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인천보감(人天寶鑑) 1990 년 4 월(98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광효사(光孝寺) 지안(志安)선사는 영가(永嘉) 사람으로 성은 옹씨(翁氏)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진중하여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아버지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여 출가시켰다.
천태산 운봉(雲峰)에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하루 한끼 먹으며 좋은 옷을 입지 않고 누더기 하나로 여름과 겨울을 났다. 한번은 천태덕소(天台德韶)국사를 찾아가니 국사가 물었다.
“3계에는 아무 법도 없는데 어디서 마음을 찾을 것이며, 4대(四大)는 본래 공한데 부처는 무엇에 의지해 머물겠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에서 나를 보는가.”
선사가 대답하기를 “오늘은 스님께 낭패를 당했습니다.”하였다. 국사가 다시 “이게 무엇이냐?” 하자 선사가 향대(香臺)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나가버리니 국사가 쓸만한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선사가 하루는 「화염경」을 읽다가 “몸도 몸이라할 것이 없고 수행도 수행이라 할 것이 없으며 법도 법이라 할 것이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는 공적(空寂)할 뿐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활짝 깨쳤다. 선정에 들어 십여일이 지난 뒤 비로소 정에서 깨어나니 심신이 상쾌하면서 문득 현묘하고 비밀스런 것이 생겨났다.
선사는 이통현(李通玄)의 화엄경에 대한 석론(釋論)이 규모가 넓고 뜻이 깊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경에 합쳐 120권으로 만드니 세상에 널리 퍼졌다.
충의왕(忠懿王 : 吳越王)이 선사의 도풍을 흠모하여 월주(越州) 청태사(淸泰寺)에 주지케 하였는데 선사는 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직 방장실에 앉아 깊은 선정에 든듯 하였다. 하루는 선정에 들어 두 스님이 법당 난간에 기대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천신(天神)이 둘러싸고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조금 뒤에 갑자기 악귀가 나타나 침뱉고 욕을 하며 천신의 자취를 쓸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난간에 기대섰던 스님들에게 까닭을 물어보니 처음에는 불법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는 세간 이야기를 했다고 하였다. 이에 선사는 말하기를 “한가한 이야기도 이러한데 하물며 불법을 주관하는 사람이 북을 울리고 법당에 올라가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랴.”하고는 이때부터 종신토록 한번도 세상일을 말한 적이 없었다.
선사가 죽어서 화장을 했는데 혀는 타지 않고 붉은 연꽃 잎같이 부드러웠다.
명교 설숭(明敎契嵩 : 1007∼1072)선사는 등주(藤州)사람이다. 출가한 뒤 늘 관음상(觀音像)을 머리에 이고 하루에 십만번씩 명호를 불렀는데 그러는 동안 세간의 경서는 배우지 않고도 능통하게 되었다.
동산 효총(洞山曉聰)선사에게서 법을 얻고 경력(慶曆 : 1041∼1048)년간에 전당(錢塘) 요호산(樂湖山)에 가서 머물렀다. 거처하는 한칸 방은 이렇다할 물건 하나 없이 깔끔하였고 종일토록 맑게 좌선하였으므로 청정하고 바르게 수행하지 않는 사람은 오지 못하였다.
스님의 도는 매우 깊어서 근기 낮은 학인들은 그 경계를 알 수 없었고, 한편 선사도 그들의 근기에 맞춰주느라 자기의 도풍을 낮추는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탄식하였다.
“어떻게 둥근 정에 모난 자루를 맞출 수 있겠는가. 성현의 행을 듣건대, 뜻을 세웠으면 그 도를 실천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에는 말하는 것으로 그쳤다. 말과 행동이 이로 말미암아 만세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의 학인들이 법도를 알고 밝은 도를 닦아서 삿된 것을 멀리하고 정도(正道)에 노닐게 하셨으니 굳이 눈앞에서 법을 전수해주고 내게서 나왔노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문을 닫고 책을 썼다. 책이 다 되자 서울로 가지고 가서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소(王素)를 통해 인종(仁宗)황제에게 올리고, 편지를 써서 먼저 바쳤더니 황제가 편지를 읽다가“신(百)은 도를 위해서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며 법을 위해서지 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선사의 지극한 마음에 탄복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명교대사(明敎大師)라는 호를 내려 표창하고 그 책을 대장경에 넣게 하였다. 책이 중서성(中書省)에 보내지자 당시 위국공(魏國公) 한기(韓琦)가 보고 이를 구양문충공(歐陽文忠公 : 修)에게 보여주었다.
구양수는 당시 한창 문장가로 자처하고 천하의 사표로 추앙받고 있었으며 또한 종묘를 수호한다 하여 불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글을 보고 위국공에게 말하기를 “스님네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다. 날이 밝으면 한번 만나보자.”하였다. 위국공이 구양수와 함께 선사를 찾아가 만났는데 구양수는 선사와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매우 기뻐하니 한승상(韓承相) 이하 모든 고관들이 선사를 초대하여 만나보고는 존경하여 이로부터 온 나라에 이름이 떨치게 되었다. 드디어 배를 사서 동쪽으로 내려가니 대각 회연(大覺懷璉)선사가 ‘백운부(白雲賦)’라는 시를 지어 가는 길에 주었다.

흰구름 인간세상에 내려와도
떠다니는 티끌색에 물들지 않고
태양은 아득히 불타고 있는데
만가지 자태는 기막힌 정취로다
아아, 살찌고 경망스런 사람들아
하늘에 드리운 날개를 보았는가
남으로 가려함에 기회를 만나야 하니
한번 날면 여섯달이 되어야 쉬리라.
천지에 아롱지는 기운을 어찌 알리요
무심히 내 가고픈 곳으로 가리라.
하늘은 어찌 한결같이 고요할까
말았다 폈다 함에 흔적이 없네.

白雲人間來 不染飛埃色
遙 太陽輝 萬態情可極
磋磋輕肥子 見擬垂天翼
圖南誠有機 去當六月息
寧知縕縕采 無心任吾適
天宇一何寥 舒卷非留跡


선사는 노년을 영안정사(永安程種舍)에서 보내다가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6근 중에 타지 않은 것이 셋이나 되었고 정골(頂骨)에서는 콩같이 생긴 맑고 투명한 홍백색 사리가 나왔다.
아아, 선사를 보고 주고 뺏는데 공평하지 못하고 말씀이 도에 부합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이와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종남산(終南山) 도선(道宣 : 596∼667)율사는 처음 제(齊) 나라에 태어나 승호(僧護)라 하였으며 월주(越州) 염현(剡懸)에서 미륵불상을 조각하며 살았다. 두번째는 양(梁)나라에 태어나 승우(僧祐)라 하였고 뒤에는 수(隋)나라서 태어나 도선(道善)이라 하였다. 율사의 할아버지는 호주(湖州)사람이며 아버지는 진(陳)나라 이부상서(吏部尙書)였는데 임금을 따라 장안으로 갔다가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는데 인도승이 나타나“당신이 잉태한 아기는 양나라 승우율사이니 출가시켜서 불교를 널리 펴도록 하시요” 하였다.
율사는 머리깍고 나서는 고행을 참고 마음을 다져 먹으며 불법만을 구했다. 한번은 보물함을 머리에 이고 탑을 돌면서 도를 닦았는데, 함 속에 사리가 내리게 해달라고 발원했더니 7일만에 과연 감응을 얻었다. 이때부터 더욱 뜻을 고르게 하여 하루 한끼 먹고 곧게 앉아 잠자지 않고 선정에 드는 것을 즐겼다.
정관 4(貞觀4 : 633)년 청궁사(淸宮寺)에서 반주삼매(般舟三味)를 닦는데 천룡이 내려와 시봉하는 감응을 얻었고 물이 모자란다 하여 흰 샘이 솟기도 하였다. 안거일에 성심으로 발원기도하기를 “만일 하안거에 좌선한 공덕이 있다면 상서로운 정조를 내리소서.”하였더니 뒷뜰에 과연 지초(芝草)가 났다.
율사가 과로로 병이 나자 천왕이 보심약(補心藥)을 내려주면서 말하였다.
“지금은 상법(像法)시대 말이라 나쁜 비구들이 절만 거창하게 짓고 선혜(禪慧)는 닦지 않으며 경전도 독송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천에 하나 둘 뿐이다.”
그 후 서명사(西明寺)에 있을 때 깊은 밤에 도를 닦다가 법당 앞 계단을 헛디뎠는데 어떤 성인이 발을 부축하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북천왕의 아들인데 칙명을 받고 모시게 되었다고 하였다.
“저의 수행에 태자를 번거롭게 할 것이었습니다. 태자는 위력이 자재하시니 천축국에 지을만한 불사가 있거든 그것이나 힘써 주시요”
“제게 길이 세치, 넓이 한치되는 부처님의 치아가 있는데 오랫동안 보물로 간직해왔습니다. 이제 이것을 스님께 은밀히 드릴 터이니 잘 간직하소서.”
율사는 받아서 낮에는 땅굴 속에 두었다가 밤에는 받들고 도를 닦았는데 암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제자 강율사(綱律師)가 가만히 율사의 뒤를 따랐다가 보고는 세상에 알리려 하자 율사가 말하기를 “신근이 천박한 이는 나를 요망하다 할 것이니 너와 나 단둘이만 알도록 하자.” 하였다.
율사는 천신과 자주 왕래하였는데 신령스런 자취나 성스러운 일에 대해 듣기를 즐겼다. 그리고 묻고 답하는대로 기록하여 그것으로 「감통전기(感通傳記)」라는 책을 만들었다.
건봉 2년(乾封3 : 667) 봄 2월에 천신이 나타나 고하였다. “율사는 과보가 이제 다하려 하니 아마 미륵궁에 날 것입니다.” 그리고는 향 한봉지를 남겨두면서 “이것은 천상극림향(天上棘林香)인데 제석천왕이 사루는 향입니다.”라고 하였다.
그해 시월 초사훌, 하늘에서 하늘 음악이 울리며 꽃과 향기가 가득히 내려 율사를 청해 맞이하니 서거하셨다.

여산(盧山) 혜원(慧遠)법사는 가씨(賈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도안(道安)법사에게 법을 배우다가 「반야경」강설하는 것을 듣고 깨달은바가 있었다.
법사는 대윤(大尹)인 장비(張秘)와 친한데 하루는 그에게 말하였다.
“역경계는 깨기 쉬워도 순경계는 깨기 어렵다.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은 오직 ‘참을 인자(忍)’ 한 자면 잠시도 안되어 지나가지만 만약 내 마음에 맞는 일을 만나면 마치 자석이 쇠를 만난 듯 부지불식간에 하나로 합쳐진다. 무정물도 그러한데 경계에 빼져 있는 사람이야 말할것도 없는 일이다.”
그후 여산을 돌아다니다가 그곳 산수가 아름다워 마침내 그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자가(刺史) 환이(桓伊)가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로부터 거의 30년간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고 오직 정토를 생각하여 부지런히 염불만 하였다.
처음 십여년 동안은 마음을 맑혀 집중해서 관(觀)을 닦아 아미타불 성상(聖像)을 세번이다 보았으나 법사는 무거운 성격이라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후 20년 만에 반야대(般若臺)에서 선정에 들었는데 아미타불의 몸이 허공에 가득찬 것을 보았고, 또 아미타불이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내가 본원력(本願力)으로 여기에 와서 그대를 편안케 하노니 그대는 7일 뒤에 나의 나리에 날 것이다.”라고 하셨다.
법사는 비로소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곳에 살면서부터 다행히 세번이나 성상을 보았는데 지금 또다시 나타나셨으니 나는 반드시 왕생할 것이다. 그대들도 각자가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