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를 향해 가는 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솜털처럼 가볍게 흩날리던 눈발이 경북 성주쯤 들어서니 제법 굵어진다. 차를 몰아 가야산 계곡 깊숙이 들어가니 도로가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눈은 운전자에겐 재앙이나 여행자에겐 행운이다. 난 운전자 대신 여행자를 택한다. 해인사 일주문에 도착하니 눈발이 현판을 가린다. 우산은 있으나 그냥 눈을 맞으며 걷는다. 도시에 있을 때 눈이 내리면 당연히 우산을 썼으나 산사에 와서는 눈을 우산으로 막는 게 왠지 불경(不敬) 같다. 일주문과 봉황문, 해탈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온통 눈 천지다. 대적광전 앞마당에 서 있는 3층석탑과 석등의 머리가 하얗다. 신라시대 때부터 저 자리에 있었으니 머리가 하얗게 셀 만도 하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으로 올라가다 문득 돌아보니 해인사의 지붕 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절집은 무채색의 세계로 변했고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하나가 마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한 듯하다. 해가 지자 기온이 급하게 내려간다. 금세 손발이 시리다. 법고가 울리고 저녁 예불을 마친 스님들이 어두컴컴한 절 마당으로 나와 눈을 쓸고 내일을 대비해 여기저기 염화칼슘을 뿌린다. 이 추운 밤 스님들의 노고가 고맙고 미안하다. 스님들이 그저 선방에 앉아 수행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울력도 하고 노동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늦은 저녁 잠자리로 향하는데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텅 빈 마당에서 스님들의 독경이 깊고 넓고 나지막이 울려온다. 박용래 시인의 <저녁눈>이란 시가 생각난다.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