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생활이 편하고 단조로우면 좀 따분해지십니까? 하루하루가 단조롭다는 것은 그만큼 큰 걱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할 텐데요, 더욱이 요즘 같은 초봄이면 슬슬 춘곤증이 시작되면서 단조로운 일상의 지루함이 더욱 부각될 수도 있겠지요. 게다가 물 오른 나물이며 과일에 입맛이 돌아 살이 쪘다는 둥, 뭐 화끈한 이벤트라도 있어야 살맛이 나지 않겠냐는 둥 그야말로 배부른 투정들이 슬슬 나올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아무 시장으로나 향하여 봅니다. 내 사는 곳과 가까운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 시장. 자, 싸요, 싸요, 싸요! 한 장에 삼 천원!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무렵까지 손바닥이 다 닳도록 박수를 쳐가며 떨이 옷을 파는 아저씨, 상인들의 삼시 세끼를 이고 지고 시장 골목을 누비는 밥집 아주머니, 가벼운 어른 무게의 원단을 번쩍 들어 오토바이에 싣고 나르는 퀵 서비스 아저씨들, 백 원이라도 더 싸게 물건을 떼어가느라 새벽을 지새며 지방에서 올라온 옷가게 젊은 사장들, 그들을 통제하며 덩달아 밤을 새는 주차장 아저씨들과 국수 말아주는 포장마차 할머니…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열심히 사는 이들을 왕창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장입니다. 가까운 할인 마트에 나가봐도 풍경은 다르지 않습니다. 마감세일입니다, 두부 한 모에 ○○원, 제주산 감귤이 반관에 ○○원! 목이 쉬도록 외치는 비정규직 청년들이 있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둔 반찬을 큰애가 잘 챙겨 먹었을까 걱정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야간직 주부사원이 있습니다. 응, 이제 마지막 화장실 거울 닦는 중이여.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며 마트의 화장실을 깨끗이 치워주시는 실버(고령) 사원은 동료 할머님과 야식 약속이라도 하시는가 봅니다. 요는, 모두들 열심히 삽니다. 일전에 한 번 언급한 적 있지만, 평안도 출신의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평생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교훈을 주신 분입니다. 일하는 만큼만 먹어야 한다는, 정말 삼팔따라지 같은 교훈을 나와 동생이 꼬마였을 때부터 늘 말씀하셨습니다. 꿈 많은 의대생으로 공부만 하다가 갑자기 한국 전쟁은 났고, 조혼으로 얻은 아내와 큰 아들만 데리고 빈손에 남으로 왔던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안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평생에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많이도 하셨답니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엘리트나 선비가 되는 것도 좋은 삶이겠지만, 사람은 몸을 쓰고 땀을 흘려야 밥맛을 안다. 제 주위에 이런 분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엄마, 엄마는 손톱이나 다듬고 드라마나 보고 골프나 치는 그런 사모님의 삶을 거부했습니다. 두 자식과 사업하는 남편의 완벽한 내조를 삼십여 년, 흡사 프로페셔널 매니저와 같이 세 가족을 위해 당신의 힘과 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식 둘이 다 제 분야에서 밥값을 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안주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당신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작은 가게를 여느라 휴일이 없이 목수들과 씨름을 하고, 꽃 도매시장에서 화분을 사다 날라 직접 주변을 심고 가꾸고, 직원들의 고민거리 들어주랴, 알바 생들 진학 상담 해주랴, 아주 바쁘게 삽니다. 지난 주말에도 남편과 잠깐 친정에 들렀는데, 엄마는 또 뭔가를 열심히 만들고, 집 안의 꽃을 다 내다 다듬고 하며 바쁘고 있었습니다. 엄마, 일요일도 없어? 엄마가 무슨 대기업 영업사원이야? 했더니 얘, 놀면 뭐 하니. 놀면 좋은 줄 알지? 몸이 한가하고 고민이 너무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하십디다. 흠, 이래서 시아버지의 생전 사랑을 독차지했던 거구나 생각하면서 집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저도 봄맞이 대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늘 곁에 있어주는 가족들, 늘 내 볼펜을 빌려가는 어눌한 옆자리 동료, 늘 같은 시각에 먹게 되는 밥 한 그릇이 야살한 봄햇살에 비하면 하품이 나도록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계절입니다. 밥 꼬박 먹을 수 있고, 내 할 일이 있는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이 옅어질 수 있는 때입니다. 잠깐 시간을 내어 교통카드 한 장 챙겨 들고 시장으로 갑시다. 세상에 나만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껴보십시다. 그리고 더 큰 힘을 내어 다음 계절 맞을 준비를 해보는 것입니다. 땀을 흠뻑 흘리며 일을 하다가 지친다고 느낄 때, 원기를 북돋는 음료 한 잔이면 행복이 멀지 않습니다. 십전대보탕이나 쌍화차 곡류를 갈아 만든 미숫가루도 좋겠지만 따끈하게 중탕으로 초콜릿을 녹여 만드는 핫초콜릿은 어떨까요? 고형 초콜릿을 액상으로 녹여 만들고, 따끈하게 데운 우유와 섞어 마시는 것이 전통 유럽식이랍니다. 너무 단맛이 날 것 같지만 일단 한번 드셔 보세요. 이 삼월이면 밸런타인데이다, 화이트데이다 해서 들뜬 이들이 초콜릿이나 사탕을 뿌려대며 사랑이 어쩌고 노래하지만, 정작 초콜릿의 열량이 필요한 이들은 땀 흘려 일하는 여러분들이니까요.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