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중도(中道)의 원리 1983 년 4 월(14 호) 가야산의 메아리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則是空 空卽是色)
위 게송은 누구냐 잘 알고 있는 반야심경의 한 구절입니다 ,

색(色)이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바위가 허공하고 서로 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저 자연계의 현상을 보더라도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합니다. 그래서 그냥 입으로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처님 말씀이 저 깊이 들어갈 것 같으면 조금도 거짓말이 없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요즘 흔히 ‘4차원 세계가 어떻고’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4차원 세계라는 것도 상대성 이론에서 전개된 것으로 이것을 수학적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H.Minkopski)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 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이렇게 하여 3차원에서의 시간 공간의 대립은 소멸되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화엄경에 보면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말이 있읍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兩邊)을 떠나서 양변이 서로서로 거리낌 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해 버리는 세계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4차원의 세계. 즉 시공(時空) 융합의 세계로서 만코프스키의 수학공식이 어느정도 그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든지 ‘불생불멸’등의 이론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후 처음에 녹야원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씀을 맨 처음 하셨는가 하면 “내가 중도를 바로 깨쳤다”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중도’ 이것이 불교의 근본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모순이 융합되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된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합니다.
보통 보면 선(善)과 악(惡)이 서로 대립되어 있는데 불교의 중도법에 의하면 선악을 떠납니다. 그러면 선악을 떠나면 무엇이 되는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이 악으로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모든 것이 서로 통합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아까 말한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생과 멸을 떠난 불생불멸에서는 어떻게 통하는가?
고전물리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를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서로 대립되어 있습니다. 서로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현대물리학에서는 에너지가 즉 질량이고 질량이 즉 에너지로 에너지와 질량이 완전히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중도원리 입니다. 그래서 중도 법문이라는 것은 일체만물, 일체만법이 서로서로 융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전부 융화해 버리는 것 즉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던 질량과 에너지가 융화되어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하는데 그것은 불교는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할 때 에너지는 멸하고 질량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이 즉 멸인 것입니다. 질량이 생겼다(生)는 것은 에너지가 멸했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멸했다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멸이 완전히 서로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종합해 본다면 불교의 근본은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다. 그런데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관념론인가? 관념론은 커녕 실증적으로 객관적으로 완전히 입증되는 것이다. 즉 아인쉬타인(A. Einstein)의 상대성 이론에서 ‘등가원리’가 그것을 분명히 입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참으로 과학적이라고 하면 이 보다 더 과학적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인데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대답 중에서도 철학적으로 볼 것 같으면 유무(有無)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있다” “없다” 하는 것. 중도라고 하는 것은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닙니다(非有非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떠나버렸단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유와 무가 살아난다는 식입니다. (亦有亦無) 그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3차원의 상대적인 유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 가서 서로 통하는 유무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무가 서로 합해 버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유무가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 이름한다”(有無合故 名爲中道)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불생불멸이라는 그 원리에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 서로 생멸이 없고 모든 것이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色郞是空 空郞是色). 그런데 이것이 워낙 어려운 것 같아서 사람들이 다 이것을 저 멀리 보았던 것입니다. 저 하늘의 구름 같이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원자물리학에서 실지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불생불멸(不生不澈)의 원리가 실험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저 하늘에 떠 다니는 구름이 아니고 우리가 언제든지 손에 잡을 수 있고 만져 볼 수 있는 그런 원리다 이 말입니다. 이런 좋은 법(法)이지만 사실 보면 아는 사람도 드물고 알아 볼려고 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 현실입니다.
헤겔(F. Hegel)의 변증법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말하지만 불교에서는 모순의 대립이 직접 상통합니다. 즉 모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 없는 것이 즉 있는 것 시(是)가 즉 비(非) 비가 즉 시가 되어 모든 시비, 모든 투쟁 모든 상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모순과 대립을 떠날 것 같으면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이고 천당이고 절대세계(絶對世界)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말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세간(世間)이라는 것은 전부가 자꾸 났다가 없어지고 났다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지만 그 실상(室相) 즉 참모습은 상주불멸,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의 원리는 어디서 꾸어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이대로가 본래로 불생불멸입니다.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치고 이대로만 알아서 나갈 것 같으면 천당도 필요 없고 극락도 필요 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사바세계 그대로가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의 세계를 딴데 가서 찾으려 하지 말고 자기 마음의 눈을 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눈만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비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고 참다운 절대의 세계를 놔두고 “염불하여 극락간다” “예수 믿어 천당간다” 그런 소리 할 필요가 있습니까? 바로 알고 보면 우리 앉은 자리 선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인데.
그러면 경계선은 어디 있느냐 하면 눈을 뜨면 불생불멸 절대의 세계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생멸의 세계 상대의 세계이어서 캄캄한 밤중이다 이 말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서로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완전히 뜨자 이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마음의 눈을 뜹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