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방법으로서의 선(禪) - 비교의 관점에서

조계종은 선종으로서 선(禪)을 종지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수행방법으로 선만을 내세우지 않고 기도와 염불과 같은 다양한 수행방법을 아울러 채택하고 있다.
선이 조계종의 종지이며 최선의 수행방법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하려 든 일이 없는 것일지 모른다. 오랜 전통과 거대한 권위 때문일까. 그럴는지도 모른다. 사판(事判)은 말할 것도 없다. 일을 하면서도 일은 그 자체로서 의미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방에 가야 하는데’ 따위의 변명아닌 변명의 말을 한다. 경(經)을 가르치는 강사는 한 단계 낮은 단계로 생각하고, 기도, 염불 주력 같은 것으로 종교적 경험을 얻었으면서도 선을 둥에 업고 선사의 칭호를 바라고, 부처님 전에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면서도 그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마땅히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가져도 좋은데 말이다. 무엇이나 다 방법대로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선이 만능은 아니며, 선은 선대로 바라는 세계가 있고 취하는 길이 있듯이 기도는 기도대로 구하는 세계가 있고 방법도 있는 것이다.
선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선의 권위나 위신이 실추된 일면도 있고 근대화됨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비난도 적지 않다. 특히 보살의 이상을 표방하고 정토와 민중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사회나 정치에 참여할 것을 주장하는 쪽에서 선에 대해 강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선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선원 운영이나 수좌들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느낌이다. 곧, 선의 타락에 대한 지적이나 선도 좋고 중요하지만 사회적 참여도 필요하다는 정도에서 그치고 마는 비판이다.
보살의 이상이 정토를 추구하는 데에 있다면 수행방법의 문제뿐만 아니라 행위양식에 관하여서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정토신앙과 선을 조화시키려는 무수한 선사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논리적 일괄성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실패였던 것같다. 오히려 정토신앙의 대상을 방편화시키거나 유심(唯心)으로 환원시킨 것은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한걸음 후퇴한 것일 뿐이다. 차라리 신란이 아미타불을 절대화하고 정토왕생에서 철저히 자력의 길을 막고 타력의 문을 연 것이 신앙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발전된 형태일 것이다.
선이 어째서 최선의 수행방법인가. 선을 통한 방법에 대한 확신도 없이 선이 갖고 있는 권위를 무작정 쫓는다든지 내가 좋아하니까 하는 식의 막연한 태도를 벗어버리면 그렇게 간단하게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성향이 다르고 바라는 결과가 다르다. 그러므로 개인의 능력과 이상에 따라 길이 선택되어야 한다. 교체신교는 필요에 따라 신이 바뀌는데, 그 신에 따라 종교적 제의도 달라지는 것과 같다.
수행방법들을 서로 비교하거나 우열을 따질 때에는 개인의 근기(根氣)나 성향에 따른 선택의 문제도 있지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가늠하는 가치 평가의 문제도 있다.이를테면, 사람의 정신적 기능은 감각, 감정, 사고, 직관으로 나뉘는데, 감각이나 감정이 앞선 정(情)적인 사람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로서의 또는 감정적으로 만족한 상태로서의 천국이나 극락을 이상으로 하는 반면, 사고나 직관이 앞선 지(知)적인 사람은 진리나 정신의 평안함을 추구하고 열반을 종교적 목표로 삼는다. 정적인 사람이 감각이나 감정의 요소를 주 기능으로 사용하여 극락이나 천국을 희구할 때 취하게 되는 일반적인 벙법이 주술이나 기도이며, 지적인 사람이 열반을 추구할 때는 명상이나 선을 채택하게 된다.
주술이나 기도에서는 물(物)적이든 신(神)적이든 대상을 필요로 한다.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능력을 가진 신앙의 대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존재의 힘에 의지하여 계시나 가피(加被)를 입어 이 세계나 죄에서 구원되고자 한다. 그러나, 명상이나 선에서는 절대적이고 인격적인 대상에 의지하기보다는 궁극적인 원리나 진리를 체득하는 수행을 통하여 해탈을 이루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그래서 기도의 방법에서 요구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인격적인 요소가 선적인 방법에서는 오히려 방해 요소가 된다. 신앙의 면에서는 절대적일수록 또 강력할수록 더 좋은 신(神)적인 것을 선의 수행방법에서는 철저하게 배격한다. 이를테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에서는 계시받은 내용이 구체적일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선에서는 어떠한 깨달음의 내용도 부정한다.
원시불교나 선에서는 신적인 인격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그러나 ‘부처님’, ‘보살님’이라 할 때에는 신적인 인격적인 요소를 갖게 되며, 대승불교에서는 신앙적인 종교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불교는 무신론적인 종교이다. 불교가 신앙화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후퇴이고 타락이다. 사실 인도라는 만신(萬神)의 지역에서 무신론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이것은 불교로서 존립할 수있게 하는 생명이기도 하다.
신의 존재는, 이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의 문제이긴 하지만, 증명할 길도 없고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의 신이며 최고의 신이라고 주장할 이무런 근거도 없다. 또, 내가 받은 계시의 내용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인지 판판한 길도 없으며, 나에게 계시를 내련 신이 선신인지 약신인지 알 수도 없다. 신에 따라 계시의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고, 같은 신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계시를 주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내가 받은 계시만이 유일하게 옳은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 역사를 돌아보면 신적인 대상의 절대화가 독선이나 배타의 감정을 낳았고 또 신의 이름으로 진리의 이름으로 범한 과오가 하나둘이 아니다.
선의 수행방법에서는 어떠한 신적인 대상이나 관념적인 내용도 갖지 않는다. 한치의 송곳 꽂을 땅도 있어서는 안 된다. 객관화되는 일체의 대상도 부정하지만 깨달음도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의 우상화나 관념적인 내용의 절대화가 만드는 병폐나 한계성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런 점에서 선은 최선의 수행방법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수행방법을 청원태, 희구태, 체주태의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청원태는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초자연적인 힘을 벌어 성취시키려는 주술적인 형태을 말하고, 희구태는 종교적 신조나 신의 은총으로 일을 성취시키거나 자기자신을 재편성시키려고 노력하는 기도적인 방법을 말하며, 체주태는 주도 객도 없는, 신도 나도 없는, 신과의 합일을 체험하려는 신비주의적 경향이나 선적인 깨달음을 말한다.
이 체주태는 가장 발전되고 세련된 수행방법으로서,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체험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체주태적인 체험은 청원태적인 종교적 기적이나 희구태적인 환상이나 황홀감보다 종교적 가치를 창조하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근원적인 힘을 상실한 종교는 시체와 같이 되고 종교제도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의지할 신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체주태적인 수행방법은, 그것이 세련되고 발전된 방법이긴 하지만, 쉽게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라는 일반인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방법이다. 그래서 이 방법은 일상적인 아닌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 상근기(上根氣)의 사람에게만 가능하고, 하근기(下根氣)의 말세 중생에게는 아미타불의 명호만 외면 미타의 본원(本願)에 의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타력의 문이 강조된다.
기도적인 방법과 선적인 수행방법의 차어는 사회적인 행동양식에서도 달리 나타난다. 기도적인 방법에서는 이상적인 세계로서의 극락이나 정토가 저 세계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개인적인 윤리 및 선(善)이 강조된다. 그리고, 정토가 이 세계에서 실현되어야 한다고 현세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이 세계에서 정토를 이룩하려고 사회 개조에 힘을 쓰고 사회적윤리 및 정의가 강조된다. 그러나. 선(禪)의 방법에서는 이상이 현재에 있긴 하지만 사회의 구체적 개조가 아니라 종교적 가치를 실현시킴으로써 이 세계가 있는 그대로 정토가 된다고 본다. 깨우치면 부처요 깨우치지 못하면 중생일 뿐이다. 양(量)의 문제가 아니라 질(質)의 문제인 것이다. 선의 방법에서는 깨달음만이 행위나 가치를 결정하는 종교적 경험이나 진리가 으뜸가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제도가 아니라 인간의 태도 변화만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선의 방법에서 의지할 신도 깨달음의 내용도 없다는 것이, 선에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일변도 있지만, 바로 선의 가장 큰 강점이 된다. 신적인 대상은 우리에게 안정을 주지만 이것은 노예로서의 안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줄지언정, 우리가 자유롭게 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게 한다.
그리고, 깨달음이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이 세계의 다양한 가치관들 사이에 있는 갈등을 해소하는 최선의 길일 터이다. 길이 없음은 안경 없이 세상을 볼 때처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며 최선의 행위를 하게 한다. 보리(菩提)는 본디 나무가 아니고 명경(明鏡) 또한 대(臺)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대지로서 모든 것이 서는 기반이 되니, 또, 소나무는 소나무로 참나무는 참나무로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로그인 PC버전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GnuBoard Mobile G4M.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