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 철학자들은 종종 “인간성의 말살 시대”라고들 한다. 이 말은 누구나 듣는 말이면서 모두가 방관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다 아주 가끔은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며 이 시대를 탓하기 이전에 이 어둠의 시대를 자초한 우리들, 즉 나의 문제로 돌려보려고 한다. 영화 “미션”은 특정한 종교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참 삶의 모습을 제시해 준 작품이라고 생각할때 그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무대는 18C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식민지 영토의 경계인 과라니족이 사는 곳에서 시작된다. 남미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제수이트 신부들은 모진 순교와 고난 끝에 과라니족을 감화시켜, 정글에서 끌어내다가 근대적 영농을 하는 마을로 발전시키고 교회를 세우는 데에 성공한다. 신부들 중에는 멘도자라고 하는, 한때는 과라니족을 포함한 원주민을 잡아 노예로 파는 노예 상인으로서 악명이 높았던 신부도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기의 유일한 혈족인 동생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결투로 동생을 죽인 후 고뇌하던 즈음에 가브리엘 신부를 만나 구원을 얻고 그 신부와 함께 과라니족의 마을에서 인간다운 참 삶을 시작한다. 한편, 유럽 한 구석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새로운 영토 분배선에 따라 과라니족이 건설한 마을은 무신론자가 조종하는 포르투칼 왕의 식민지로 편입되게 되며 과라니족과 신부들은 이에 불응한다. 교황은 추기경을 보내, 제수이트 신부들을 설득해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결국은 제국주의의 불의와 맞서 싸우게 된다. 물론 힘이 약한 과라니족의 죽음으로 전쟁은 종식된다. 중재를 맡았던 추기경은 보고서에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몇과 과라니족의 죽음으로 끝났읍니다만, 사실은 죽운 것은 저 자신이고 저들은 영원히 살아 남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말입니다”라고 씀으로써 인간의 정의가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양심의 심판을 하게 된다. 이제 이 영화 속에서 느낀 바, 세가지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인간과 종교와의 관계이다. 이 점은 특히 주인공 멘도자의 삶의 변화 속에서 감동받은 것인데, 그의 구원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가 동생을 살해한 후 삶을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신부 가브리엘을 만나 구원의 실마리를 잡게 되면서 그는 신부 일행과 함께 예전에 노예 사냥을 하던 과라니족의 마을로 떠난다. 그 곳을 가는 데는 지역적으로 험난하여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에 손수 무거운 돌을 메고 자신을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 돌을 벗겨 주면서 환영하는 원주민들을 얼싸안으며 처음으로 환희의 통곡을 한다. 그는 이제 한 동족이 된 것이다. 신이 부여한 선한 양심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우리는 잠자고 있는 양심을 찾아야 한다. 즉 신성(종교성)과 인간성과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합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웃과 더불어 살고자 할 때 종교는 살아 움직일 수 있지않을까. 둘째, 영화 속에 나타난 멘도자와 가브리엘 신부의 삶의 자세이다. 이 부분은 주로 제국주의의 불의와 교황청의 위선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데, 멘도자의 경우 그는 십자가 대신에 무기를 가지고 직접 나가 싸우다 전사한다. 반면 가브리엘 신부는 신도들과 함께 예배를 본 후 묵묵히 그들을 이끌고 교회당 밖으로 십자가를 들고 무저항의 저항을 하다 죽어간다. 투쟁의 방법은 다를지언정, 그들의 목적은 사랑과 평화를 끝까지 지킨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본다. 얼핏 보기에 전자의 삶은 적극적인데 반해 후자는 소극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해석이 아닐까 싶다. 지금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혁명적인 투사만을 요구하지는 않는가. 무저항의 저항 속에서 인간의 양심을 부르짖는 자에게 어중간한 타협이라는 굴레를 씌우지는 않는가. 이제 우리는 참 인간다움을 잊게 만드는 제도와 이데올로기 등을 양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두 사람의 투쟁의 방법 속에서 지혜롭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세째, 종교인의 진지한 사회적 참여이다. 암울한 시대에 빛을 비춰줄 수 있는 자는 진리를 알고 행하는 자라고 생각했을 때 그것은 주로 종교인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개인의 내세 지향적인 구복 신앙에서 탈피해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 구조적인 모순을 바로 고쳐나갈 수 있어야할 것이다. 그랬을 때에 그 신앙은 힘이 있고 신앙인은 참된 양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의 진지하고도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지금 이 시대야말로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