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매이지 않고 여의지 않는 영원한 진리 1986 년 4 월(50 호) 불교의 근본사상
경에 이르시되「마음이 정(定)에 있으면 능히 세간의 생멸법의 모양을 아느니라」( 言心若
在定하면 能知世間生滅法相하나니라) 위의 말씀은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가 지으신 마하지관(摩訶止觀)에 있는 말씀입니다. 정(定)이란 완전히 차별심을 떠난 생멸심을 떠난 분별심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마음이 분별심을 완전히 떠나면 세간의 생멸하는 법의 모양을 안다고 부처님이 경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경전이 무슨 경전인지 미처 찾아보지 못했습니다만 능엄경에 이와 비슷한 말이 있는데 지자대사 당시에는 능엄경이 번역되지 않았으며 한 200여년 뒤에 능엄경이 번역되었기 때문에 능엄경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가전연경에서도 부처님께서 변견이 생기는 이유는 분별심 때문이니 분별심만 버리면 생멸을 바로 본다고 하신 말씀과 꼭 같습니다. 그 뜻을 확실히 하기 위해 진실로 정(定)하게 되어 생멸법의 모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단(但) 일념심(一念心) 가운데 진제(眞際)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가지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경에 말하시기를 능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되 제일의(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아니한다고 하느니라.」<但在一念心中하야 不動眞際而有種
種差別하나니  에 言호대 善能分別■法相호대 於第一義而不動이라 하니라> (摩訶止觀) 비유하면 밝은 거울에 물건을 비쳐보는 것과 같이 밝은 거울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집착심이나 차별심이 없으면서, 일체 만물을 분명히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제(眞際) 진여심은 움직이지 아니하나 가지가지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중생의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 차별심이니, 가지가지의 차별 즉 가지가지의 생멸하는 모양을 떠난 진여의 무분별심으로 아는 것이니 그러므로 제일의(第一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여정견(眞如正見)이지 생멸망견(生滅妄見)이 아닙니다.「능히 세간의 생멸법의 모양을 알아서 사실과 같이 보면 이것을 중도관이라고 하느니라」<能知世間生滅法相하야 如實而見하면 名中道觀이니라> (摩訶止觀) 생멸법의 모양을 바로 본다는 것은 양변인 분별망상을 떠난데서 하는 말이니 이것은 불생불멸인 진여정관으로 생멸법의 모양을 본다는 것이지 생멸망견으로 생멸법의 모양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시키기 위해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이 생멸망견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진여의 바른 지혜(眞如正智)로 보는 것이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연으로 인(因)하여 법이 생겨나고 인연으로 인(因)하여 법이 멸하나니 만약 능히 이렇게 알면 이 사람은 잠깐 사이에 부처를 이루느니라」<因緣故法生하고 因緣故法滅하나니 若能如是 하면 斯人은 疾成佛하나니라> (華嚴 遊心法界記) 이 구절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가전연경에 나오는 증명중도(證明中道) 그대로 입니다. 12연기의 집(集)과 멸(滅)을 바로 보는 것이 곧 성불(成佛)이라는 견해인데 이것은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근본종취입니다.
소숭경전에 속하는 가전연경이나 대숭경전에 속하는 화엄경이나 법화경에서 생멸을 바로 보는 것이 곧 중도라는 뜻은 조금도 다르지 않읍니다.
생멸을 바로 본다는 것이 일승경(一乘經)의 극칙이며 생멸을 바로보면 원융무얘하여 탕탕무애자재한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생멸망견(生滅妄見)은 생사윤회 (生死輪廻)의 근본이니 따라서 무분별지(無分別知)를 성취해서 생멸망견올 완전히 떠나면 생사해탈 열반의 길이며 성불의 길입니다.
생멸망견을 가지고 보는 세계는 모순 상극이어서 불과 불이 통하지 않는 것과 같이 생멸이 서로 통할 수 없음과 같읍니다. 그러나 정견(正見)을 가지고 보는 세계의 생멸은 원융무애하여서 물과 불이 통하며 생멸이 서로 통하니 생사(生死) 즉 열반(涅槃)입니다.
「유(有)를 바로 알므로(眞知), 유가 무너지고 무(無)를 바로 알므로 무가 무너지니 참 지혜의 지혜는 유와 무에 계교(計交)되지 않느니라. 유에 있어서 유가 아니고 무에 있어서 무가 아니니 유와 무를 보지 못하여 성품과 모양이 여여(如如)하나니라」
〈知有에 有樓하고 知無에 無敗라 質知之知는 有無不計하나니 於有에 不有하고 於無에 不無하야 有無不見하야 性相이 如如니라〉 (寶藏論)
이 글은 승조법사의 보장론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있다는 것을 바로 볼 때 었다는 것은 무너져 버리고 없으니, 즉 생멸의 분별심이 있다는 견해가 다 없어지는것입니다.없다는 것을 바로 볼 때 없다는 것은 없어져 버리니 즉 생멸의 분별심의 없다는 견해가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있는 것을 바로 본다 없는 것을 바로 본다
생(生)을 바로 본다 멸(滅)올 바로 본다 하는 이것은 생멸과 유무를 떠난데서 하는 말이지 거기에 머물러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님(非有非無)인 중도의 바른 견해이지 생멸의 견해는 아닙니다.
참된 지혜는 유무(有無)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므로 었다는 것을 바로 보고 없다는 것을 바로 본다는 것은 유무를 떠난 유(有)와 무(無)이므로 유에서 유를 보지 못하고 무에서 무를 보지 못하니 그러므로 유와 무를 보지 못한다. 즉 유와 무를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옵니다. 실지로 유와 무를 떠난 생과 멸을 떠난 차원이 다른데서 유와 무를 생과 멸을 본다는 것이지 생멸의 분별심의 견해에서 보는 유와 무, 생명 멸이 아닙니다. 유와 무를 찾아 볼래야 볼 수 없으니 성품과 모양이 융통 자재하므로 이것이 중도의 바른 견해입니다.
참 지혜(質知)와 지혜(知)를 참 지혜는 체( )로 뒤의 지혜는 용(用)으로 보는 것이 좋은데 체와 용이 둘이 아닙니다. 닦아 들어가는 차제(次弟)에 있어서 근본무명으로부터 없애느냐 지말무명(支末無明)부터 없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친다는 것도 닦는다는 것도 본래 근본과지 말이 통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어떤 때는 근본을 가지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지말(支末)을 가지고 말씀하시는데 어찌 되었던 어느 하나라도 바로 끊으면 전체가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지 한가지 문제를 바로만 해결하면 전체가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근본이 지말이고 지말이 근본이지 달리 근본이있고 달리 지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혹시 중생들이 잘못 이해할까 하여 근본무명을 들어 말했는데 무명이란 최초 그것만이 무명이 아니라 삼라만상 전체가 다 무명입니다. 진여는 따로 깊은데 있고 현상은 진여가 아닌게 아니라 현상 이대로가 진여이고 진여 이대로가 현상입니다. 체, 용으로 볼 때도 진여(質如)는 체가 되고 삼라만상은 용(用)으로 보는데 체와 용이 둘이 아니며 둘이 아니기 때문에 현상(現狀)이 대로가 진여입니다.
그리고 무명이라고 하면 몹쓸 죄같이 생각하는데 죄가 무명은 아닙니다. 우리가 바른 견해를 깨치기 전에는 우리는 무명덩어리 입니다. 최초 이것만이 무명이 아니므로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바로 해결하면 전체가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