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사월은 돌담밭마다 유채가 그 노오란 꽃등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홉살 때쯤인가. 내가 유채의 꽃등 같은 초롱이를 처음 만난 것은. 까마득한 전생 같이 여겨지는 갈래머리 어린 시절 어머니 손 잡고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를 찾아갔을 때쯤이라고 기억된다. 법화사는 11세기 중엽 제주도 최대 최고의 절로 추정되는 거찰이다. 이제 옛날의 웅장했던 모습으로 복원불사가 한창이지만 그 당시에도 이 곳은 꽤 이름있는 절이었다. 그 날이 마침 사월 초파일 밤이었던지 절마당 가득 꽃등의 들판이었다. 그때 나는 등의 의미를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어머니더러 초롱이 조롱조롱 달려있다고 하며 아주 신이 나서 절마당을 뛰어 놀았다고 한다. 마치 유채가 노오란 등을 밝혀놓은 유채밭을 헤집듯이. 이제와서 생각해 보면 그 초롱이가 나의 가슴에 시심(詩心)을 노오렇게 묻힌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때부터 난 사월 초파일이면 어김없이 절을 찾아가는 엉터리 신도가 되었다. 조롱조롱 초롱이가 좋아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외숙모의 도움으로 해인사 용탑에 가는 인연을 얻게 되었고, 그 곳에서 고암 큰스님을 뵙게 되면서 불심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되었다. 고암 큰스님은 나의 어린 가슴에 부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일깨워 주신 분이시다. 그 때 그 분의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인과응보였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인과응보는 잘 되면 내탓 안되면 조상 탓이 아니고, 안되면 내 탓 잘 되면 조상 탓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원인은 내가 심은 만큼 받는 것이다. 착한 씨를 심으면 착한 열매를 악한 씨를 심으면 반드시 악한 열매를 얻게 된다. 어쩌면 ‘인과응보’는 내가 그 숱한 고난의 길을 헤쳐 오는 데 큰 정신적 지주가 되었지 싶다. 구십년대의 첫해인 올해에도 어김없이 초파일은 온다. 절마다 무슨 불야성을 이루듯 다투어 등이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저 등들의 의미는 내가 어렸을 적 보았던 조롱조롱 초롱이가 아니라 마치 무슨 흥정의 대상물만 같다. 오천원이나 만원짜리 비싼 등을 불전에 달면 복을 많이 받고 헐한 등을 달면 복을 그만큼 작게 받는다는 이기주의적인 심리의 불빛들로만 비쳐지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엉터리 신도임에 분명하지만 적어도 내가 존경하는 부처님께서는 등의 흥정과는 사뭇 그 거리가 멀리라. 첫째, 부처님은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왕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온갖 것 다 버리고 출가를 하셨다는 사실과, 둘째, 그의 대정진력이며, 셋째는 신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던 선각자이면서도 인간 석가로 남았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점이 내가 불교와 인연을 맺고 시를 쓰면서 살아가는 마음의 자양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차라리 부처님 오신 날에 등의 흥청, 동의 불야성은 너무나 이기주의적이어서 신도의 한 사람으로 차라리 서글프다. 적어도 내가 어렸을 척 보았던 초롱이의 의미는 이 세상 모든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힘을 가진 그런 등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 불전에 내어 다는 등은 외부에 요란스럽게 비쳐지는 일회성 요식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빈자일등(寶者一燈) 무량복전이라 했던가. 즉 마음의 동을 밝혀야 복을 받는 것이리라. 작게는 내 자신의 등을 밝혀 자아(自我)를 완성하고, 고뇌에 찬 이웃들의 길을 밝혀주면서 크게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과 악함을 광명의 세계로 이끄는 등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등을 달려면 어느 노스님의 말씀처럼 베개를 베지 않고 자는 고행의 슬기가 필요한 것이리라. 인간의 마음은 나약하고 간악한 것이어서 아무리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도 조금만 환경이 편해지면 한없이 편해지고 싶은 욕망이 든다. 앉으면 눞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본능이나 다름이 없을 터다. 그래 우리는 올해 부처님 오신 날만큼이라도 진정으로 보시하는 마음으로 하나씩 등을 밝히자. 아무리 내가 험한 고행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 고행만큼이나 성축해졌다. 여승 세상일 두 손 위에 춧불로 사르는 여인 열두폭 밝히는 소리마다 꽃은 피고 번뇌로 딱이는 문턱엔 관음으로 오르는 향 나는 피안의 세계를 건너는 뗏목이고 싶다. 등 하나 매어 달 돈이 없는 빈자일지라도 그들을 광명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뗏목이고자 한다. 그 일을 다한 뒤에 부처나 나 자신을 버려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지금 지구촌에는 민주화의 꽃을 피우려는 신나는 몸짓이 한창이다. 공산주의가 침몰하고 냉전의 장벽들이 하나하나 허물어지면서 화해와 협력의 새 역사의 강을 펼쳐 놓고 있다.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그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독일인들은 벽돌보다 먼저 이념의 장벽들을 허무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보람찬 역사의 열매이다. 우리도 이제 우리의 마음 속에 쌓여 있는 이념과 불신의 벽돌을 하나씩 허물어야 할 때이다. 북한도 세계의 급속한 민주화 물결의 소용돌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올해의 사월 초파일은 그런 마음의 벽돌을 하나씩 허무는 계기가 되는 날이었으면 참 좋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빈자일등의 자세를 가지고 등을 밝히면 그 빛은 부처님의 자비로 어두운 북녘땅을 밝히리라. 제주의 봄은 유채들이 그 노오란 꽃등으로 불전을 밝히고 있는 것만 같다. 빈자의 마음도 불자의 마음도 하나의 간절한 소망으로 취해가고 있다. 죄와 선은 자신이 만들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더러는 환하게 웃기도 한다. 이 좋은 봄날엘랑 제발 우리의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자. 더 이상 서로를 헐뜯고 질시하는 일은 없기로 하자. 저 유채 밭의 소망이 하나의 큰 물결로 일렁이는 것처럼 대자연의 섭리를 배우며 먼저 나 자신부터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자. 인과응보라고 했듯이 올해 부처님 오신 날 우리는 불전에 어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할지 서로 의논하는 슬기와 지혜를 가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