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와 태전

인간탐구라는 과제
한유韓愈(768-824).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제 일인자로서 고문운동의 주역. 배불排佛의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그는 792년 진사로 입신하여 관리생활을 시작한 이래 802년 사문박사四門博士, 808년 국자박사國子博士, 816년 중서사인中書舍人, 823년 어사대부御史大夫 그리고 824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한유는 관리로서보다는 고문운동을 주도한 제 일류의 문인으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학부흥운동의 주역을 자처한 그의 주변에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 있어서 일종의 문학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문운동이란 육조六朝 이래의 형식과 기교에 넘치는 화려한 문체를 버리고 진한시대의 소박한 문체로 복귀함으로써 살아있는 인간탐구의 정신을 되찾자는 운동이다. 한유와 그의 제자 이고李 (?∼844)는 유교의 도통설道統說을 새롭게 제기하고 고문운동을 주장한다. 한유는 그 시대의 유교가 오경五經의 훈고주석訓古註釋에만 치우쳐 진정한 공맹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통해 새로운 유교적 인간상의 탐구를 주장한 것이다. 즉 한유의 고문운동은 단순히 문학개혁운동이 아니라 유교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사상적 운동이었던 것이다. 고문운동의 주역으로서 한유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漢 이후 여러 유학자들은 공맹의 말씀을 구구하게 수정하고 보충하여 백 개의 구멍과 천 개의 상처를 냈으니 수시로 어지럽고 수시로 잃어버림이 많았다. 그 위급함이 마치 하나의 터럭으로 천균千鈞을 끄는 것과 같으며, 실날처럼 겨우 면면히 이어졌으나 점차 쇠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에 석가와 노자를 떠들썩하게 외치어 천하의 대중들을 고무시켜 그 도를 좇게 하였다. 오호라! 그것은 심히 불인不仁한 것이다. 석가와 노자의 해독은 양주와 묵적을 넘는다. 나의 현명함은 맹자에 미치지 못한다. 맹자는 아직 없어지기 전에도 그것을 구제할 수 없었으나 나는 이미 무너진 후에 그것을 온전히 하고자 한다. 아, 아! 그것 역시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였고 또 자신의 위험을 당하매 죽음으로써 그것을 구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그 도가 나로 하여금 대략이나마 전하게 하였으니 죽어 없어질지라도 길이 한이 없도다.「창려집昌藜集」권18.
이처럼 한유는 육조수당六朝隨唐 기간 흥성했던 불교와 도가의 위세에 눌린 유교의 경세정신과 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불교의 중국 전입 이전의 중국 고유의 학문, 문화에의 복귀를 의미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한유는 고문으로서 고도古道를 밝히고 고문운동으로서 불교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유의 고문운동은 당대의 문학 혁신일 뿐만 아니라 불교비판운동과도 상호 관련성을 보여준다. 유교부흥의 주역을 자처한 한유는 배불론자였다. 송대宋代 신유교新儒敎의 사상적 선구자로서 한유는 유교의 진가를 현양하고 도가와 불교의 사상적 오류를 논증하기 위해「원인原人」,「원도原道」,「원성原性」과 같은 일련의 저작을 남겼다. 그가 고문운동의 기본명제로 제기한「원인原人」곧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유교의 새로운 인간탐구의 과제로 등장했으며 인간성의 근원에 관한 주제를 중국철학사에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유와 동시대에 활동한 화엄과 선의 대가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 또한 한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인간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탐구를 시작한다. 종밀의 초기저작「원인론原人論」은 한유의 새로운 인간상의 고양에 맞서서 불교적 인간의 근본문제를 제시한다. 이와 같이 한유와 종밀에게서 보여지는 인간탐구의 정신은 당대 선불교의 화려한 전개가 빚어낸 시대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쓴 한유
819년 정월 당의 제11대 황제 헌종은 섬서성 봉상현 법문사에 봉안되어 있던 석존의 지골指骨을 궁중에 맞아들여 삼일간의 대대적인 의식을 행하려 했다. 이에 한유는「논불골표」를 써서 이를 제지하려고 한다. 그는 황제에게 올리는「논불골표」에서 이렇게 쓴다.
불법이 중국에 들어오고 난 뒤 불법을 섬긴 제왕은 그 수명이 길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이렇게 하옵시는 것을 보고서는 장차 폐하께서 불도를 섬기심이라 여기고서 모두 \"천하의 큰 어지심도 일심으로 공경하고 믿으시는데 백성이 무엇이라고 신명을 아낀다는 말인가?\"하고 정수리에 향을 사르고 손바닥에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는 등 불교신자의 고행을 행하며 수백,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의복을 벗어 내고 돈을 모아 조석으로 시주하고 서로 본받아 오직 늦을까 걱정하니 백성들의 가업이 파산하고 말 것입니다.
한유의 이와 같은 입장은 단순한 종교 비판의 선을 넘어서 정치, 경제적으로도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가 무엇보다도 불만스러웠던 점은 승려 지주 계층의 작대한 재산축적이었다. 즉 그가「논불골표」에서 썼듯이 \"천하의 재물 칠팔 할이 불교사원에 몰려 있을\" 정도의 비대한 사원 경제와 인습적이고 무기력한 당시의 도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유는 사상적으로도 정치 경제적으로도 철저한 불교 비판자의 노선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를 받는 왕조는 단명했다\" 라는 주장은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사형에 처해질 위기를 벗어났으나 결국 819년 52세의 나이로 형부시랑刑部侍郞에서 조주潮州(廣東)자사로 좌천되고 만다. 당시 광동은 콜레라와 말라리아가 만연하는 지역이었으며, 당문화의 이방지대였다. 한유는 이때의 비탄스러운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한 통의 상소上疎
아침에 구중궁궐에 올렸더니
저녁에 조주潮州로 쫓겨나
팔천리 먼 귀양길 떠나네.
그러나 한유는 이 좌천을 통해서 선불교를 접촉하고 장안의 화려한 당탑가람堂搭伽藍이나 불골숭배만이 불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태전과의 해후
한유를 선의 회랑으로 초대한 인물은 태전太顚(732∼824), 그는 육조혜능의 선을 고고하게 계승해 온 고봉정상의 선승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1)의 제자이다. 혜능 이후 선의 전개는 강서, 호남의 시대로 옮겨진다. 양자강 남안의 곡창지대로 무대를 옮기는 것이다. 마조는 강서로 나갔으며 석두는 남악에 남았다. 남악회향南岳懷讓(677∼744)의 법을 이은 마조가 강서로 진출하여 백장, 황벽, 임제로 이어지는 홍주종의 선을 개화시킨 데 비해 석두는 남악의 옛도량을 지켰다. 즉 마조는 십자로두에 나가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고 석두는 고봉정상의 생애를 보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제자도 없다. 그러나 석두의 가게는 순금만을 파는 진금포眞金鋪였다. 약산藥山도 태전도 그렇지만 석두계 선승들은 세간을 무대로 삼기보다는 산상의 고독 속에서 수십 년 간 칩거하며 오로지 심법의 수행에만 전념하는 생애를 보내고 있다. 한유는 바로 석두계의 고고한 가풍을 계승한 선승 태전과 조우하고 있는 것이다.「조당집」제오권은 한유와 태전의 만남을 이렇게 그린다.
한유가 조주에 이르자 곧 좌우의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도덕이 높은 선승은 없는가?\" \"태전화상이라는 선승이 계십니다.\" 한유는 태전화상에게 세 차례나 사람을 보내어 대면을 청했다. 그러나 태전은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한유의 좌천이 부처님의 광명을 부정했기 때문이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전은 한유를 스스로 찾아갔다. 한유는 태전을 만나 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 차례나 초청해도 오시지 않더니 이번엔 어째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셨는지?\" 태전은 대답했다. \"세 번 초청해도 오지 않은 것은 시랑(한유)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요, 부르지 않아도 온 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위해서일 뿐.\" 시랑은 이 말을 듣고 짚이는 바가 있었다. 자신이 장안에서 불골의 광명을 부정했기 때문에 유배되어 왔다는 사실을 고하고 이렇게 물었다. \"제자가 그때 부처님의 광명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치에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아니라면 무슨 광명입니까?\" \"그 광명은 하늘·용 등 팔부 신장과 제석·범왕 등이 부처님의 덕화를 돕는 광명입니다.\" 이에 한유는 말한다. \"그 때 서울에 스님 같으신 분 한 사람만 있더라도 제자는 이리로 귀양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유는 다시 물었다. \"부처님의 광명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님의 진정한 광명입니까?\" 태전은 한유를 불렀다. 한유의 대답이 지나간 뒤 태전은 말한다. \"보시오. 보셨지요?\" 한유는 당황했다. \"제자는 이러한 경지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태전은 이렇게 설법한다. \"이 경지를 알면 그것이 진정한 부처님의 광명을 체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도는 한 가닥으로서 청황적백이 아니건만 수미산을 꿰뚫고, 산강 땅덩이를 두루 비추건만 눈으로 보거나 들을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으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부처의 광명을 알면 온갖 범부, 성인이라는 허깨비가 홀리지 못합니다.\"
시방관통十方貫通의 심법이 발하는 광명
이렇게 태전은 한유의 심지를 넓혀 주고 있다. 궁극적인 가치를 빛, 곧 광명으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관성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빛을 절대화시키고 물체화시켜서 또 다른 빛과 그늘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다. 그늘을 동반하는 빛은 오히려 갖가지 차별을 낳는다. 아무리 종교니 사상이니 하더라도 물체화된 빛의 감각과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한 인간의 모습과 차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태전은 한유가 부정했던 불사리의 광명이란 붓다의 길을 비추는 물체화된 빛일 뿐, 심법의 광대한 법칙이 발하는 무형무상의 광명이 아님을 자상하게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평생 곧은 성격의 관리로서, 학자로서 살아왔던 한유도 자신의 심지가 너무 좁음을 느꼈다. 그가 비판했던 불교는 화려한 외형外形만을 추구하는 세속적인 불교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유는 자신이 쓴「논불골표」가 불교의 심연에 대한 이해 결핍 때문에 튀어나온 성급한 비판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수도 장안에서 먼 변경 지역의 좌천생활을 통해, 변경 지역의 산중에 은거하는 한 선승을 통해서 중당中唐 이후의 선불교가 표방하던 자주적인 인간관에 공감하게 된 것이다. 그 공감은 현실과 체계를 넘어선 인간 그 자체의 근원적인 종교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당대 선불교가 선종교단만의 불교가 아니라 한 시대의 자주적인 인간정신을 고양시켜온 압도적인 인간신뢰의 사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체제나 잉크 문화에 오염된 인간의 심성을 회복하자는 선불교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한유 자신의 고문운동의 정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유배지에 체재하던 한유는 어느 날 태전을 뵈러 갔다. 태전은 물었다. \"산 구경을 왔는가?\" \"산 구경을 왔습니다.\" \"그렇다면 유산장游山杖을 가지고 왔겠군.\"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공연히 와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태전은 심지心地 투철한 선승. 한유는 상리유통尙理有通의 문체를 고집한 유가이다. 산에서 짚는 지팡이 한 개에서 시방관통十方貫通의 심법心法을 철견하고 있던 태전은 지금 하유에게 무엇을 설시設示하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깨달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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