멸하느니라』

부처님이 이 경을 말씀해 마치시니 존자 가전연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커지 아니하고 마음에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旅延이 白佛言호대 世尊이시여 될何正見이낫고 佛告迎施延하사대 世間에 有二種依하니 若有若無라 (생見) 寫取所觸이니라(파見困有) 取所觸故로(分別取훌罵因) 或依有하며 或依無(파見옳生)하나니라 苦無此取者(分別消滅)는 心境驚홉에 使不取不住不計(파見不生)하야 我苦生而生하고 我苦械而威(正見亦生亦滅)하야 於彼에 不疑不惠하고 不由於他而自知하나니 是名正見이니라 所以者何오 世間集을 如훗正知見(正觀亦生) 하면若世間無者不有(非有)하며 世間滅을 如몇正知見(正觀亦滅)하면 若世間有者無有(非有)하나니 是名離於二파하야 說於中道(非有非無亦生亦滅)이니라 所謂此有故彼有하며 此起故彼起하나니 謂緣無明行하야 乃至統大苦聚集(亦生非無)하며 無明이 滅故로 行滅하야 乃至純大苦聚滅(亦滅非有)하나니라 佛說此經딘하시니 尊者i뼈뼈延이 I짧佛所說하고 不起諸痛하야 心得解脫하니 成阿羅葉이니라. 〔雜阿含 十二卷 (3Ol) : 新修大藏經 2卷P.85C〕

세상에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많지만 철학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우리에게 영원성이었다거나 영원성이 없다거나 하는 두 가지 견해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고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양 극단의 편견입니다.
「취 때문에 촉한 바 된다〔取所觸)」는「것은모든경계를 취해서 다음이 사랑 분별을 낸다는 것입니다 취란 취사심(取擔心), 분별심(分別心)이며 낼이란 접촉(接觸)한다, 계교(計較)한다는 뜻이니 모든 사람 분별 심으로 개교하는 것이 편견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편견을 내어서 었다는 것에 의지하거바 없다는 것에 의지하거나 하여 었다는 견해도 내고빼다는 견해도 낸다는 것입니다.
「취가 없는 사람」이란 분별 취착심이 없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은 분별 심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은 모든 사물을 대할 때에 어떤 사물을 대하든 취하지도 아니하고 머물지도 아니하게 되는 것이니, 사량계교를 내지 아니하니 편견이 나지 아니한다
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나에게 분별 심이라는 주관이 댔기 때문에 모든 객관에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여 집확심을 갖게되는데 만약 나에게 분별 심이라는 주관이 완전히 떨어져 버리면 무심(無心)이 되어 거기에서는|모든 경계에 취할 것도 없고 머무를 것도 없어서 사람에 꾀를 내어 분별할 수 없으니 번견이 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고가 생활 때는 생하고 고가 멸할 때는 멸한다」합은 또한 생하고 또한 멸함(亦生亦滅)을 바로 본다는 것이니 이것은 곧 머물지 아니하는 다음(無住心)이며, 진공(質空)이며, 「마땅히 머무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이 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생 말씀과 같습니다.
「거기에서 의심하지 아니하고 미혹하지(아니하며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아나나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한다」함은 그 마음이 나는 묘함 있음(妙有)에서 생멸(生藏)을 바로 보면 의심하거나 미혹하지 아니하고 명백히 스스로 알게 되어서, 모든 분별심을 떠나서 불생불멸(不生不藏)의 입장에서 생명을 바로 보는 것이니 쌍차하되 쌍조한 바른 견해(正見)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세간의 집(集)을 사실과 같이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없다는 것은 있지 아니하니」 세상의 생(生) 즉 집제(集諸)를 바로 보면 없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는 것(非無)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간의 멸을 사설과 같이 바로 알고 보면 세간에 있다는 것은 없으니」 세상의 멸제(滅諸)를 바로 보면 있다는 견해는 있을 수 없는 것(非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집(集)과 멸(滅)을 바로 보면 〈또한생함과 또한 멸함(亦生亦澈)이면서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옴(不生不滅)〉이며, 〈또한 있음과 또한 없음꺼;有亦無)〉이면서 〈었음도 없고 없음도 없음(非有非無)〉이니 이것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서 쌍차쌍조(겠避있照)의 중도를 표명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저 것이 일어난다」함을 많은 학자들은 연기의 원형이라고 말하며 그 뭇은 ‘서로서로 의지한다’는 뭇으로 해석하는데 부처님께서 12연기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이 구절을 전제하고 12연기를 말씀하셨읍니다. 그러나 여기
서 보는 바와같이 연기란 서로서로 의지하여 생기(生起)한다는 시간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었읍니다.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순대고취가 모이며,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순대고취가 멸하느니라」 함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순관(順觀)으로 집제(集諸)를 바로 보면 생(生)을 바로 보는 동시에 없다는 견해(無見)가 있을 수 없으니 〈또한 생이며 없는것이 아님빼生非無)〉입니다. 또 역관뼈觀)으로 멸제(澈諸)를 바로 보면 멸(滅)을 바로 보는 동시에 었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으니 〈또한 멸이며 있는 것이 아님야滅非有)〉이니 이것이 중도라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