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에 생각하는 신라스님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불교계는 변혁의 몸부림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 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변혁기운은 한국의 정치상황이라든가 사회변혁의 추세와 함께 이해돼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움직임이 불교계의 성향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즉, 불교계의 일각에서 통일문제나 민주정치의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정치현실과 분단조국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불교인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편 불교의 사회복지사업, 어린이 포교, 재가신행단체의 활발한 수련활동들은 그동안 한국불교가 소홀했던 부분에 대한 반성을 밑바탕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을 쏟는 변혁의 부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변혁의 시기는 발전이냐, 퇴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변혁을 주도하는 불교계 지도자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며, 또한 그들에게서 앞날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기대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혁의 시기에 불교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외도하거나 편의에 따라 해석하는 등의 뿌리없는 주의나 주장은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지럽힐 우려가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요즘 우리 불교계의 민중불교운동에는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불교의 가르침 속에 일체의 이데올로기가 수용되어야 하는데 이데올로기 속에 불교의 가르침이 끌려다니는 듯한 것이 그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문제는 이미 지적된 것이지만, 여전히 우려되는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서 신라불교의 소위 민중불교운동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겠다.
초기 신라불교는 왕실과 귀족층을 중심으로 한 왕실불교로 발전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왕실중심불교가 당시의 민중(서민대중)들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되자 진평왕대 이후 신라불교계에서는 왕실불교에 대한 반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왕실, 귀족들과 밀착해서 발전해온 왕실불교에 대한 반성은 바로 당시의 피지배 계층인 서민대중들에 대한 포교로 연결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민중불교를 주도했던 당시 민중불교 지도자들의 주요 행적이다. 신라 민중불교운동의 대표자로는 혜숙, 혜공, 원효, 대안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주요 활동을 통해서 오늘날 변혁기의 불교지도자들은 귀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와 송고승전 등에 나타난 기록에서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당시 귀족이나 왕실 등의 권위와 모순에 단호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혜숙의 경우 국선(國仙)인 우담공이 살생을 즐기는 것을 보고 “처음에 나는 공이 어진사람인 줄 알았는데 살생을 하고 자기몸을 이롭게 하기에 급급한 것을 보니 당신이 어찌 인인군자(仁人君子)일 수 있겠소”하고 나무랐다. 이 소식을 듣고 진평왕이 혜숙을 찾았으나 혜숙은 부름에 응하지 않으며 마을 사람들과 친숙히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둘째, 포교를 위해 천촌만락(千村萬落}을 쏘다니며, 민중들과 어울리는 데 계율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혜숙이 어느 여자와 같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던지, 혜공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므로 부궤(負寶)화상이란 별명이 붙은 것, 대안이 특이한 형상을 하고 시를 다니며 동발(銅鉢)을 두드리고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므로 사람들이 그를 대안이라 이름하였던 것, 원효가 무애호를 쥐고 이거리 저골목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초동목수까지 나무(南無)를 외도록 하였다는 것 등은 모두 계율의 굴레에 얽매임이 없이 두루 세상을 쏘다니며 민중교화에 전념한 당시 민중불교운동가의 모습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물론 이들의 행각이 계율을 무시한 파계행위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계율의 굴fp에서 자유로웠던 모습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이들 민중불교운동가들은 당대의 대석학봉들이었다는 점이다.
원효의 학식은 당시 중국과 일본 등지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화쟁사상 등은 당시 불교계의 제사장을 모두 수용하여 정리한 탁월한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효의 방대한 저술활동은 그의 학식을 알 수 있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혜공이나 대안 등은 이러한 원효가 가르침을 받을 만큼 뛰어난 학식을 겸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이혜동려조에 따르면 원효가 모든 경, 소를 짓다가 의심이 나면 혜공에게 가서 물었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대안이 산경을 차례로 꿰매고는 원효에게 가서 해석을 부탁하라고 하는 내용이 있는데, 산경을 팔품으로 정리하는 대안의 모습은 대안의 학식이 원효를 능가함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편 이들 민중불교 실천자들은 당시 신라사회에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경덕왕대(742-765’)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흥륜사 금당십성은 이들 민중불교 실천자들에 대한 당시 불교계의 평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금당십성으로 안치된 인물을 보면 첫째, 我道, 厭觸, 둘째, 義 , 表訓, 慈藏, 넷째, 惠宿, 惠空, 元曉, ,安含 등이다. 이중 셋째에 해당되는 인물들이 민중불교 실천자들이다.
앞에서 당시 민중불교 실천자들의 행각의 특정과 이들이 당대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대략 살펴보았다.
신라불교는 이들의 활동을 계기로 왕실, 귀족 중심에서 벗어나 전신라사회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은 불교의 전파는 중대 신라를 풍요롭게 한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불교계에서는 그동안의 안일한 자세와 무기력한 보수 성향에서 벗어나 참다운 중생교화의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변혁의 시기를 주도하는 교계 지도자들은 과연 시대적인 사명감과 불교의 백년대계를 이끌 충분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불기 2533년, 석가탄신일을 맞으면서 신라 민중불교 실천자들의 뚜렷하고 탁월한 모습이 이 시대 민중불교 운동의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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