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란 쉬운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으나, 문자상으로는 크게 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부처님이 되는 길을 말씀하신 것’이요, 또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을 가르친 것’이다. 전자는 수행자의 위치에서, 후자는 신양자의 입장에서 각각 해석한 것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북방중화(北方中華)로 전해지면서 여러 종류의 부처님과 부처님을 용호보필하는 많은 보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교는 ‘부처님이 되는 가르침’에서 ‘부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가르침’으로 변하여, 이를 실행하는 보살불교가 생성된 것이다. 초기의 불교는 그 사상이 오로지 한 분만을 생각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다신사상으로 변하여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불교는, 순수성과 신성과 숭고함이 없는 임기웅변에 능한 종교라는 인상을 심어 주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불교를 다시 법으로 멸하면,‘변함이 없는 불법’과 시대의 흐름이나 인물에 따라 ‘변화해 가는 방편적 불법’이 있다. 전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한결 같은 것으로서 권력이나 물력에 의하여 변괴 될 수 없는, ‘진리는 부동’이라고 하는 절대불변이 그 본질이다. 그래서 이것은 개혁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 현실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진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어서, 반드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개혁을 논하는 데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대승적 보살불교에 있어서는 개인의 이익이나 변명에 의한 개혁은 안된다. 지금의 세태는 변명이 아닌 변명, 이유 아닌 이유로 가득 차있다. 이러한 가운데 성인도 시대를 따른다 는 말을 구호로 내세워, 자신의 힘이나 심성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서 개인의 수행에서 중생교화에 이르기까지 생기는 모든 부작용을 시대나 환경의 탓으로 돌린 채 개혁론만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적은 수의 사람들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큰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쓸리는 지금의 사조에서는 무언의 다수 수행자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둘째, 부처님의 삼십이 상(相)과 팔십 종호(種好), 그리고 삼천위의(三千威構)와 팔만세행(八萬細行)이 우리의 목적의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열반시에 어느 것에나 얽매이지 말라는 노파심에서 아난에게 교계(敎識)하신 이계위사(以械寫師) 라는 구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좋은 뜻을 전해 준다. 수행자의 먼 미래를 내다보시고 하신 이 말씀에서는, 계(械) 그 자체가사(師)며, 사(師) 그 자체가 법(法)이라고 했으므로 승단의 위계질서도 이것에 준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일생을 통하여 제정한 것이기에, 혹자는 이를 고정된 시대적 관념(觀念)이 아니라 하여, 이를 인용, 개혁의 슬로건으로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해야 할 것은 당시의 석가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약 이 복잡한 시대에 법만을 제정하는 부서를 두어 날마다 연구한다고 하여도, 마음을 꿰뚫는 혜안이 없는 한 다가오는 내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변화무쌍한 중생심의 번뇌를 막지 못하고 그것에 결박되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불멸 2,500여 년, 이땅에 불교가 전해진 지 l,600여 년,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개혁이 있었는지,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개혁의 소리를 부르짖을지, 시대마다 다른 것과 시대마다 불편부당한 것은 있기 마련인데 이제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논리가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유독 법만을 놓고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도 사람을 탓하진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것이 사람에 있는 것을…. 야운비구(野雲比丘)의 자경문(自警文)에 보면, “主人公아 聽我言하라 幾人이 得道空門이어늘 自不修道언정 何愚手未世也리요“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자신의 방일로 언한 정진부족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아뭏든 개혁이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고전을 상기해 보더라도 천하를 통일한 유방은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민심을 얻었으며, 영국의 헌법은 성문헌법이 아닌 관습법과 습관률이다. 이렇게 간단한 법과 전통적인 관습법이 복잡하고 현실적인 것보다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서로에게는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단은 운영의 묘에 따라 서로 보완될 수 있다. 그런데 개혁이라는 명제 아래 새로운 것만 추구하다가 오랜 전통을 허물어뜨리지는 않을지, 또한 단점을 보강한다는 구실로 몇몇 사람들만의 지혜나 소견을 첨부하는 식이 되지는 않을지, 염려스럽다. 따라서 개혁을 하려면, 먼저 불교의 근본성신파 수행자의 방향을 잘 알아서 충분한 시간과 총괄적인 안목을 갖고서 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수행자의 위(位)냐, 신앙자의 위(位)냐 하는 것이다. 수행자의 입장이라면 현행법으로써 목표에 도달하여 보지도 아니하고 장과 단을 논할 수는 없다. 자칫하면 새로운 올가미를 쓰는 꼴이 되어 더욱 부자유하게 될 수도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나 피해는 적다.
문자적인 법은 현실만을 중시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진리에 밝은 사람들은 문자가 필요없고 오로지 심성에서 우러나는 윤리도덕(倫理道德)을 더 추구하고 지향할 것이다. 그러나 꼭 시대를 앞서가는 개혁을 해야 한다면, 현실에는 다소 어둡더라도 진리에 밝고 덕과 수행이 있는, 불안(佛眼)을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서 해야할 것이다.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서, 행
정상 어떤 것을 규제하기 위해서 지키지도 못할 법을 만든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누구나 동화되고 자유롭게 실천할 수 있는 법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행의 길은 험하고 외로운 고행의 길인데, 설상가상으로 어떤 악법에 제약을 받는다면, 제대로 해내기 힘든 것이다.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법을 만들다 보면 우리는 법 속에 파묻히게 되고 만다. 보기를 들어, 농부가 해충을 잡기 위하여 살충제를 뿌리면, 해충만 죽는 것이 아니라 생충도 함께 죽는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해충이 생겨서 그 약성을 무력하게 하면, 농부는 또 다시 강한 살충제를 살포한다. 이와 같이 반복되어 농부와 해충의 싸움은 끊이지 않는다. 이것을 막으려면 결국 자연에 맡겨야 한다. 자연의 순리는 서로 더불어 사는 원리 속에 있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가 보존될 수 있다. 시대와 현실성을 쫓는 개혁만으로는 부족하고, 못난 자기의 결점을 면책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결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스스로 인정하고 참회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용맹정진으로 수행의 힘을 길러 부처가 되는 가르침을 실천
하는 자질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개혁에 쏟는 정신을 수행으로 돌리고, 현실적인 것에 치우치는 마음을 버리고 전통을 이어 받는 참다운 마음을 가져서 영원히 사는 삶을 추구함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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