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1986 년 5 월(51 호) 불교의 근본사상
중도(中道)를 바로 깨치자

두극단을 여의는 동시에 두 극단을 바로 보는 이것이 중도라고 지금까지 지루하도록 거듭거듭 설명했는데,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순 교리로서 선종陣宗)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처음 이 법문을 시작할 때 부처님의 개구제일성(開口第一聲)이 중도선언이고 육조스님 임종 때의 최후 유촉이 중도유촉이라고 한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선(輝)이나 교(敎)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중도로 일관되어 있는 만큼 중도를 바로 알고 중도를 바로 깨치면 이 사람이 부처며 조사입니다.
역대의 조사와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이 중도를 깨쳐서 조사가 되고 부처가 되었지 그 이외의 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부처님이나 조사도 법을 말씀함에 있어서 중도를 벗어나서 법을 말씀한 일이 없읍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육조스님의 최후 유촉 법문이 중도법문이라 했는데 또 육조스님의 최초 법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이 행자(行者)의 신분으로서 노행자라고 불리며 오조 홍인대사에게서 법을 받아서 한밤중에 달아났습니다. 시기 질투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그기 있어면 무슨 해를 입을지 모르므로 비밀히 달마대사의 의발을 받아서 한밤에 도망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도명(道明)이라는 비구가 육조스님을 잡으려 나섰습니다. 따라가다가 마침내 대유령이라는 곳에서 육조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육조스님이 도명비구의 우락부락함을 보고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을려놓고 몸을 숨겼습니다. 마침내 도명비구가 이르러 바위 위에 을려놓인 가사와 발우를 가져가려고 드니 꿈쩍도 하지 아니하여 도저히 가사와 발우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도명
비구는 크게 놀라고 또 그 가사와 발우에 더 손을 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고 또 겁이 나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노행자, 노행자여 내가 뒤따라 온 것은 이 가사와 발우를 빼앗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법을 배우려고 왔으니 얼른 나와 주십시오.」
하고 간청을 했읍니다.이에 육조스님이
「네가 이미 법을 위하여 왔을진대 이제 모든 반연을다 쉬고 한 생각도 내지 마라 너를 위하여 말하리라」
하고 숨은 곳에서 나와서 한참 있다가 도명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말라 바로 이러한 때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냐?」
하니, 도명이 그 말끝에 크게 깨쳤다고 합니다.‘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말라함은 착함과 악함 즉 양 극단을 완전히 여의는 것을 말하니 이것은 중도정셜(中道正說)입니다.
착함도 버리고 악함도 버려라. 즉 양 극단을다 버려라, 그러면 자기의 본래면목을 알 수 있고, 모든 부처님의 면목을 알 수 있고 모든 조사의 면목을 알수 있고, 모든 공안(公훌)을 다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話頭)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화두를 의심하여도 결국 깨치고 보면 양 극단을 여윈 중도를 바로 째친 것이지 중도를 바로 깨치기 전에는 화두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조스님 첫 법문에 「착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악한 것도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때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이냐」고 한 말씀은 표현한 말씀은 다르지만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에서 「고락을 여의고 나는 중도를 정동각했느니라」고 한 말씀과 그 내용은 같은 것
입니다. 내가 중도 ! 중도 ! 하니 참선하고는 다른 무슨 마셜(훌說)을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선객들이 있을지모르나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 근본 사상과 조사스님들의 깨친 바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하나 더 들면 덕산(德山)스님이 깨치시고 법을 말씀하실 때는 몽둥이 하나만 들고 사람을 보기만 하면 때리는데 무조건 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몽둥이를 들고 말씀하시기를
「말하여도 합십방(三十棒)을 때리고 말하지 못하여도 삼십방을 때리리니 말해보라」
하시며 때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도 육조스님 첫 법문과 같은 수법입니다.임채스님이 할(喝)을 하고 덕산스님이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무슨 불법(佛法) 밖의 일이 아닙니다. 그 표현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럽 그렇게 물을 때마다 중도라 답하면 안 되겠나, 쌍조라 답하면 안 되겠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답하면 뼈도 못 찾습니다. 그런 대답은 거기에서는 그 스님들에게는안통합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든지 임제스님이든지 덕산스님이든지 누구든지 모두 중도를 여의고 법을 말씀한 일이 없읍니다.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도 전체가 중도에 입각해었다는 것을 알고 이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이 법문은 참선하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강원에서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조사스님들의 근본 사상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있음(有)과 없음(無)을 바로 보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될 수 없읍니다. 이것은진여정견(륨如正見)이지 식심망견(識心훌見)이 아닙니다.
식심망견을 완전히 지양(止規)하여서 양 극단을 완전히 여의면 있음과 없음이 완전히 융합해서 융통자재윈 것이라고, 양 극단을 부정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그것이 실제에 있어서 근본 도리냐 하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기 머물러 있으면 낙공망외도隨空활+道)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돌아서서 보면 산은 그대로 산이요 물은 그대로 물이어서 산과 산, 물과 물이하고 무애자재한 경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언제든지 긍정이라는 것은 부정이 근본이 되어있는 것이어서 부정을 떠나서 긍정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생멸적인 긍정이지 정견의 긍정은 아니므로 편견에 떨어지고 맙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선가(輝家)애서는 어떻게 그런 경지를 표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 참선 공부를 하다 보며는 모든 생각을 좀 쉬어버리게 됩니다. 쉬어 버리게 되면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닙니다. 그것을 양극단을 여 각각 완연해서 다 그대로이게 되니 양 극단을 부정하여 다시 양 극단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쌍치쩡조롤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너무 해얼적으로 해서 안되었지만 중도를 선가(輝家)에서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산이 다하고 물이 다하여 길이 없을까 의심하였더니버들은 푸르고 꽃이 예쁘니 또 마을이 있구나」
山盡水驚疑無路터니柳暗花明X一村이로다. 저 산이 끝나고 물이 끝난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산과 물을 다 잊어버리게 되니 산을 찾을래야 찾을 수없고 물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으니 그러면 죽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거기에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데 큰 마을이었다는 것이니 이것이 화장세계(華藏世界)이며 무애세계(無짧世界)이며 본지풍광(本地風光)입니다.
이렇게 산이 다하고 물이 끝난 곳에서 버들은 푸르고 꽃은 예쁜 본지풍광을 답착(路著)하여야만 비로소 중도의 뜻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얘기만 했지 아무런 이익이 없읍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으로 한폼으로만 생각할 때는 중도만 생각할 것이지 화두니 뭐니 하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지 앓느냐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기가 화살같이 빠른 것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어서 중생들에게 병따라 약을 주듯이 근기에 따라 껄법을 하는 것이지 원래 참 대법(大法)은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깨치고 보면 지금까지 한 내 법문이 전부 거짓말 입니다. 대중들은 내 법문이 거짓말인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중도의 진리는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를 바로 깨쳐야 실제 물건을 볼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림 위의 떡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있음(有)과 없음(有)을 바로 보는 것이 중도(中道)’라고 법문해 왔는데 그럼 이제 대중들에게 한번 묻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법문한 것은 다 그만두고 있다고 하지도 말고 없다고 하지도 말고 한마디 말해보라! ”
(대중 가운데 말이 없으니 억 ! 활을 하시고)
“흰 뼈가 산을 이어 있구나 ! ”
던骨이 連山이로다고 스스로 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