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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가다저물어가는들판은을씨년스러워야할텐데볕이한없이퍼져그늘하나없으니마음이가든해진
다. 그렇게 가을은 가슴을 널어놓고 가는 중이다. 크게 자랑할 것도 없이 아쉬워할 것도 없이, 어제처럼 그리
고내일처럼, 그리고땅으로조금씩조금씩묻히며열반에드는나뭇잎들처럼.
무룡산 아래‘도솔암’이라는 색 바랜 현판이 붙은 작은 문으로 들어선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낮고
좁다랗고낡은문. 몸을저절로숙이고낮추게되니마음도다소곳해지는문. 그문으로들어서니도량한가운
데엔사리탑이높이솟아있다. 신도들이사리탑을도느라그작은도량을가득채우고있다.
91년도에 세워진 이 탑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 스님들의 손에서 손으로 비밀리에 전해지던 불
사리세과는, 묘허스님이지니고있던것. 그것을신라시대사리봉안법을그대로재현해삼층석탑을조성해
안치했다. 특히도솔암에모신것은, 삼국유사에의하면최초로불사리를봉안한곳이경주의황룡사와양산의
통도사와울산의태화사라하는데태화사가없으니그고장에봉안하기로하여도솔암으로온것이다.
그러니 신도들은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도 사리탑을 돌고 돈다. 저만치서 스님이 문을 드르륵 열고 나와 흰
개를 안고 빵을 하나 준다.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입 안에 넣어주니 큰 개는 천천히 받아먹는다. 그렇게 느린
속도의 관계라는 것은, 오래도록 함께 살았다는 의미. 스님이 손을 탁탁 털고 들어가자 개도 발을 탁탁 털고
사리탑아래앉는다.
도솔암의 주지인 정각 스님은 이곳에서 이십일 년째 살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와보니 허물어져 가는 집 한 채
가 있더라고 했다. 법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열두 평의 대웅전과 한 평 반의 산신각이 전부였단다. 비가 오기
라도 하면 천장에서 비가 줄줄 새고 석회로 만들어진 부처님은 빗물에 흘러내렸다. 그래서 비가 오면 부처님
을 비닐로 덮어놓고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스님이 이곳과 연을 갖게 된 것은 77년도에 근처의 옥천암에 주지
로오면서부터였다. 옥천암의주지소임을마치고이곳에머물며기도를시작했다. 구년반동안출타를금하
고기도를올렸다.
“저절로절이지어지대요. 그땐, 내가계속머물고있으니까신도들이계속찾아오더라고.”
지금은 크진 않아도 그럴 듯한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 처음엔 혼자서 법회를 다 하
고 재도 혼자서 다 치러내곤 했다. 큰 불사는 아니어도 그렇게 살 만한 집이 지어졌다. 천일기도를 세 번 하는
동안법당이다지어졌다. 그렇게아무것도없는곳에부처님의자리를차려냈으니스님의공력이느껴진다.
스님은 오래도록 도솔암의 주지로 살고 있지만 어려서 출가했기에 법복을 입고 옮겼던 발걸음은 여기저기
로 퍼져 있다. 통도사와 해인사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어려웠던 살림들을 얘기하면서는 그리움이 가득하다.
그땐그렇게어렵게공부를했고, 그랬기에눈빛이더성성했던시절이었다고.
“그땐 자비량自備糧시절이었지. 내 쌀은 내가 내고 먹는 거예요. 소임을 보면 소임에 따라 양식을 안 내도
돼서 되도록 소임을 보면서 공부했지. 큰방에서 대중공양을 하는데 밥그릇 수에 딱 맞게 밥을 한다고. 그런데
열 그릇 이하로 모자라면 절대 밥을 더 안 하고 스님네들 밥을 덜어 덜어 열 그릇을 채워냈어. 그걸 못 참아서
보따리싸가지고나가버린스님도있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나눠주는 주먹만한 빨랫비누 한 장, 돈 오백 원,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전부였다. 그러면 오
백 원을 들고 나가서 16절 갱지를 한 묶음 사고 잉크와 펜을 샀다. 책이 없던 시절이니 책 한 권을 갱지에 다
베껴썼다. 그렇게공부를했다. 지금처럼책이굴러다니는시절도복사기로쭉밀면되는시절도아니니그때
의 공부는 그렇게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며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 곁으로 한 발 한 발 걸어가듯이. 그런 느림
안에 절실함도 경건함도 있었다. 지금처럼 차를 타고 나가 책을 사거나 복사기로 밀어대는 쾌속의 시대엔 누
릴 수 없는 정서고 신심이다. 그러니 책 많다고 결코 부자가 아닌 것. 생각해볼 일이다. 부처님 말씀을 책 안에
둘 일인지 가슴 안에 둘 일인지. 그리고 내 책장의 책들은 과연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내 뱃속의 음식은 무얼
위한것인지.
“그때 대중공양은, 찰밥에 김 한 장이 최고였어요. 그 다음이 국수, 과일, 국수 가락 위에 설탕을 허옇게 뿌
려서먹었지. 수박도물에담갔다가껍질까지설탕을뿌려서먹고. 여래응량기, 안먹다가그렇게먹으니배가
터지지. 그러니까병이났고.”
스님은 열세 살에 절에 찾아들었다. 세 살 먹으면서부터 아팠다. 곧 죽는다고 했다. 덩치는 작고 몸은 비쩍
말라만 갔다. 이래저래 골골거리며 살아내다가 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공부는커녕 학교에 다녀오다가 힘들면
지쳐서 마을 언덕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업어 오곤 했다. 오늘 죽니 내일 죽니 하다가 용하
다는 보살을 찾아갔다. 거기서 몸을 좀 회복했는데 살고 싶으면 큰 절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통도사로 가게
된것이절과의첫연이었다. 통도사에서살게됐는데주지인벽안스님이오래도록계를내리지않으셨다. 다
른 사람들은 다 스님이 되어 나가는데 몸이 아파서 그런지 쉽게 스님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61년도
에야 벽안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그리고 68년에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를수지했다. 그렇게숨을잇고그렇게업을잇고그렇게법을이었다.
“통도사 큰방에서 대중공양을 하던 어느 날, 아욱국을 먹다가 미끄러워서 사기 바루를 놓쳐서 깨뜨려버린
거야. 가슴이덜컥덜컥했지. 심장이탈이나서죽다가살았다고. 어른스님들이일체말을안해버리시고적막
이 가득했어요. 강사 스님이 잘 한다 잘 한다 중이 밥그릇을 깨고! 그러셨지. 그대로 지대방에 들어가 병이 나
서한사흘동안잠도못자고끙끙앓았지.”
몸이 약하니 강원 생활은 두 배로 힘들었다. 대중들과 방에서 자면 아무도 곁에서 잠을 자려하지 않았다.
폐가 나빠서 목에선 갸릉대는 소리가 들리고 가위에 눌려 고함을 지르고 하니 아무도 곁을 주지 않았다. 그래
서 스님은 제일 추운 자리에 그 작은 몸을 뉘었다. 감로당에 군불을 때면 연기 나는 굴뚝 곁에서 자는 게 차라
리편했다.
지금은 건강을 찾아 부처님의 뜻을 따르기에 거스를 것 없다. 몸은 여릿하여도 의식을 꼬챙이처럼 세우고
사니, 할 말은 다 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낸다. 도리에 맞고 정의에 맞고 법도에 맞게 살자는 게 스님의 법이
다. 그것이 중용 아닐 것인가. 삶에 끄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더도 덜도 없이 내 바퀴를 스스로 굴리며 가는 것.
그럴 때 세상의 모든 법은 사람을 무릎 꿇게 하는 법이 아닌, 사람을 일으키는 법이 아닐 것인가. 저기, 나뭇잎
을술술굴리고다니는바람처럼눈에보이는형체없이도말이다.
맡고있는직책도많다. 조계종총무원문화부장과성보보존위원회위원장을지냈고, 현재는성보문화재연
구원 이사와 경봉장학회 이사로 있으며 울산 조계종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리고 올해 10월부터는 해인
동문회회장직을맡았다. 그러다보니동문회의장학회이사장직도맡고있다.
“장학회는 배우는 데 어려움이있는 사람을 돕는 게 할 일 아닌가. 이 년 동안 잘 구성해서 보람된 재단이될
수있도록꾸려가야지요.”
문득, 도량에서 탑돌이를 하던 신도들이 스님 방의 문을 두드린다. 수줍은 듯 묻는다. 사리탑을 돌 때 관세
음보살을찾아야합니까, 석가모니를찾아야합니까?
“시방세계가 다 부처님의 몸이라. 우린 다 부처님 몸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라. 그렇게 생각하면 관세음보
살은 어딨고석가모니는어딨나? 수행정진을하는 것도밥을먹든 잠을자든 하는것이지. 정진하라고정해진
시간이따로있나?”
그러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저 탑에만 있을 것인가. 마음 안을 잘 들춰보면 거기 사리가 있을 수도 있고 부
처님의 사리라 믿고 있는 것이 똥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다 마음 안에 뜻이 있고 답이 있다는
뜻이었을것이다.
스님은어떤화두를들고계시는지, 여쭙는다.
“몰라. 모르는게화두지, 뭐있나?”
그렇다면, 칠통漆桶을타파하기위해스님은오늘도화두를들고계신가, 여쭙는다.
“놓을것도없는데들것은어딨어!”
양쪽에매듭이묶여져있는것을내려놓지말고풀라는것이니놓을것도들것도없다는말씀인가.
“눈으로코로귀로입으로…좋고나쁨을분별하니, 이게뭐냐! 무無!”
1700가지의 공안 중에 하나를 화두로 하여 그 하나만 깨치면1700가지를 다 알게 되고 하나를 모르면1700
가지를 다 모르는 것. 결국 화두라는 것은 마음을 깨치게 하는 수단일 뿐이니, 스님이‘이 뭐꼬’라는 화두를
말로줄줄풀지않는것은문자에집착하지않으려는연유인듯하다.
스님은 도솔암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 첫째는, 복지시설을 만드는 것. 도솔암 앞에 유아, 노인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겐 어려서부터 불심을 키워줄 수 있고 노인들은 부처
님께귀의하여이생의마지막을보내게하고싶은뜻이다. 부자는아니어도밥먹고살만큼의마음부자는되
니사회에환원하겠다는뜻도있다. 그러나시설을만드는일이쉽지만은않다.
“깨끗한 물 한 모금 주려 한다 했더니, 서울에서 콸콸 쏟아지는 생수를 직접 대주겠다는 형국인 것이지요.
행정의문제점들이마음을다치게해요.”
둘째는, 울산에 불교방송국을 만드는 일이다. 어쩐지, 스님의 방에 들어서면서부터 텔레비전은 내내 소리
없이불교방송을방영하고있었다. 스님의바람이얼마나큰것인지알수있었다.
“방송매체의힘은대단해요. 요즘세상에포교하기엔가장좋은수단이지요.”
두 가지 바람을 가진 지는 오래 됐다. 여기저기 알아보고 일을 추진해 나가려 했지만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나스님은결코포기하지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물 위의 가랑잎은 가라앉지 않아요. 더러운 번뇌 망상이 밑으로 쫙 가라앉으면 일월에
자기 얼굴이 비치지. 그러나 오탁악세汚濁惡世, 흔들리는 흙탕물에선 자기 자신을 볼 수가 없다고. 조용히 잔
잔한가운데서마음을봐야지. 견성見性!”
스님이 문득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더니 흰 개를 불러 앞세워 도솔암 앞의 들녘으로 나간다. 그러더니
가만히 하늘을 본다. 구름 한 점 없다. 바람도 잠잠하다. 새들도 잠잠하다. 나도 잠잠히 숨 낮추고 하늘을 본
다. 청량한하늘에스님의뜻이맑게비친다. 성불成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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