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의 틈새로 밝은 내일

흔히, 인구밀도와 문맹률이 세계 으뜸이고 국민소득이 가장 낮은 나라로, 해마다 ‘사이클론(폭우와 해일)’이 몰아쳐 숱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땅으로, 혹은 배 곯아 아우성치는 아이들을 떠올리며 그다지 반갑지 않은 얘기거리로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방글라데시.
143,998㎢ 땅덩어리에 어림잡아 1억 2천만명(글을 모르는 사람이 80%를 웃돌아 올바른 숫자를 낼 수 없는 형편)의 ‘몽골 드라비다’ 핏줄을 이은 사람들이 대부분 회교를 받들며
쌀과 사탕수수·파인애플·담배 등 먹거리 중심의 농사로 힘들게 살고 있는 방글라데시.
인디아가 영국의 식민지로 먹혀 있을 무렵 인디아의 지배를 받던 서뱅골주와 자연히 운명을 같이했고, 그뒤 1947년 인디아-파키스탄 분리독립 때 힌두교도가 많았던 서쪽은 인디아로, 회교도가 많았던 동쪽은 파키스탄으로 각각 편입되어 파키스탄이 되었다.
그러나 동 ·서로 나눠진 2개의 파키스탄은 회교라는 종교의 공통점을 빼고 나면 본디 전혀 다른 인종·언어 ·지리 ·문화를 갖고 있어 하나가 되기 힘들던 터에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골 깊은 차별을 받게 되었고, 이것이 1970년 12월 파키스탄 제헌의회 선거를 계기로 ‘맹골민족주의 운동’으로 불타올랐다.
동파키스탄을 터전 삼은 아와이 연맹은 제헌의회에서의 과반수 획득을 바탕으로 전면적인 자치권 이양을 요구했으나, 서파키스탄을 대표하는 야하 정권은 오히려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탄압했다.
급기야 아와이 연맹은 1971년 3월 26일 인디아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인디아의 도움을 받아 약 8개월에 걸친 독립전쟁을 펼쳐간다.
이 과정에서 인디아-파키스탄 싸움으로 불리워졌던 전쟁은 인디아군의 데카 침공으로 막을 내리고, 1971년 12월 16일 마침내 탈종교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형 개발을 앞세운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2월 3일 밤 10시, 데카의 지아 국제공항.
시설과 규모로 볼 때 새로 짓기 전의 영등포역과 비슷한 국제공항 모습이나, 국제선 여객기가 내렸음에도 기껏 6∼7명의 외국인만이 입국절차를 밟고 있는 풍경 속에서 오늘의 방글라데시를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뜻밖의 외로움과 긴장에 싸인다.
마침, 핵발전 관계회의 참석을 위해 왔다는 한국 학자를 만나 즉석에서 찬·반 핵논쟁을 벌이며 서로 위안이 되는 듯했으나, 잠시 공항안내소를 돌아오니 함께 갈 것을 힘주어 말하던 사람이 온데 간데 없다.
오그라드는 가슴을 안고 공항문을 조심스레 나서는 순간, 떼지어 손을 내미는 20여 명에게 둘러싸인다. 당당함을 짜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틈새를 비집고 나갈 즈음 옆구리에 섬찍한 날카로움이 느껴진다.
굳어버린 등 뒤로 어린아이가 조그만 칼을 디밀고 “유우 에스 달러”를 외치고, 둘러선 사람들은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고 있다.
다행히 돈이 한푼도 없다는 시늉을 이해하는 듯해 손수건 1장과 볼펜 몇 자루를 던지고는 재빨리 택시에 몸을 꾸겨 넣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택시 운전사마저 수상히 여기며 호텔까지 오는 동안 불안에 떤다.
그래도 한편으론 손수건과 볼펜 몇 자루에 고이 돌려 보내준 소년의 순박한 모습에 고마움을 느낀다.
이렇게 해서, 하룻밤 5달러 가량의 잠자리만 찾아들던 여느 때와는 달리 처음으로 35달러짜리 고급호텔(방글라데시에서는 특급호텔인 셈)에 묵게 된다.
바퀴벌레 등쌀에 놀라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난 아침이지만, 지난밤의 날카로운 충격 때문에 쉽사리 호텔문을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 주저하다 조심스러이 한발짝씩 거리로 나선다.
놀란 마음은 사람들이 다가오기만 해도 움츠러들고 이내 경계심으로 바뀐다.
아직은 사회 모든 분야가 ‘자유전쟁(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정식 이름)’ 때 힘을 빌린 인디아의 절대적인 세력 안에 놓여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지만, 데카 거리를 지나다 보면 곳곳에 막스, 고르바쵸프 사진을 앞세운 소련의 정책과,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정책을 찬양하는 벽보가 어지러이 함께 나붙어 있어, 오늘날 방글라데시가 부딪히고 있는 예민한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방글라데시가 내건 비동맹노선의 충실한 쫓음이라기보다는 이웃한 어느 강대국에도 치우치지 않고 견뎌내고자 하는 아슬아슬한 몸부림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방글라데시를 돌아다니는 동안, 온갖 어려움과 괴로운 현실속에서도 방글라데시 민중들의 놀라운 생명력과 결코 어둡지 않은 내일을 똑똑히 바라본다.
이러한 방글라데시 민중들의 튼튼한 삶의 의지는 바로 ‘자유전쟁’에서의 승리가 힘줄기임을 알게 된다.
독재박멸을 부르짖는 글귀와 사망자·실종자들 사진으로 빈틈없이 메워진 데카대학 마당에서 만난 미술연구소 학생이 던진 “독립전쟁에서 이긴 우리들이다. 까짓 독재정권 쯤이야……”라는 확신에 찬 한마디가 바로 민중들의 뜻과 솟아나는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체신공무원들의 파업현장이나, 독재정권의 끝장과 자유로운 언론·출판을 외치며 길바닥으로 뛰쳐나온 언론인·출판인들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올바른 세상을 향한 민중들의 힘줄이 어디에나 뻗어 있음을 보고 짙은 감명를 받는다.
물론, 미술연구소 전시관에서도 마찬가지의 감격을 한다.
작품들이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거의 중국화와 서양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그 정신만은 철저히 현실에 바탕 둔 사실주의를 쫓고 있어 그림들로부터 오늘 방글라데시의 꾸밈없는 참 모습을 가장 정확히 배우게 된다.
전시관 안의 모든 그림들은 어김없이 말을 건네온다.
‘우리의 현실이 예술지상주의에 놀아날 수 없고, 어설픈 낭비를 할 때도 결코 아니다. 물감도, 종이도, 연필도 모두 어려운 민중들의 참 뜻을 살피고 밟은 세상을 열어가는 무기로 쓰여야 한다.’
그렇다. 작품수준의 높고 낮음을 누가 함부로 어떤 기준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타골이 노래했던 ‘우리들의 황금 뱅갈’이 수사를 즐겨 썼던 시인의 말이라고만 할 수 없음을 간추린 결론에 대신한다.
민중의 뜻을 따르는 어질고 밝은 정부를 세우고, 모두가 ‘물’을 잡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함이 절대로 급한 과제일 터이지만, 다른 한편 풍부한 수자원과 3모작이 가능한 들판이 널려 있고, 민중들의 굳센 의지가 솟아나는 땅, 살아 있는 문화, 살아 용트림하는 대학, 건강
한 지식인들이 버티고 있는 한 방글라데시는 더 이상 콜레라·말라리아·결핵의 본산지로 껍데기만 화려한 나라들로부터 비뚤어진 멸시의 눈초리를 받지 않아도 될 날이 머지 않았으며, 곧 역사의 앞머리에 나서게 되리라 굳게 믿으며 방글라데시 민중들에게 존경을 보낸다.박물관에 걸려 있는 한 장의 포스터가 가슴깊이 맺혀진다.
70년대 초,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UN에 호소하던 글귀.
‘지금 우리 방글라데시를 도와주세요. 잊지 않고 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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