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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은 반야부 계통의 경전으로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반야공 사장의 이론을 집대성한 최고의 경전입니다. 옛부터 선종수행의 지침서로 널리 애송되었고 특히 오늘날 한국 선종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경전으로 가장 중요시되는 경전입니다. 넓고 넓어 걸림이 없고 깊고 깊어 끝을 혜아리기 어려운 반야공의 사상을 제자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 갈파해 나가는 것입니다. 무릇 경전을 읽고 유통하는 공덕도 그 혜아리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묘용이 있다는데, 하물며 그 내용을 이해하고 생사 고혜를 건너는 지침으로 삼을 수 있다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금강경 중에서도 가장 널리 원하는 책은 금강경오가해인데, 그중에서도 저는 이조시대 함허특통 선사께서 서문을 하신 부분을 저는 늘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과 형상은 꿇었으되 옛과 지금을 두루 관통하고 한 티끌에 처해 있으되 시방세계를 포함했으며 안으로 무수한 묘용을 함용하였고 밖으로 한량없는 기틀에 용했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의 주체가 되고 수만가지 진리의 왕이 됨이라 넓고 넓어서 견줄 것이 없고 높고 높아서 따를 자가 없도다 어쩌 신기하다 말하지 않으리오 고개 까딱하는 사이에 밝고 밝으며 눈 깜박할 찰라에 어둡고 어둡도다 어쩌 심오하다 말하지 않으리오 하늘과 땅보다 먼저 하여 그 시작이 없고 하늘과 땅보다 뒤에 하여 그 종말이 없으니 공(空)이냐 유(有)냐 내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우리 석가 부처님께서 이 한 물건을 얻으사 뭇 중생이 모두 볼성이 있으나 미혹함을 보시고 탄식해 이르시되 기이하다 하시고 생사의 바다 가운데를 향하여 바닥없는 배를 저으시고 구멍없는 피리를 부시니 묘한 소리가 땅을 진동하고 법의 물결이 하늘에 가득한지라 바보가 깨닫고 마른나무가 다시 사니 대지의 뭇 생명이 그 처소를 얻었도다. 여기에서 한 물건이란 심오한 마음자리를 가르키는 것으로 불성이니, 진리니, 법이니 하는 말입니다. 이한 물건을 일착자라고도 하는데 우리 선가의 위대한 개종자이신 육조 혜능스님과 남악 회양선사의 문답에 그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습니다. 남악 회양선사한 일찍이 15살에 형주 옥천사로 출가하여 교학을 배웠는데 그 학문의 길이가 소동파 백낙천을 능가하는 걸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아는 학문은 늘 미지근하고 컴컴한 어둠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안심 안되었어요 하루는 탄연스님의 권고도 있고 해서 육조 혜능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조계산의 혜능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혜능스님은 일자무식인데도 불법의 대도를 통달하여 중생제도하는 기연이 막대하여 중국천하에 소문이 자자하던 때인데, 자기는 불법의 진수를 공부한 대학자인데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해서 혜능스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가 하는 궁금중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에요 요즈음 같으면 비행기다 기차다 해서 금방 찾아가겠지만, 옛날 중국의 사정은 그러질 못해서 만리강산 넓은 땅을 가는데 몇 달씩 걸립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한 선방에 모여서 한 철 안거를 지내고 혜어지는 인사는 내생에 다시 봅시다 한다고 하지 않아요, 우리 나라에서야 여기저기 선냉에 다니다 보면 다시 만나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게 되는데, 중국 천지에서는 일생에 한 번 만나 같이 살기도 쉬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 크고 작은 고개를 넘고 큰 강을 건너고 험한 산을 지나 여러 달을 고생고생하여 조계산에 당도하였습니다. 선의 깨달음이 좌선을 통해 구경처에 이르는 것이 가장 적절한 왕도이지만 이렇게 좋은 선지식을 찾아 나서고 또 노정에서 배우는 세상에 대한 이해야말로 운수납자의 만행길의 의미가 아닙니까. 불교수행의 길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여정에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무엇보다도 처음엔 수행의 기초가 튼튼해야 할 것인데, 팔만대장경을 한 10년은 치밀하게 연구하여 불교이론에 대해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는데까지 가서 비로소 참선을 해야 합니다. 집을 짓는 데도, 농사일을 하는 데도 처음엔 지도자가 필요하듯, 참선 공부하는 것도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한 것입니다. 드디어 혜능스님의 처소에 당도하여 방문을 열고 인사를 드리려고 그 스님을 바라다보는데,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에 압도를 당합니다. 고양이가 범을 만나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인사를 드리려는 찰라, 혜능스님이 ‘어떠한 물건이 왔는고’하고 대질러 묻는 것이었어요 안 그래도 혜능스님을 보는 순간 자기의 학문이 태양이 떠오르자 빛을 잃어버린 촛불같은 느낌을 가졌는데, 혜능스님의 그 물음은 지금까지 자기가 사량하고 분별하던 학문과는 전혀 같지 않은 생소한 물음이어서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생각의 앞과 뒤가 꽉 막혀 버립니다. ‘어떤 물건이 왔는고? ’, ‘어떤 물건이 왔는고? ’ ‘어허 참 어떤 물건이 왔는고’, 오지 않은 것이 아니지요 손을 흔들고 발을 움직여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피곤하면 잠을 자면서 몇 달 며칠을 그렇게 힘들여서 왔단 말입니다. 묘하게 물에 빠지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과 부당 치지도 않고 비에 젖기도 했지만 죽을 병에 들지도 않고 오기는 왔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서 어떠한 물건이 이리 왔다고 되 받아쳐야 하는데, 앞 뒤가 꽉 막혀버렸어요 그렇게 막막하게 서 있다가 남악 회양선사는 그 막힌 의문을 가지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어요. 내가 오기는 왔으면서도 무슨 물건이 이리 왔는고 하는 물음에 한마디 대답도 못하면서 종일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였겠지요 평생 갈고 닦은 지식이라는 것이 이 물음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되고 보니 자기 평생의 공부한 학문이라는 재산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의문 하나가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삼키려 해도 넘어가지 않고 뱉으려 해도 안 뱉아지니 답답한 노릇 아닙니까. 이렇게 되고 보니 밥을 먹어도 제정신이 아니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도무지 제대로 들릴 턱이 없습니다. 오직 이 의문 하나가 딱 걸려서 옴짝달싹할 수 가 없게 된 겁니다. 무슨 책을 들고 찾아보고 사전을 뒤져보고 활 연구의 대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꽉 막혀버리니까 이 의심을 풀지 않고서야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밥 먹으나 똥을 누나, 온통이 의섬 뿐이었어요. 남악 회양선사는 바로 이런 의섬 덩어리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잡들어 갔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확연히 깨치게 된 겁니다. 이것이 참선의 바론 이치입니다. 기초를 튼튼히 세우고 좋은 선지식을 만나고 하는 것이 참선의 테두리라면 이러한 대의단(大疑團)을 가지고 대용맹심을 내어 끝까지 화두길에 물러나지 않을 대신심(大信心)의 삼박자가 갖추어지면, 반드시 확철대오하는 날이 옵니다. 그것은 마치 수각에 고이는 물이 대나무 통을 지나 한 두 줄기 고이지만 결국은 수각을 넘쳐나는 것처럼 반드시 그러한 경계가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남악 회양선사는 자기 암자로 돌아가 8년 동안을 궁구하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무치는 깨달음을 중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혜능스님께 8년전 물음에 답하게 됩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는 대답입니다. 이로써 남악 회양선사는 선종의 정맥을 잇고 무수환 수선납자를 재접하는 선종 중흥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딱 깨쳐서 본래의 성품을 알고 나면 일시에 모든 형상과 재념의 혼란스러운 인식에서 본래의 자리, 절대의 자리에 돌아옵니다. 의심에 의심을 더해 갈 때는 도무지 사람이고 산이고 물이고 꽃이고 불상이고 철이고 제대로 보이질 않는데, 본래의 자리에 돌아오면 그 모습 그대로가 진리인 것입니다. 이 러한 경지에서는 이름과 형상을 여의었어도 옛과 지금을 관통하고 있고 한 티끌에 처했어도 시방세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큰 것은 큰 것이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이지만, 이 경지에서는 큰 것도 작은 것에 포함되고 작은 것도 큰 것에 포함되는 자유자재의 경지를 열어갑니다. 이렇게 된 사람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사람 중에서도 자기의 주체를 세워가며 세상의 모든 법칙 가운데도 왕중왕의 지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공(空)한 도리에 걸리고 또 겨우 공(空)의 이치를 벗어나면 유(有)의 도리에 빠져서 허우적대지만 이 자리는 공(空)과 유(有)에 자재하고 공과 유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경지가 요즈음 말하는 신통을 부리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생사를 초월하고 유와 공을 자재한 자리에 무슨 신통이 필요하겠습니까. 참으로 이것이 불교의 위대함이지요 그래 평상심이 되어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하는 그대로의 세상,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도인의 경지요,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보통의 중생은 뭔가 자기 색안경을 쓰고 쩔쩔매면서 사리판단을 옳게 못해요 붉고 푸른 자신의 욕심에 따라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권력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대하면 친구간에도 적이 되기도 하고, 재물의 안경을 쓰고 가족을 대하면 가족간에도 원수가 되는 병든 중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안경을 벗어버리는 것이 깨달음의 세계요, 성인의 경지입니다. 溪聲便是長廣說이요 頭頭物物廬舍栽라. 시냇물 소리는 문득 부처님 설법이요 산천초목은 모두 노사나불이로다. 우리 부처님 대석가께서 불교의 법을 따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육파 철학도 배우고 육사외도들과 사상논쟁을 해도 미지근해서 근본적인 해결은 안되거든요 그래서 설산에 들어가 6년 고행을 하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 진리의 처음 말씀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하늘 꼭대기에 무슨 신이 있고 땅 속에 무슨 귀신이 있어서 세상을 간섭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각자가 모든 것을 창조하는 핵심이요 원동력이며, 바로 창조주요 조물주다 이런 말이지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맨 먼저 깨친 부처요 모든 중생은 결국 점차 깨칠 부처이기에, 거기에 무슨 조금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밑바닥 없는 배를 저으시고 구멍이 없는 피리를 부시는 부처님의 묘용과 대비섬은 이렇게 한량없는 공덕이요, 최상의 공경의 자리입니다. 세상의 모양은 형형색색으로 젊은이 늙은이 힘이 센 사람, 약한 사람, 영리한 사람, 둔한 사람 등의 현상적 차별이 있지만, 그 마음자리는 모자라고 길고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절대 평등한 거지요 이런 자리를 파헤쳐 깨우치는 것이 불교입니다. 중생이 있음으로 해서 부처가 있고, 번뇌가 있음으로 해서 보리가 있고, 어리석음이 있음으로 해서 지혜로움이 있고 밝음이 있기에 어둠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상대적 원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산다 해도 그 이면에는 악의 그림자가 따르고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죽음의 망령은 금방 따라 불습니다. 불교는 이런 상대적 ·분단적 사고를 뛰어 넘어 절대의 하나되는 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에 나아가는 길은 오직 사량분별의 마른 지혜로 안되고, 절대 안목을 가져다 주는 참선뿐 없습니다. 생사의 길이 급한데 우리는 어디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급히 급히 공부할 일입니다. 歷千劫而不古요 且萬歲而長今이라 몇천 겁을 지나도 옛스럽지 않고 만세를 흘러가도 바로 이 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