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법어 퇴옹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

퇴옹 성철스님의 법어 공간입니다.
열반게송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제목 : 선림 보훈집(禪林寶訓集) 1988 년 1 월(71 호) 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1
맷돌을 돌리면 깎이는 것이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땐가 다하고, 나무를 심고 기르면 더하는 것이 눈에 뜨이지는 않아도 어느 때인가는 크게 자란다.
덕을 쌓고 거듭 실천하면 그 훌륭한 점을 모르나 언젠가는 쓰이고, 의리를 버리면 그 악한 것을 당장은 모른다 해도 언젠가는 망한다.
배우는 사람이 충분히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면 큰그릇[大器]을 이루어, 명예로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이
것이 고금에 변치 않는 도이다.

2
이천 선생에게 말하였다.
재앙이 복을 일으킬 수도 있고 복이 재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재앙에서 복이 나온다 함은, 재액이 생기려 할 때에 간절히 무사함을 생각하고 깊이 이치를 구하면 드디어는 공경하고 조심하게 되므로 재앙이 복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복에서 재앙이 발생한다 함은, 거처가 편안하고 느긋할 때는 원하는 대로 사치를 부리며 방종하고, 교만과 게으름에 빠지며, 더욱 경솔하고 업신여기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때문에 재앙에 생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어려움이 많으면 뜻을 이루고, 어려움이 없으면 몸을 잃는다”고 하셨다. 얻는 것이 있으므로 잃게 되며, 잃음으로써 또 얻게 된다. 이로써 복은 요행으로 구하지 못하며, 복을 얻는 것도 그저 틈을 엿보기만 하여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거처가 복스러울 때 재앙을 염려하면 그 복을 보전 할 수 있고, 얻고 난 뒤에도 잃을까 염려하면 얻을 것이 반드시 이르러 온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다스려졌을 때에도 혼란함을 잊지 않는다.

3
이천 선생에게 말하였다.
사람들은 악한 자취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문득 이를 등지려고 도망가려 한다.
그러나 도망가기를 빨리 하면 할수록 자취는 더욱 많아지며, 그림자도 더욱 빨라진다. 그것은 그늘에 들어가 도망가기를 그쳐, 그림자가 스스로 없어지고 자취도 자연스럽게 끊어지는 것만 못하다. 일상생활에서 이를 분명히 한다면 그 자리에서 이 도에 나아가리라.

4
배우는 사람은 일거일동과 언행을 반드시 살피고 돌아보아야 한다.
말이 적다고 해서 반드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며, 말을 잘한다고 해서 꼭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다. 촌스럽고 소박한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패륜아는 아니며, 공순한 사람이라 해서 꼭 충성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지식은 말만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않고, 자기 생각만 가지고 납자를 선별하지도 않는다.
강호(江湖)에 떠도는 남자로서 누군들 도를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만, 그 가운데서 분명하게 깨닫고 이치를 본 사람은 천명 가운데 하나도 없다.
그 사이에 자신을 닦는 데 힘쓰고 이제껏 배운 것을 모아 덕을 갖추는 데에는, 삼십년이 아니면 여기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다가 우연히 일 하나를 잘못했다고 해서 총림이 그를 버린다면 종신토록 일어서질 못하게 된다.
열 두 대의 수레를 비출 수 있는 구슬이라 해도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있기 마련이고, 연이은 성곽과 바꿀 만한 구슬이라도 흠이 있을 텐데, 범부 유정으로서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계경(契經)에서도 말하기를 “사념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지 말고 깨달음이 더딜까 염려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니 성현이 아닌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잘못이 없겠는가? 선지식쯤 되어야 남을 다 곡진하게 완성시켜 주며 정도가 다른 모든 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솜씨가 뛰어난 목수는 수레바퀴와 서까래의 쓰임새에 따라, 굽었거나 곧거나 못쓰는 재목이 없으며, 뛰어난 마부는 험하거나 평탄한 길에 알맞도록, 노둔한 말이든 천리마든 본성을 잃음이 없게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사물도 이와 같은데 사람은 당연히 그러하리라. 가령 나아가고 물러감에 사랑하고 미워함의 삼정이 따르고, 모이고 흩어짐에 취향의 같고 다름에 매인다면 이는 자(尺)를 버리고 사각형과 원을 그리는 것이며, 저울을 버리고 무게를 다는 것과 같다. 비록 꼼꼼하게 했다고 해도 틀린 데가 나오기 마련이다.

5
훌륭한 주지라면 대중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고 일찌기 그 마음을 사사롭게 하지 않으며, 대중의 이목(耳目)으로써 자기의 이목을 삼고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아야 드디어 대중의 뜻에 통하고 여러 사람의 실정을 극진히 이해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으면 나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을 바로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은 삿되지 않고, 싫어하는 것도 어긋나지 않게 된다. 무엇 때문에 자기의 속 마음에 사사롭게 의지하여 아첨하는 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는가?
여러 사람의 이목을 자기의 이목으로 삼았다면 모든 사람의 총명이 다 나의 총명이 된다. 그러므로 눈의 밝음으로는 비춰보지 않음이 없고, 귀의 밝음으로는 듣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또 무엇 때문에 자기의 이목에 의탁하여 굳이 미혹에 가리움을 자초하겠는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대중의 이목에 의탁하는 경우는, 어질고 지혜로운 인재가 자기의 허물 고치기를 힘쓰고 대중의 바램에 부응할 때뿐이니, 여기에는 치우침이나 사사로움이 없으므로 누구나 다 마음을 귀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인의가 멀리 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들춰내기나 하고, 대중이 하자는 대로 따르지 않으며 자기 중심적인 태도에 빠지게 되므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나쁜 소문과 거친 행동이 멀리 퍼지는 것 또한 마땅하다.
이로써 알아야 할 것은, 주지되는 사람이 대중의 바램에 부응하면 사리에 밝하다는 말을 듣고, 대중의 바램을 저버리면 용렬한 부류라고 낙인 찍힌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속 마음을 펴거나 대중의 이목에 의탁함에 따라 옳고 그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6
옛 어진이가 말하기를, “도를 배움에는 깨닫기가 어렵고, 깨닫고 나서는 지키기가 어려우며, 지키고 나면 실천에 옮기는 일이 어렵다”고 하였다.
지금 막상 실천하려고 보니 그 어려움이 깨닫고 지키는 것보다 더하다. 그 이유는, 깨닫고 지키는 것은 정진(精進)을 굳세고 높게 하여 자신이 몸소 힘쓰는 데 있을 뿐이지만 실천에 옮기는 것은 반드시 평등한 마음으로 죽기로 맹세하여 자기를 덜어내고 다른 사람을 이익케 하는 것으로 책임을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고 맹세가 굳지 못하면, 자신을 덜고 남을 이익케 하는 일이 뒤바뀌어 세속과 영합하고 스승께 아부나 하는 부류에 떨어지게 되니, 이를 두려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