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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행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한두해의 수행을 하고 나서도 수행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다. 수행에 자신을 갖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순수한 진리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가까이 살펴볼 때 지혜는 싹터서, 모든 순간 모든 장소가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다. 나무는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과일을 맺음으로써 우리에게 진리를 말해 주지만, 우리는 단지 꽃과 과일의 겉모습만 볼 뿐이다. 나뭇잎이 시들어 땅에 떨어지고 새잎이 돋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진지하게 관찰하고 살펴본다면 나무의 출생과 우리 자신의 출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무가 싹을 틔워서 꽃을 피우고 열매맺는 특성을 지니고 있듯이, 육체의 모든 부분 또한 그 특성에 따라 변해 간다. 사람은 태어나 종래는 죽으며 또 다시 태어난다. 손톱이나 피부가 자라서 없어지고 다시 자라나는 것은 나무의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이거나 사물의 성질은 같다. 사물의 동질성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나무의 특성이 사람의 오온(五蘊), 즉 색(色, 형상) · 수(受, 느낌) · 상(想, 사고) · 행(行, 행위) · 식(識, 의식)과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오온은 끊임없이 변하고, 그 변화는 결코 멈춤이 없다. 서 있거나 걷거나 앉아 있거나 혹은 눕거나, 우리는 우리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마음을 살핌으로써 우리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모두 알 수 있으며, 일어나는 모든 사물들을 이해하게 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각하고 생각하는 것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 정신이 밝게 깨어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다양한 동물, 나무, 산 포도나무가 우리와 차이없음을 보며 가난한 자와 부자가 우리와 다름없음을 본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그들은 모두 같은 특성을 갖는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만족할 줄 알며 항상 부처님의 말씀과 함께 한다. 법을 깨닫는 것은 보이는 사물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의 성품을 아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모두 인연에 따라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이들은 쾌락과 고통, 행복과 불행이 그 특성에 따라 지나가도록 내버려 둔다. 깨달은 이는 무지와 탐욕을 떠나 있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것은 더러운 것을 그저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러움을 떠나 있다는 것은 연못 속의 연꽃과 같다. 연꽃은 지저분한 연못 속에 피어나지만 더러운 물과는 다른 것이다. 물은 오욕과 같고 연꽃은 교화된 마음과 같다. 수행자의 마음은 바로 연꽃과도 같은 것. 어느 장소도 거부하지 않고 바로 거기에 머문다. 선, 악, 행복, 불행, 옳고 그름을 수행자는 알아내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행복이나 불행, 그리고 그밖의 다른 작용들은 모두 그것들이 이 세계의 특색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바로 이러한 세상을 바로 보신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은 깨닫기 전에도 후에도 그에 관계없이 존재하였고, 손해니 이익이니 칭찬이니 비평이니 하는 것들도 그대로 있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없었더라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계, 정, 혜로써 중도를 취하라하셨고 그 길은 바로 이 세상의 속됨을 파괴하는 수행의 길이 된다. 칭찬과 이익, 명성, 행복이나 불행에 집착하는 세속적인 마음을 가질때 이 세계는 생겨난다. 욕망은 모든 세계를 탄생시키는 곳이며,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 세계는 단지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에, 속세의 진리-俗諦-를 참고 견딜 수 없는 수도자라면 진리를 알 수 없다. 우리의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속제가 우리를 방해하고 수도를 막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밝지 못할 때 마음은 무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지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지혜가 생기면 어리석음은 사라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의 수양을 쌓도록 가르치셨다. 세상이란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온갖 번뇌가 자리하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여덟 가지 바른길-팔정도-을 닦는 장소도 되기 때문이다. 고요히 선정을 닦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팔정도는 이 세상의 욕망의 사슬을 풀어준다. 수행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어떤 수행자들은 참선을 할 때 주위로부터 소란스런 방해를 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외적 동요를 피한다 해도 내적 동요는 마찬가지로 있게 마련이다. 수도란 동요 그 자체를 통해 동요를 없애는 길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 기간 동안 동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의 동요가 없다면 그대는 원하는 대로 먹고, 잠자고, 그대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하고 싶은 말을 할 것이고, 자신의 욕망이 잘못된 것도 모른 채 그대로 욕망에 따르게 될 뿐이다. 현세를 초월한 이는 세상의 욕구에 거슬러 산다. 바른 견해는 그릇된 견해와 맞서며 순수는 부정과 반대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망과 반대되기 때문에 우리 귀에 거슬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마음과 반대되며, 우리 욕구에 거스른다. 사람들은 탐욕과 미움에 빠져들고 싶어하나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사람들은 스스로 망상에 사로잡히고 싶어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은 망상을 파괴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은 세속적인 것과 반대된다. 세상 사람들은 몸뚱아리를 아름답다고 하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세상은 이 육체가 우리에게 속해 있다고, 실체라고 고집하나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이렇듯 바른 견해는 세상을 초월해 있고 세속의 흐름을 거슬러간다. 부처님이 성도하기 직전 부처님은 여덟 뭉치의 풀더미를 자리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수행하셨다. 여덟 뭉치의 풀이 실제로 의미한 것은 이 세상의 여덟 가지 진리, 즉 이익과 손실, 칭찬과 비난, 명성과 불명예, 행복과 불행이었다. 부처님은 그 위에 앉아서 삼매에 들어가셨다. 풀 위에 앉아 있는 행동 자체가 삼매였다. 부처님의 마음은 세상의 것 위에 있었고, 깨달음을 얻기까지 세상의 모든 번뇌를 억누르고 정복하신 젓이다. 진리를 깨닫고 번뇌를 완전히 물리칠 때까지 세상의 유혹을 억누르면서 부처님은 그 풀더미 위에 앉아 있었다. 부처님은 세상을 이긴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거의 신심이 없는 것 같다. 고작 일이년 정도 수행한 이들이 너무 성급하게 궁극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 6년 동안이나 집을 떠나 고행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5년의 수행 기간이 지나고야 깨달음의 첫단계에 오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5년의 시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의 수행을 의미한다. 열심히 수행한 이에게는 불, 법, 승 삼보가 언제나 귀의처가 된다. 단지 행동과 말뿐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깊이 삼보에 귀의한다면 삼보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수행에 의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아직도 자신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행복을 느끼거나 걱정스러워하면서 스스로 감정에 휩싸인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에 집착하지 말고 오온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포기하라고 하셨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온에 집착하여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은, 오온을 바로보거나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온을 우리 자신으로 그릇 알고 있다. 행복과 고통을 우리 자신으로 보며 우리를 행복이나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본다. 그 사실은 우리가 법을 보지 못했음을, 성품을 바로 보지 못했음을 뜻한다. 행복, 불행, 쾌락, 슬픔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아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 그것들을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속에 ‘나’를 고집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며, ‘나’를 고집하는 한 여러 감정들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라고 하는 고집을 부숴 버리라고 하셨다. 집착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 이 세상은 법칙대로 움직이며, 나무와 산 포도나무며 모든 생명은 자신의 고유한 성품에 따라 태어나고 사라진다. 진실되지 않은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다. 인간은 야단법석을 떨지만 자연은 초연하게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우리는 웃고 울고 서로 죽이기까지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진리로 남아 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육신은 그 본성대로 태어나고 자라고 항상 변화해 가며 나이를 먹는다. 육체는 그저 그 본성에 따르는 것뿐인데도 육신을 자기 것으로 고집하고 움켜쥐기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다. 물질적인 것이든 비물질적인 것이든 모든 것은 그 본성대로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탄생과 죽음이 계속되고 행복과 불행이 오고가도 진리를 본 이는 초연히 그것들을 지켜볼 뿐이다. 법을 볼 때까지 우리는 인내하고 자제하며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미 더 이상 게으르지 않다면 그때는 굳이 부지런해질 필요가 없을 것이며, 더 이상 기쁨과 슬픔에 좌우되지 않는다면 인내하는 공부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음이 이미 법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법이 하나가 되었을 때 수행은 끝나고 평안을 얻게 되며, 더 이상의 특별한 수행이 필요없게 된다. 안팎이 모두 법이므로 그 상태가 바로 법이며, 그 상태를 아는 것 또한 법이다. 모든 것이 하나이며 자유롭다. 이 본래 성품, 즉 법성(法性)은 태어남이 없다. 나이를 먹지 않고 병들거나 죽지도 않는다. 기쁘거나 슬프지도 않으며 크거나 작지도 않고 무겁거나 가볍지도 않다. 짧거나 긴 것이 아니며 검거나 흰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세상을 초연해 있는 상태는 다른 어떤 가치있는 것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세상이 미칠(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각자 그것을 볼 수밖에 없다. 언어를 초월해 있으므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단지 법을 깨닫는 방법과 수단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스스로 법을 본 사람, 그는 이미 그의 일을 마친 사람이다.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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