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과 방법, 염불(念佛)에 관하여

1. 염불의 정의와 종류
‘염불(念佛)’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생각 염(念)자에 부처 불(佛)자로 이루어졌으니 말 그대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염불의 ‘염(念)’은 이제 금(今)자 아래에 마음 심(心)자를 놓은 글자로, 파자(破字)한 대로 살펴본다면, 마음을 현금(現金)에 잡아두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곧, 마음을 현실 상태에, 현재의 바로 그순간에 늘 매어두어 흔들리지 앟게 하는 것이 ‘염(念)’의 뜻이다. 과거의 마음도 이끌어 와서 현재의 한 순간에 놓아두고, 미래의 마음도 미리 당겨와 현실 속에, 현재의 한 순간에 놓아두는, 시간을 초월한 상태가 곧 염(念)이다.
마을을 현재의 한 순간으로 집중시킨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온갖 덕상(德相)을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생각하며 잊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가호(慈悲加護)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염불의 ‘염’자는 억념(憶念)의 뜻을 지니고 있다. 억념이란 ‘기억하다’, ‘기억하는 상태’를 뜻하는 한편 ‘잊지 않다’, ‘되돌이켜 생각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지니다’의 뜻도 함께 갖고 있다.
‘염불’이나 ‘선(禪)’, ‘기도(析禱)와 같은 한자어들은 그 글자마다 지니고 있는 뜻이 바로 그 글자가 쓰이고 있는 뜻을 충분히 반영한다. 이를테면, ‘선(禪)’이란 글자를 파자하여 보면 보일 시(示) 변에 홑 단(單)자를 붙인 글자로 뜻은 示 변에 있고 單은 소리값을 지닌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자. ‘보일 시(示)’와 ‘홑 단(單)’이 합쳐져 이룬 뜻은 무엇일까. “있는 모습 그대로(單), 사물을 바로 보라(示)”의 뜻으로 풀어볼 수 있겠다. 선에서는 사량(思量)이나 분별(分別)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떠한 것도 가미하지 않은, 덧붙이지 않은, 있는 모습 그대로의 순수함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선(禪)이 지니고 있는 뜻이다. ‘기도(祈禱)’도 마찬가지다. 기도의 ‘기(祈)’는 보일 시(示)변에 도끼 근(斤, 자귀 근이라고도 함)자로 이루어졌는데, 도끼니 자귀니 하는 것은 나무를 쪼개로 패고 찍고 깍는데에 쓰이는 연장이다. 쪼개고 패고 깍는다는 동사는 모두 이 연장의 예리함을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곧, 기도의 기(祈)는 예리함을 기구(祈求)하는 것이므로 지혜의 원만구족(圓滿具足)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도(禱)’는 보일 시(示)변에 목숨 수(壽)자를 붙인 자로서 ‘오래 사는 것’, ‘복덕의 구족’을 뜻한다. 그리하여 이 두 글자가 합쳐져 이루어진 ‘기도’는 결국 ‘지혜와 복덕의 구족’ 곧 ‘양족(兩足)’을 뜻한다 하겠다. 이 두가지를 원만하게 구족한 분을 ‘양족존(兩足尊)’이라 이르면 곧 부처님을 가리킨다.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을 두루 구족한 분이다. 지혜와 복덕의 구족이 복도(福度)와 혜도(慧度)의 완성이며 이것이 곧 육바라밀의 완성인 것이다.
아무리 복덕을 갖추었어도 지혜가 없으면 완전한 삶을 살 수가 없고, 지혜가 있어도 복덕이 없으면 요절하거나 가난하거나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이나 그리스도가 요절한 것, 안회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모두 지혜는 있으나 복덕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는 지혜와 복덕의 원만구족을 염원함이다.
본디의 명제인 ‘염불’로 다시 돌아가자.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어떠한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어느 부처님이나 다 좋은 터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특별히 염불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아미타불’이다. 부처님을 생각함은 부처님께로 귀의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으로 아미타불 앞에 ‘귀의’를 뜻하는 ‘나무’를 덧붙여 ‘나무 아미타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열심히 되뇌이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염불 가운데에서도 ‘칭명 염불(稱名念佛)’이라 한다. 곧,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만덕상을 생각하는 염불이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로 번역되듯이, 무량의수명 곧 ‘영원한 생명’이며, 무량의 빛 곧 ‘영원히 꺼지지 않는 찬란한 생명의 불꽃’이다. 따라서 ‘나무 아미타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찬란한 생명의 불꽃, 그 광명에게 귀의함을 뜻한다. 아미타불을 무량수불이라 번역하면 복덕이 좀더 강조되고, 무량광이라 하면 지혜가 더 강조된다. 그런 차이 때문에 번역하지 않은 채로 그냥 ‘아미타불’이라고 염송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다음에, 부처님의 만덕상을 생각하는 것을 ‘관상염불(觀想念佛)’이라 한다. 부처님은 여래(如來), 응공, 정변지, 선서(善逝)를 비롯한 여러 이름을 지니며 또한 불(佛)이며 세존(世尊)이시다. 이러한 이름들은 바로 부처님의 덕상을 형용하는 말들이니, 관상염불은 그러한 공덕의 신상(身相)을 관념(觀念)하고 상상(想像)하면서 그와 같아지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또, ‘법신염불(法身念佛)’이 있다.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고도 하는 이 염불은 부처남의 법신 곧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이체(理體)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법신염불은 이른바 실상염불이라고 불리는 만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칭명염불은 하근(下根)을 위하여 그리고 관상염불은 중근(中根)을 위하여 있는 것임에 반하여, 이 법신 염불은 상근(上根)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유명한 고승인 목우자(牧午子)스님 곧 보조국사는 그가 쓴 책 ‘염불요문(念佛要文)’에서 염불을 다음과 같이 열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곧, 삼업 (三業)을 잘 다스리는 염불로서 계신(戒身)염불, 계구(戒口)염불, 계의(戒意)염불들이 있고, 사위의(四威儀) 속에서도 늘 잊지 않는 염불로서 동억(動憶)염불, 정억(靜憶)염불, 어지(語持)염불, 묵지(黙持)염불 들이 있고, 그밖에 부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는 관상(觀相)염불, 무심삼매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심(無心)염불, 진여의 근본 이법(理法)을 바탕으로 한 진여(眞如)염불 들이 있는데, 염불은 이와 같이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인 모든 면에서 그리고 어묵동정(語黙動靜)의 온갖 위의(威儀) 속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중국의 근대 정토계의 고승인 관본(觀本)법사는, 그의 수필 향광각(香光閣)에서, 스물여넓 명의 고덕(古德)들이 저마다 다른 염불 법문을 제창하였음을 들고 있으니, 곧, 여산혜원으로부터 천태지자, 광명선도, 장안법조, 영명연수, 강공망유 등을 거쳐 중봉국사에 이르기까지가 소개되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중봉(中峰)국사는 삼시계념 (三時繫念)의 염불 법문을 세워 수행의 이정표를 세웠다. 여기에 소개된 것은 염불의 종류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밖에도 꽤 많은 종류가 있다.

2. 염불에 의한 수행빌법과 공덕
지금까지는 염불의 본 뜻과 종류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제 어떠한 방법으로 염불수행을 이루어나갈 것인지를 보기로 한다. 사실 염불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염불 그 자체가 어떠한 신체의 동작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맨먼저, 가장 많이 알려진 ‘칭명염불’에 대해 살펴보자. 한 손에 염주를 들고 조용히 앉아, 향을 사르고 참선하는 자세나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서 염불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 석가모니불도 좋고 아미타불도 좋다.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약사여래불, 미륵존여래불, 문수보살도 좋다. 자기가 택한 하나의 명호를 열심히 부르며 그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를 되새겨 듣는다. 그러면서 소념(所念)으로서의 부처님과 능념(能念)으로서의 염불자자 서로 하나가 되는 공부를 계속한다.
둘째로, ‘관장염불’은 부처님을 모신 앞에서나 아니면 부처님상을 모시지 않아도 좋은데 역시 편하고 반듯한 자세로 앉아 부처님의 온갖 덕상을 상상해나간다. 곧, 부처님이 갖춘 서른두 가지의 뛰어난 특징과 여든 가지의 미묘한 모습을 관하고, 그러한 상호(相好)가 있게 된 근원 공덕을 생각하고 자신도 그와 같은 공덕상을 갖추기를 염원하는 공부다.
세째로, ‘법신염불’도 우선, 위의 칭명염불과 관상염불에서처럼, 조용한 자세로 앉아 염불하는 것이 온갖 위의에서 항상 끊이지 않게 염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고요한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상근기라면 더더욱 그러한 것을 따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불교의 수위단원에까지 피선되었던 서 대원(徐大圓, 1910~1945)은 일찌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부르면 부를수록 부처도 나도 없다.
불(佛)과 내가 구공(俱空)커늘 천지인들 있을소냐.
진대지 우주(盡大地 宇富) 안에 아미타불 소리뿐.

염불의 공덕으로 능념자와 소념자가 하나가 되어 온갖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할 때 그것이 곧 깨달음이며, 깨달음을 얻을 때 바라밀이 완성된다. 이것은 결코 작은 공덕이 아닐지니, 이보다 더 큰 공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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