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본래 이름은 무지無知이며, 과학하는 자세는 겸허함이어야 한다

감응感應. 마음이 무엇에 느끼어 움직인다는 말인데,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가끔은 쓰는 표현이다. 느낌, 감정 또는 정서적인 합일이라고도 풀이한다는 것을 허용한다면, 꽤 격이 높은 표현이다. 감응은 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상당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만이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종교적인 현상의 하나로 쓰이는 표현이다. 기도에 대한 감응을 얻었다, 이런 용례가 있을 것이다. 감응은 나와 타자의 구분이 지워지는 경이로운 경험이다.

과학과 비과학
종교를 과학과 대비하여 비과학의 세계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다. 자연과학 쪽에서 그런 경향이 강한데, 종교적 경험을 말과 글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객관화와 계통화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과학은 어떤 영역의 대상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계통적으로 연구하는 활동, 또는 그 성과의 내용. 특히, 자연 과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음󰡓이다.(<다음 국어사전>) 그러나 객관화의 어려움과 설명 불가라는 이유로 종교를 비과학이라고 폄하하듯 성격짓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종교와 종교 현상을 객관화, 계통화시키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의 과학(신과학)은 비과학의 영역을 객관화, 계통화하는 데에 이르고 있다. 과학의 진보는 󰡐감응󰡑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는 󰡐고구마를 씻어 먹는 원숭이󰡑 이야기로 소개돼 있다. 일본 큐슈에서 조금 떨어진 코시마라는 섬에서 원숭이들의 학습에 대한 실험이 진행되었다. 어느 날 원숭이들에게 진흙이 묻은 고구마를 먹이로 주었다. 한 원숭이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5년여의 시간이 지나서는 섬 전체의 원숭이들이 고구마를 주면 물에 씻어 먹었다. 원숭이들이 의사소통을 통해 물에 씻어 먹는 방법을 전파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원숭이들은 이 방법 역시 주위의 동료들에게 알렸다. 그런데 그 숫자가 100마리에 이르자 갑자기 핵반응이 일어난 것처럼 섬 전체의 원숭이들이 하루 만에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교류가 없는 이웃 섬의 원숭이들도 거의 동시에 고구마를 바닷물에 씻어 먹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들이 어떻게 전달된 것일까? 과학자들은 생명장生命場 이론, 생명체의 외부에는 에너지장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런 현상을 풀이한다. 생명장 이론은 과학의 영역을 넓히는 성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과학이 진리의 세계에 예배하는 결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예이다. 일찍이 종교의 영역에서는 감응이라는 현상을 경험했다. 감응은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특별한 경험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무지의 고백
과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밝히려 하는 것이다. 과학을 출발시킨 동력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과 세계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그 질서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이 종교의 영역에서는 애초에 있었던,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 허다하다. 생태계만 해도 그렇다. 생태계란 일정한 지역의 생물 공동체와 이들의 생명 유지의 근원이 되는 무기적無機的 환경이 서로 복잡한 상호 의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체계이며(<다음 국어사전>), 생태계의 구성과 유지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 생태학이다. 불교에서는 일찍이 중중무진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화엄철학華嚴哲學의 중심 사상이다. 만물이 서로 인연이 되고 있으며 상호 의존하고 있다고 하여, 전우주의 조화와 통일을 설한다.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涅槃 등이 서로 대립되는 현상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이며, 한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 전우주(一卽一切, 一切卽一)라는 뜻에서 이러한 세계를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 한다.]를 설파했는데, 환경위기를 대처하려고 노력하는 환경·생태론자들과 철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다.
이미 있는 사실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이 과학이다. 따라서 과학의 다른 이름은 인간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겸허함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의 진정한 발전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이며, 진리에 대한 예배이다. 그렇다고 과학을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지평을 넓히고, 사실을 구성하고 있는 원리를 원용하여 인간 생활의 편익을 증진하는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서구의 기계론적 과학은 한계를 드러냈다. 불가시세계로 관심을 넓히는 신과학은 그 유용성이 더욱 크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과학, 특히 자연과학은 대장노릇을 하려고 한다. 아마 과학적 발견이 물질적인 부를 보장해주는 보증수표와 같은 수단으로 전락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황우석 교수팀이 논문 조작의 우를 범한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대장노릇을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물질만능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5, 6월 우리 언론이 쏟아낸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기사를 보면, 황 교수팀의 체세포이식줄기세포 연구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릴 분야로 각광받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은 드물었을 뿐더러 한참 지나서야 반론이 나왔다.

과학, 선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야
과학은 자기의 본래 이름이 \'무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과 자연과 세계에 대한 겸허의 예로써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 다음의 인용문에 동의한다면, 과학은 또한 선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선은 지금까지의 과학과 논리적 질서로는 전혀 볼 수 없는 인간과 세계의 진면목을 직관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일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달마의 주장은 능가주의와 반야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존재와 세계를 인간의 논리적 질서를 활용하여 체계화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달마의 주장이다. 논리적 변용을 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직관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라고 하는 그것 자체가 인간이 마련한 인식구조를 초월한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름대로의 양상을 가지고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나타난 존재자에게는 논리체계를 통해서 설명할 수 없는, 다시 말하면, 인간이 구성한 논리적 질서를 가지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요소들이 함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다.\"<운정, 초기선종의 초조 보리달마 3, 불교포커스(www.bulgy ofocu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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