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줄기가 북으로 흘러내리다 문득 멈추어버린 곳, 오른쪽으로는 남태령고개를 펼쳐 수도 서울과 근기지역인 과천을 잇고, 왼쪽으로는 까치고개의 깃을 세워 봉천과 남현을 한껏 거머쥐고 있는, 아주 자그마한 고을, 거기가 남현동이다. 산세를 놓고 볼 때, 원각사 법당 뒷담까지 뻗어내린 관악산 자락은 영락없는 산의 남성적 심볼이다. 법당 좌측에 위치한 샘물은 물맛이 달기로 가히 천하의 일품이다. 이 물로 차를 달이면 물맛과 차의 향기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자연과의 합일을 느끼게 된다. 법당 앞의 후박나무는 33년 전 법당을 짓고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라는데, 오월의 그 경내를 진동하던 향취가 가시고 나니 지금은 마 치 40대를 넘은 여인의 성숙함을 대하는 것 같아 오히려 푸근함을 느끼게 한다. 감나무 ·벚나무 ·동백나무 ·산철쭉들도 이제는 성숙한 푸르름으로 도심지 속의 산사를 그대로 표현해 내고 있다. 낡고 바래어 쓰러져 가는 법당을 바라보면서 늘 마음에 한가닥 소원을 지닌다. 어서 번듯하게 법당을 새로 지어 부처님을 편안하게 모시고 싶다. 비가 새는 법당에 기왓장 하나 새로 이을 만한 경제가 못되는 원각사 처지에서는 지난번 다녀온 법주사의 청동미륵대불전과 자꾸 오버랩되어 떠오르지만 하는 수가 없다. 이땅의 천만 불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비맞는 부처님에게 기왓장 하나 새로 이어드릴 불자들은 지금쯤 어디메서 대기하는가. 부유한 사찰, 지체 높은 스님네게서 복을 구하고 있는 것인가. 글쎄 모를 일이다. 옛날 어느 선사(禪師)는 “작년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금년의 가난이야말로 진짜 가난일세. 작년은 하도 가난하여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더니 금년의 가난이여, 송곳조차 없어라〔去年窮未是窮 今年窮始是窮, 去年窮無卓錐之地, 今年窮錐也無〕”라 하였다. 내가 머물고 있는 원각사는 가난한 절이다. 가난하기에 생활의 넉넉함은 모른다. 먹고 사는 것이야 걱정치 않겠지만 비를 맞고 있으면서도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부처님이 고맙기만 하다. 열반에 드신 은법사(恩法師) 고암종사께서 “하루 세 끼의 밥이면 되네. 올바로 중노릇하려면 주지를 맡지 말게. 사람이 오지 않는 그윽한 골짜기 한적한 곳을 찾아 가난을 배워야 하네. 부처님을 배우는 것이 출가인의 할 일이지 교리를 배우는 것은 의미가 없네. 알겠는가.”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가난, 그렇다. 우선 가난을 배울 일이다. 하루 종일토록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 때가 한 달이면 스무 아흐레다. 한낮이 지나 점심공양이 끝나고 나면 무료한 시간이 흐른다. 방은 후덥지근하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조용히 가부좌를 맺고 앉는다. 만뇌가 구적(俱寂)한 가운데, 생각을 한 군데 모은다.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아이들 지저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온다.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선명하게 부각된다. 보고픈 얼굴들이 그 위에 오버랩된다.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흐르고 나니 아이들 지처럼도 이젠 사라지고 미운 사람, 보고픈 얼굴들도 어디론가 가버린다. 가끔씩 창밖의 미류나무, 후박나무 그림자가 방안을 노닐다가 간다. 하마 저녁땐가 조금은 선선한 바람도 인다. 가난도 없다. 정진하는 시간이면 부자가 된다. 온통 맑은 바람이 나를 위해 있다. 법당 뒷담까지 흘러내린 관악산 자락도, 푸른 하늘 드넓은 허공도 모두 나의 것이다. 내가 내게로 향한 정진 속에서 나는 모두를 얻는 부자가 된다. 차단된 공간에 연연하지 않고 열린 공간을 모두 소유한다. 특히 원각사가 좋은 것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 그 복장하고 화려한 도시에서, 도시의 혼탁한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되지만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어스름 초저녁부터 관악산 정상으로 연결된 밤하늘 별들의 행렬은 한가롭기만 하다. 산사의 밤하늘이나 시골의 밤하늘이야 다시 이를게 없지만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을 볼 수 있고, 특히 패를 젖히고 허공을 우러러볼 때가 있다는 것은 많은 일 중에서도 극히 드문 일일 게다. 저녁예불이 끝나고 선정에 드는 일은 하루일과 중에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자기와의 만남에서 넉넉함을 배운다. 고요히 명상에 잠김으로써 가난을 엎는다. 원각이 어찌 먼 곳에 있으랴. 그렇다. 원각은 바로 당처에 있다. 아니, 당처 그 자체가 원각이다. 원각산중생일수(圓覺山中生一樹)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 비청비백역비흑(非靑非白亦非黑) 부재춘풍부재천(不在春風不在天) 원각산중에 자생한 한 그루 나무여 하늘 땅 나뉘기 전부터 꽃을 피웠네 푸르지도 희지도 검지도 않거니와 봄바람 푸른하늘 어디서도 찾을 길 없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깨달음인가. 그렇다. 깨달음은 ‘열림’이다. 열림이 깨달음이다. 꼭꼭 닫혀진 세계로부터 활짝 문을 열고 모두를 받아들임이다. 갇힌 세계를 온통 드러내 놓음이다. 깨달음이란 안팎의 공간이 하나로 됨이다. 본디 벽이 없음을 앎이다. 깨달음이란 어둠 속에서 헤어남이다. 눈을 감고 어둠 속을 방황함이 아니라 활짝 뜨인 눈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이다. 그러기에 ‘깨달음〔각〕’이란 ‘배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見〕’함이다. 배움은 지식에서 결말을 맺지만 체험은 완전한 자기 것으로 됨이다. 배움은 머리로써 이해함이요, 체험은 가슴으로 느낌이다. 머리와 가슴, 이해와느낌이 하나됨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에는 성격상 몇 가지가 있다. 자아의 깨달음〔自覺〕이 있고 상대를 깨달음〔覺他〕이 있으며, 자타의 완전한 깨달음〔覺滿〕이 있다. 1차적으로 자아의 깨달음을 실현함이 중요하다. 자아의 깨달음은 또한 스스로 깨달음이요 깨달음이 자기에게서 비롯됨이다. 그것은 또한 인(人)이 공함을 체험함이다. 2차적으로 상대를 깨달음이다. 상대를 깨닫는다고 함은 법(法)의 공함을 체험함이다. 그것은 또한 자아의 깨달음에 비춰 남을 깨닫게 함일 수도 있다. 1차적 깨달음이 아트만〔我〕의 깨달음이라면 이는 우주적〔梵〕깨달음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타의 완전한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충만함〔覺滿〕’이다. 인법(人法)이 함께 공함〔俱空〕을 깨달음이다. ‘원각(圓覺)’이란 바로 이러한 깨달음이다. 원각이란 부분적 깨달음이 아니라 전체적인 깨달음이다. 크고 작음을 내포한 상대적 깨달음이 아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모나면 모난대로 둥글면 둥근대로 그 존재의 실상을 그대로 파악함이다. 존재의 존재이유, 존재가치, 존재의 실상을 뚜렷이 이해하고 느낌이다. 원각은 언제나 넉넉하다. 원각은 언제나 족함을 안다. 족함 그 자체다. 배휴(裵休)거사가 쓴 「원각경소서(圓覺經疏序)」에서는 원각을 다음과파 같이 서술하고 있다. 보면, “중생의 본원이므로 심지(心地)요, 제불이 깨달아 얻을 바이므로 보리(菩提)며, 서로서로 융섭치 않음이 없으므로 법계(法界)다. 고요하되 항상 즐기우므로 열반(涅槃)이요, 탁하거나 결함이 없으므로 청정(淸淨)이며, 헛되지 않고 변치 않으므로 진여(眞如)다. 허물이 없으므로 불성(佛性)이요, 선을 드러내고 악을 그쳤기에 총지(總持)며, 안으로 갈무리하였기에 여래장(如來藏)이다. 지극히 그윽하므로 밀엄국(密嚴國)이요, 뭇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모든 미로를 사르지 않음이 없으며 홀로 빛나기에 원각(圓覺)이라 한다.” 하였다. 그러면서 그 모두는 일심(一心)을 설명한 것이라 한다. 이 원각을 등지면 범부요, 수순하면 성인이다. 원각을 모르면 생사(生死)가 시작되고, 원각을 알면 윤회가 끝난다. 원각을 가까이서 보면 지관정혜(止觀定慧)요, 확대하여 보면 육도만행(六度萬行)이다. 종일토록 원각파 함께 있으면서도 원각을 느끼지 못함이 범부요, 원각을 증득하고자 하되 아직 원각에 극(極)하지 못함이 보살이며, 원각을 구족하고 원각에 주지(柱持)함이 여래다. 원각을 떠나 육도(六道)가 없고, 원각을 버리고 삼승(三乘)이 없다. 원각이 없이 여래가 없고, 원각을 무시하고는 참법〔眞法〕도 없다. 삼세(三世)의 제불이 증득한 것이 원각이요, 여래가 이세상에 출현하심도 이 원각을 위해서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두가 다 이 원각을 설명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