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 지향하는 희망은 또 이런 것이다. 물론 그것은 깨달음이 되겠지만 준비는 보리심을 내는 데서 시작된다. 희망도 내 안에 있으며, 그 준비도 내 안에서 시작한다. 깨달음은 보리심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는 명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밖에서 구해질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생은 보살에 기대어 부처를 바라보며 깨달음을 구하고 있으니 서산에 해는 걸리고 갈 길은 구만리가 창창하다. 오늘의 준비가 있으므로 내일 희망이 있는 것이다. 희망이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의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양식이기는 하겠으나, 준비하는 사람의 희망이 더더욱 의미가 있는 것은 누구도 그 한 치의 앞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본래 잃어버린 것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찾는고. 從來不失이어늘 何用追尋고. 깨달음을 등져 불심에서 멀어지고 由背覺以成疎하고 하찮은 분별심으로 본래 면목을 잃는구나. 在向塵而遂失이라, 가산은 점점 멀어만 가고, 갈림길에서 길을 잃으니 家山漸遠, 岐路俄差이니 얻고 잃음이 치열하고 시비가 칼날같이 이네. 得失熾然하고 是非鋒起로다. 곽암칙 화상廓庵則和尙이 심우尋牛의 첫 구절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심우라 하여 소를 찾는 것에 비유를 하였으나, 본시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고,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나선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는 중생은 무엇을 찾아 나서고 어디에서 헤매는가. 선禪이 지향하는 희망은 또 이런 것이다. 물론 그것은 깨달음이 되겠지만 준비는 보리심을 내는 데서 시작된다. 희망도 내 안에 있으며, 그 준비도 내 안에서 시작한다. 깨달음은 보리심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는 명제는 이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밖에서 구해질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중생은 보살에 기대어 부처를 바라보며 깨달음을 구하고 있으니 서산에 해는 걸리고 갈 길은 구만리가 창창하다. 내 집을 놔두고 길을 떠나 갈림길에 섰으나 어느 길을 선택한들 나의 산과 들로 갈 것인가? 갈림길에 선 나그네는 길을 택해 떠나지만 뒤를 돌아 집으로 돌아가느니만 못한 일이다. 길을 택해 나선 나그네는 볕이 길어져 봄이 온 것을 알았다. 아직도 추위는 봄볕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이미 예봉이 꺾인 동장군은 그 허울뿐인 뒷모습뿐이니 기세라 할 것도 없다. 단지 몇 분이 길어졌을 뿐인데, 길어진 잠깐의 그 볕을 두고 우리는 봄이라 한다. 그 짧은 볕을 담아 대지는 몸을 덥히고, 땅 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제 온기를 토해낸다. 봄은 이미 서슬 퍼렇던 겨울 들판에 내려앉아 어떤 살결보다도 더 곱고 부드러운 기운으로 변화시킨다. 그 변화에 놀란 작은 생명들은 언 땅 속 겨우내 묻혀 있다가 태양의 온기를 아버지로, 대지의 기운을 어머니 삼아 생명을 틔어내기에 여념이 없다. 중생의 눈에는 아직 그 생명의 기운이 보이지 않겠으나, 봄은 이미 안 보이는 곳에서부터 분주하다. 봄은 이렇게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지만, 중생의 삶은 표피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봄이야 아직 시작도 못해봤으니 아직은 산책하기에 적절한 때는 아니다. 낮의 바람도 그러한데, 밤 산책은 아직도 예리하다. 하지만 세상일에 지친 이마를 식히는 예리한 찬바람은 얼마나 상쾌한가. 이불해(1529~?)의 <예장소요도曳丈逍遙圖>는 산중처사의 산책을 표현한 그림이다. 봄볕이 올라온 오후라 해도 맞고, 새벽길 산책이라 해도 어울릴 법한 그림이다. 지팡이 끝을 밤하늘의 별에 맞춘 선비라면 또 어떠한가. 그림 속의 선비는 많이 나서지도 않았다. 먼 산은 눈 앞에 펼쳐져 있지만 이제 막 출문하여 그 산중의 고요와 자유스런 공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선비가 끌고 있는 지팡이는 몸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소요길에 친구일 뿐이다. 그래서 지팡이를 짚었다 하지 않고 지팡이를 끈다 하였던 것이다. 지팡이를 끌고 나선 길이니 그 길이 조급하지도 않을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엽서보다도 작은 그림이다. 작은 그림을 만났지만 큰 공명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불해는 이 작은 그림 하나에 여백만으로 온 산을 다 담고, 우주 속을 산책하는 선비의 마음을 담았으니 조선 후기 화가이자 선비인 윤두서尹斗緖가 그의 평론집격인 《화단畵斷》에서 그의 그림은 해박하고 정밀한 점에서는 안견安堅보다는 못하나 활달한 맛은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논하였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느 날 황벽희운 화상이 일찍이 대중을 흩으시고, 홍주洪州 땅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물고 계셨다. 이때에 상공 배휴 거사가 어느 날 절로 들어오다가 벽화를 보고 그 절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들을 그린 그림입니다.\" \"고승들의 겉모습은 여기에 있지만, 고승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절 주지스님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배휴가 이곳에 선승은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한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상공은 마침내 대사를 청하여 뵙고, 전에 주지스님에게 물었던 일을 스님께 여쭈었다. 그러자 대사가 불렀다. \"배휴!\" \"예!\' \"어디에 있는고?\" 상공은 이 말 끝에 깨치고 대사를 다시 청하여 개당설법을 하시게 하였다. 이 활활한 우주 중에 내 이름을 불러줄 것은 그저 내 자신과 진리뿐일까. 스승이 있어 이름을 불러주면 또 그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오늘밤 나도 지팡이를 한 손에 끌고 별빛 속으로 나서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