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스님


햇살이 포근한 오후, 천도재 입재를 마친 스님이 고요히 앉아 차를 드시며 숨을 고르신다. 달큼한 찻내가 햇살에 스며드니 눈 돌린 찰나가 감개무량하다. 전국을 돌며 매일 법문을 하셔야 하니 걸음을 바지런히 옮기느라 힘드시진 않을까 싶은데 스님은 괜한 걱정이라며 손사래 치신다. 세속에 있었으면 정년퇴직해서 눈총 받는 뒷방 늙은이나 됐을 나이인데 바쁘게 다니니 건강에도 좋고 적적함도 달랠 수 있다고.
“법문을 많이 다니지만 불교를 믿는 근본 목적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수십 년동안 불교를 믿은 신도들도 불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이 스님 법문을 들으면 이것이 불교라 하고 저 스님 법문을 들으면 저것이 불교라 하는 형국이라며 스님은 불자들이 불교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성을 증득하고 깨달아서 내가 내 영혼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종교가 불교지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스님은 ‘칠불통계七佛通戒’ 안에 불교가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제악막작諸惡莫作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중선봉행衆善奉行 모든 선을 힘써 행하며, 자정기의自淨其意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시제불교是諸佛敎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죄 안 짓고 살기 어려운 이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진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목적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닦는 데에 있지요.”
그렇기에 스님은 가장 쉬운 종교가 불교라고 말씀하신다. 불교 이외의 모든 신앙은 절대자의 힘에 의해 구원을 받는 타력신앙이다. 그러나 불교는 스스로 노력하고 수행해서 내 자성을 스스로 깨닫는 자각의 종교다. 그래서 불교는 오직 나만이 내 영혼을 구제하고 제도할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닦아나가면서 바로 보는 것을 견성이라 하지요. 견성 했으면 깨달아서 제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돼가지고 내가 나를 몰라요.”
우리는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를 나인 줄 알고 산다. 그러나 나라고 믿고 살아온 물질적인 육체는 내가 갖고 온 것도 아니고 본래 내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잠시 입고 사용하는 몸뚱어리일 뿐이다. 그러니 몸을 위해 일생동안 업만 짓고 사는 중생인 것이다.
“참 나를 유혹하며 즐겁게 해달라는 이 몸뚱어리를 길들여서 수행하는 도구로 활용할 줄만 알면 장부이지요.”

스님과 앉아 있는 동안에도 갖가지 망상이 들락날락한다. 밤길에 산을 내려갈 걱정도 스치고 어제 만났던 이들도 다녀가고 문밖의 바람소리도 들어와 몸을 들었다 놓고 공양주 보살이 가져다놓은 지짐이 내음도 맴돈다.
“좌복에 앉아 있어도 화두를 놓치고 망념하고 놀아나면 마구니 소생일 뿐이지요.”
화두는 주인이고 망상은 객진인데 망상이 주인인냥 좌복에 앉아 있으니 서둘러 놓쳤던 화두를 챙긴다.
“이놈을 쫓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망념이니 내가 망상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화두만 챙기면 돼요. 남의 의자에 앉았다가 주인이 오면 비켜주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참 공부꾼은 오매일여(寤寐一如) 물 흐르듯이 화두가 순일해야 어떤 경계에 부딪치더라도 홀연히 내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눈은 뜨고 있어도 몽중을 헤매고 있어 깨어 있기보다 잠든 시간이 긴 중생이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과연 오매일여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리운 사람 못 잊는 걸 오매불망(寤寐不忘)이라 하잖아요. 그런데 수행에는 어찌 오매일여가 안 되겠습니까. 나와 나 자신이 싸우는 것이 참선이고 수행입니다.”

스님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행자 생활을 떠올리면 남 안 보는 구석에서 혼자 울던 것과 마루 닦던 생각 두 가지 뿐이란다. 은사 스님은 어린 스님에게 매일 법당 마루 닦는 일을 시키셨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데도 스님은 또 닦으라고만 하셨다. 먼지 한 점 없이 닦으라고 하셨지만, 바람이 불고 사람이 드나드니 늘 먼지가 조금씩이라도 남았다. 그러니 하루에 스무 번도 닦고 서른 번도 닦았다. 은사 스님은 용돈도 한번 안 주셨다. 돈을 쓸 줄 알아도 안 되고 돈이 있어도 안 되는 것이 스님이라고 하셨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야 은사 스님은 말씀하셨다.
“마루 닦으면 깨끗하지? 사람의 마음도 그와 같아.”
마음 닦는 것이 불교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스님이 너무 어려 문자로 가르치긴 쉽지 않으니, 닦으면 깨끗해진다는 것을 마루 닦는 것으로 일러 주셨던 것이다.
“마루를 깨끗이 닦았을 때 얼굴이 비치듯이 마음의 거울이 깨끗해졌을 때 본래 모습이 환하게 비춰 보이는 것이지요. 은사 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참 감사해요. 우리 스님은 물질적인 것은 하나도 안 물려 주셨어요. 닦으면 깨끗해진다는 가르침, 이게 내 살림의 전부예요.”
그래서 묘허스님도 상좌들에게 늘 한 가지 살림을 내어주신다. ‘답게’살라는 것이다. 스님은 스님의 본분만 잊지 않고 살면 된다는 말씀이다. 남 보기에 그럴싸한 스님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스님이 스님다워야 자기에게 떳떳한 수행자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다만 상좌스님들께만 내어주는 살림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답고 선생은 선생답고 제자는 제자답게 사는 것. 살아가는 데에 있어 그 외의 또 어떤 살림이 필요하겠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답게’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정진입니다.”

묘허스님은 천도재에 대한 법문을 주로 하신다. 천도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행해야 할 것이라며 그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입었던 옷이 떨어지면 새 옷 갈아입듯, 새로운 육체를 받아서 덮어쓰고 나오는 것이 생이고 몇십 년 사용하다가 너무 닳아서 쓸모없어졌을 때 벗어던지는 게 사거든요. 그렇게 우린 육도윤회하는 것이지요.”
윤회전생을 하는데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를 중유(中有)라고 한다. 극히 선한 자는 바로 극락으로 가고 극히 악한 자는 바로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이 세상엔 극선자도 극악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생동안 선업, 악업, 그리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기업으로 한량없는 업을 짓는다. 그러니 중유는 지은 업을 가려 내생을 확정짓는 49일의 기간인 것이다.
“천도재는 조상들의 좋은 업은 미래 생에 반영이 되게 하고 나쁜 업은 닦아주는 것입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시식(施食)을 하는 것은,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들의 이름으로 중음신들에게 법식을 베푸는 것이지요.”

명에 따라 죽지 못 하고 비명횡사하는 경우엔, 육체에 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염부에 가서 윤회전생을 하지 못 한다. 세상에 나올 육체가 없으니 허공에서 떠돈다. 그 중음신들을 도량으로 불러들여서 우리 조상님들의 이름으로 잔치를 벌여 베풀어 먹이는 것이다.
“그때에 스님들이,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니고 생사가 본무하다는 것을 일러줌으로써 영가들의 생에 대한 집착이 툭 끊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고통 받던 중음신들이 제도가 되고 그 공덕이 우리 조상에게 갑니다. 그것이 천도재를 지내는 이유이지요.”
그래서 묘허스님은 조상들의 천도재를 오래도록 지내주라고 하신다. 그런데 천도재를 올리는데는 경제적인 부담이 있으니 방곡사에선 신도들이 모두 모여 매달 천도재를 올린다. 그래서 오늘 입재를 마치고 신도들이 모두 빠져나가느라 부산스러웠던 것이다. 그 사람들 틈에서 뛰어노는 열살 무렵의 아이들이 보인다. 스님과 살갑게 부대끼는 모습이 궁금해 여쭈니 절에서 함께 사는 아이들이란다. 그러면서 스님은 내일은 며느리를 보러 갈 참이란다. 오래 전에 키운 아이들 셋이 있는데 모두 훌륭하게 자랐단다. 그 중 한명이 내일 결혼을 한다며 스님은 정말 며느리를 맞는 시아버지처럼 흐뭇하게 웃으신다.

스님이 처음 도락산 자락에 방곡사를 지은 것은 여생을 공부하며 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상좌들과 그의 도반들이 인사를 하러 와선 모두가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스님으로써 응당 해야 할 일이라며 스님은 그 뜻을 따라 무문관을 짓기 시작했다.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도록 독립된 하나의 별채로 된 방갈로식 무문관을 열 채 지었다. 집은 다 지어졌으나 아직 개원은 하지 않았다. 공부하는 스님들을 완벽하게 뒷받침 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다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11하안거를 성만한 묘허스님이니만큼 젊은 스님들의 공부방을 만드는 것에 세세히 마음을 다하신다. 그래서 내년에나 방부를 들이게 되지 않을까 하신다.
“여기 무문관이 잘 돼서 참 좋더라는 인식이 생겨서 능력 있는 스님들이 이런 수행 공간을 많이 만들었으면 하는 게 내 원이에요.”
참선은 유식한 자든 무식한 자든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든 늙었든 젊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며, 참선이야말로 가장 빠른 길이라는 말로 스님은 떠나는 나를 배웅하신다. 돌아서는 내 걸음이 여북하셨는지 스님은 한 말씀 하셨다.
“사람마다 숙업(宿業)이 있어요. 그것에 끄달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게 수행인 줄 알고 끄달리며 사는 사람이 많지요.”
나는 한량없는 업을 지으며 또 어디로 가는가, 떠도는 영혼처럼 나는 나를 보지 못하고 어디서 나를 찾고 있는가, 걸어걸어 산을 내려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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