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원수 갚는 방법 (1) 1982 년 10 월(8 호) 가야산의 메아리
“저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겨라.” (觀波怨家 如己父母)
이것은 원각경 (圓覺經)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성불 못하고 대도(大道)를 성취 못하는 것은 마음 속에 수많은 번뇌, 팔만 사천가지 번뇌망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대도를 성취 못하고 성불 못합니다.
그러면, 팔만 사천가지 번뇌 가운데 무엇이 가장 근본되는 것이냐? 그것은 증애심(憎愛心),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가(禪家)의 3조 승찬대사는 그가 지은 신심명 (信心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증애심만 완전히 떨어지면 대도(大道)가 명백하다.(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증애심이 실제 완전히 떨어지려면 확철히 대오(大悟)해서 대무심경계를 성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심삼매에 들어가기 전에는 경계에 따라서 계속 증애심이 발동하므로 이 병이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불자들은 대도를 목표로 하느니만큼 부처님 말씀을 표준 삼아서 이것이 생활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가장 큰 원수 그런 사람을 부모와 같이 섬겨라 하면 너무나 무리한 요구 같습니다.
실제로 “나쁜 사람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은 또 모르겠지만, 원수를 부모같이 섬기라고 하니, 이것은 참으로 부처님이나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감히 이런 말조차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보면 불교에서는 용서(容恕)라는 말 자체가 없습니다. 용서라는 말이 없다면 잘못하는 사람과 같이 싸우라는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나는 잘했고 너는 잘못했다. 잘한 내가 잘못한 너를 용서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상대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서 하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에 대한 큰 모욕입니다.
불교에서는 “일체중생의 불성은 꼭 같다”(一切衆生 皆有佛性)고 주장합니다. 성불해서 저 연화대위에 앉아 계시는 부처님이나, 죄를 많이 지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있는 지옥중생이나, 자성자리, 실상(實相)은 꼭 같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랑이라도, 곁을 보고 미워하거나 비방하거나 한층 더 나아가서 세속 말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부처님같이 존경하라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악한 사람이든지 선한 사람이든지 가장 죄 많이 지어서 무간지옥에 떨어져 있는 지옥중생도, 부처님같이 부모같이 존경하라 이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생명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을 실례로 들어도 그렇습니다. 부처님 일생을 통해서 따라 다니면서 애를 먹이고 해치려고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괴롭힌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제바닷타(調達)입니다.
보통으로 보면 제바닷타가 무간지옥에 떨어졌느니 산채로 지옥에 떨어졌느니(生陷隔地獄)하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방편입니다. 중생을 경계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찌했던 그러한 제바닷타가 부처님에게 있어선 불공대천의 원수인데, 그러면 부처님은 제바닷타에게 어떻게 원수를 갚았느냐?
성불(成佛), 성불로써 갚았습니다. 죄와 복이 온 시방법계를 비춤을 깊이 통달했다.
(深達罪福相 偏照於十方)
착한 일 한 것이 시방세계를 비춘다고 하면 혹 이해할른지 모르겠습니다만, 악한 짓을 한 무간지옥의 중생이 큰 광명을. 놓아서 온 시방법계를 비춘다고 하면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가장 선한 것을 부처라 하고 가장 악한 것을 마귀라하여 이 둘은 하늘과 땅 사이(天地懸隔) 아닙니까 마는 사실 알고 보면 마귀와 부처는 몸은 하나인데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자성(自性)에는 조금도 손실이 없고 아무리 성불했다고 해도 그 사람의 자성에는 조금도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와 부처가 한 몸뚱이면서 이름이 다를 뿐(同體異名)입니다. 비유하자면 곁에 입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떨어진 옷 때묻은 옷 좋은 옷 등 온갖 옷을 다 입는데 좋은 옷을 입었으면 “아 당신은 참으로 거룩하다”고 하고 또 그 사람이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으면 “에이 이자식 거지 같다”고 하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어도 그 사람이 더 나은 것도 없고 아무리 안 좋은 옷을 입었어도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제바닷타가 아무리 나쁘다고 하지만 그 근본자성 본 모습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나중에 제바닷타가 성불해서 크게 불사(佛事)를 하고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했습니다. 법화경(法華經)에 수기(授記)하지 않았습니까. 제바닷타가 성불한다고.
이것이 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나한테 조금 잘한다고 해서 “허허” 하고 조금 잘 못한다고 해서 “저놈의 자식” 하고 주먹으로 안되면 칼을 들고 달려 드는데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수를 보되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 행동 공부하는 근본지침이 되어야겠습니다.
우리 불교에 들어오는 첫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모든 중생을 부처님과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같이 섬겨라” 바로 이것이 근본 조건인데, 우리 불교를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소나 돼지같은 짐승까지도, 근본자성은 성불을 하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부처님과 같이 존경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불교 믿는 사람은 상대방이 떨어진 옷을 입었는지 좋은 옷을 입었는지 그것은 보지 말고 사람만 보자 이것입니다. 사람은 꼭같지 않느냐 말입니다.
옛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라에 큰 잔치가 있어서 천국의 큰스님네들을 모두 초청했습니다. 그 때 어떤 스님 한 분이 생활을 검박하게 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그 잔치에 초청되었습니다. 본시 생활 그대로 낡은 옷에 떨어진 신을 신고 대궐문을 지나 들어가려 할 때 문지기가 못 들어가게 쫓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좋은 옷을 빌려 입고 다시 갔더니, 문지기가 굽신굽신 하면서 얼른 저 윗자리로 모신다 말입니다. 다른 스님네들은 잘 차려진 음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이 스님은 음식을 자꾸 옷에다 들이 붓고 있습니다.
-스님 왜 이러시오. 왜 음식을 자꾸 옷에다 붓습니까?
-아니야, 이것은 날보고 주는게 아니야 옷보고 주는 것이지. 그리고는 전부 옷에다 붓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비유입니까 ! 허름한 옷 입고 올 때는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더니 좋은 옷 입고 오니 이렇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겉만 보고 사는 사람은 다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원근본은 지옥중생이나 미물 곤충이나 악한 맹수나 젊잖은 사람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근본자성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만큼 불성(佛性)만 보고 서로 존경하며 살지,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천대하거나 멸시하면 안된다 그 말입니다.
혹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법문하시면서 큰 짐을 지워 주시네 그건 부처님이나 하실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주먹이 날아오고 칼이 나오는데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항의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간 실례를 몇 가지 이야기 하겠습니다. 〈계속〉

* 위 법어는 1982. 6. 20(음 5. 29) 하안거(夏安居) 반결제법어를 정리한 것으로 3회에 나누어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