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1985 년 12 월(46 호) 불교의 근본사상
7. 중도(中道)의 여러가지 표현

현수(賢首)대사가 화엄종을 크게 일으켜 오교장(五敎章)이란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화엄종의 개종선언서(開宗宣言書)와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정념(情念)을 버리니 정리(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정리(正理)를 따르니 정념(情念)이 스스로 없어진다. (反情에 理自現이요 據理에 情自亡이니라)
일체 차별 망견(妄見)을 버리니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가 스스로 나타나고, 중도의 근본원리인 바른 이치(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일체 차별 망견을 버린다함은 모든 일체 양면을 다버리는 쌍차(双遮)를 말하며 중도의 근본원리인 정리(正理)가 나타난다함은 모든 양변을 버려서 모든 양변이 융합하여 중도원리가 드러난다는 쌍조(双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리(正理)를 따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함은 모든 것을 융합하는 쌍조(双照)의 중도원리에서 보니 일체 차별 망견이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쌍차(双遮),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双照),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双照)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双遮)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묘한 표현입니다.
앞에서 말한 “정념을 버린다”함을 차(選), 막는다 버린다 이며 “정리를 따른다”함을 표(表), 들어난다, 융합한다고 하여 화엄종에서는 차(選)와 표(表)를 가지고 중도(中道)를 많이 표현합니다. 차(避)란 쌍차(双遮)를, 표(表)란 쌍조(双照)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쉽게 표현하자면 구름이 흩어졌다 하면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며 해가 드러났다 하면 구름이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망견을 다 버리고 나면 자연히 쌍조(双照)의 바른 이치가 드러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고 바른 이치가 드러나면 양변의 일체 망견을 버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쌍조(双遮双照)란 말이 본래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영락경(瓔珞經)에서 나오며 부처님께서 자세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천태종의 지자(智者)대사가 중도를 표현하는 용어로서 그대로 인용해 썼습니다. 그 뒤 화엄종의 현수(賢首)대사가 같은 중도원리를 표현함에 있어서 쌍차쌍조를 그대로 쓰려고 하니 지자대사를 추종하는 것 같아서 쌍차쌍조란 말 대신에 쌍민쌍존(双泯双存)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것은 또 어디서 연유되느냐 하면 쌍비쌍역(双非双亦)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경에서 불성을 얘기하시면서 중도를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 역유역무(亦有亦無)이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므로 중도(中道)라 하는 것입니다.
(佛性은 非有非無며 亦有亦無니 有無合故로 名爲中道니라)
비유비무는 서로 모순 상극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으로써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서로 고집해 있으므로 서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 통하지 않고 고집하는 변견의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니 쌍차가 되어서 비유비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쌍차가 되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합하는, 서로 통하는 역유역무의 쌍조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을 쌍비쌍역이라고 합니다. 양쪽을 다 버리고 양쪽이 다 살아나는 것이니 쌍비는 부정이고 쌍역은 긍정입니다.
부정을 하고, 철저하게 부정하면 영(零), 공(空)에 떨어져 버리지 않느냐고 의심들을 하거나 부정만 한다보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로 나가는 것이 아니냐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참으로 바로 알 것 같으면 대긍정(大肯定)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온 누리를 비추듯이 철저하게 부정해가면 대긍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를 쌍비쌍역이라 하며 그것이 중도원리입니다.
이렇게 중도원리를 쌍차쌍조, 쌍비쌍역, 쌍민쌍존으로 설명하여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이를 좀 쉬운 말로 표현하면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진공(眞空)이란 양변을 완전히 버린 쌍차(双遮), 쌍민(双泯), 쌍비(双非)입니다. 이 진공이란 공(空)과 유(有)가 상대적인 공이 아닌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공과 유를 다같이 버린다고 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면 낙공외도(落空外道), 즉 공에 떨어진 외도가 되고마니 그것도 변견입니다. 그러한 단멸공이 아닌 진공이 되면 상대적인 공과 유를 떠난 묘유(妙有)가 됩니다. 묘유(妙有)란, 상대적인 공과 유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 공은 공 유는 유로 대립하여 통하지 아니하지마는 그러한 상대적인 공과 유를 버리고나니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인 공과 유가 서로 통하여 「색즉시공 공즉시색」(色郞是空 空郞是色)의 묘유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쌍조(双照), 쌍존(双存), 쌍역(双亦)입니다.
대부정(大否定)하여 대긍정(大肯定)이 된다 하니 그 긍정을 차별적인 긍정으로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묘한 있음(妙有)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통하고 공과 있음이 서로 통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통하고 마군이와 부처가 서로 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공이 쌍차이며 묘한 있음이 쌍조이니, 진공묘유를 바로 알 것 같으면 공과 있음이 서로 융통하여 진공하면 묘유요 묘유하면 진공이며, 진공 내놓고 따로 묘유 없으며 묘유 내놓고 따로 진공 없으니 이것을 차조동시(遮照同時)라 합니다. 쌍차가 즉 쌍조요 쌍조가 즉 쌍차이며 쌍차하고 쌍조해서 차조동시가 되는 것이 중도의 근본 공식입니다. 이렇게 중도에 대한 표현은 달라도 내용은 꼭 같은 것입니다.


8. 임제 (臨濟)선사의 중도사상

오가철종(五家七宗)의 선종 종파 가운데서도 임제종을 제일로 하는데 그 개조(開組)인 임제스님은 중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승이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참다운 부처이며 참다운 법이며 참다운 도인지 대답해 주시기를 바람니다」
「부처란 마음이 청정함이요 법이란 마음이 광명함이요 도란 곳곳에서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다」
임제대사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이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이니다.
(如何是眞佛眞法眞道乞垂聞示하소서. 師元 佛者心淸淨是오 法者心光明是오 道者는 處處無 淨光是이로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 차별 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써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히면 거기에 무한한 광명이 비칠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쌍조입니다.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은 청정할 때 광명이 나타나고 광명이 나타날 때 청정하여 청정과 광명이 서로 둘이 아님을 말하니 차조동시(遮照同時)입니다.
도(道)란 승(僧)을 말하니 승이란 본래 화합(和合)을 뜻하니 서로서로 합심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을 말하지만 근본은 청정과 광명이 걸림없음을 증득한 사람만이 승이라는 자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중도를 깨치지 못하면 승이 아니니 모든 차별•변견에 집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선종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육조스님의 유촉하신 바대로 중도에 입각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겠습니다.
임제스님이 설하신 근본적인 가풍(家風)으로 취급되는 사료간(四料揀)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은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고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有時엔 賽A不賽境이오 有時엔 葉境不幕A이오 有時엔 有時엔 A境傷풀이오 有時엔 A境없不훌이니라)
위에서 표현을 달리하면 사람은 주관으로, 경계는 객관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주관을 버리고 객관은 버리지 않고, 어떤 때는 객관은 버리고 주관은 버리지 않는다, 어찌하기 위해서 그러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면 또 어찌 되느냐 하면 주관과 객관을 다 버리지 않는다, 즉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완전히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는다는 것은 쌍차이며 주관과 객관을 다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쌍조이니 주관과 객관이 서로서로 융합 자재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임제스님의 사료간입니다. 물론 교리적으로 설명하려니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진실로 사료간의 법을 호호탕탕하게 쓰려면 중도사상을 알아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을 깨쳐 중도실상(中道実相)을 알아야만 사료간을 알 수 있고 임제정법을 알 수 있고, 거기서 봉(棒)도 쓸 수 있고 할(喝)도 할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변견에 떨어져 집착하게 되면 임제스님과는 영원히 등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중도사상은 경전의 교학에서 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분명하게 중도원리를 천양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도를 터득키 위해서는 마음을 깨쳐야 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쌍차쌍조(双遮双照)하고 차조동시(遮照同時) 하는 이 중도원리는 어느 종교나 어느 철학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입장이니만큼 선과 교를 통해서 남전(南伝)•북전(北伝)할 것 없이 불교의 근본진리는 중도원리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깊이 명심하여야겠습니다. 좀 쉽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얼마나 이해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중도원리를 깨쳐야만 이해해야만 진실한 불교도인 만큼 열심히 정진합시다.

임제대사가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설명하기를 마음이 청정함이 부처요,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 법이요, 청정과 광명이 걸림이 없음이 도, 즉 승이라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