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는 호수 위를 날고, 사랑은 물 위를 흐르고


그대와 나는 물을 따라 흘러온 존재/ 가슴과 사랑을 나누는 물 한줄기/
그 물위에 떴던 우리/ 수백만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던 우리/(중략)
옛 사랑, 끊임없이 영원토록 되살아날 그 사랑

- (타고르, Unending Love)


1.바레이 호숫가에서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이곳이 선물처럼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구나, 호수의 한가운데 무너진 신전.’ 나는 호수를 건너 들어 갈 저 곳이 이 세상에서 내가 찾고 싶었던 곳 중의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의지를 넘어서는 그곳에서, 우연이라고 불리는 필연이 준 그 곳에서 하얀 나비가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2. 섬에 가기 한 시간 전

오늘은 앙코르와트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우리의 일정은 지금 가이드 마음대로다. 조금 전까지 라텍스를 파는 한인 상점에서 설명을 들었고, 구경을 했고, 일부는 상품을 구입했다. 이젠 보석상으로 옮겨가면서 완전히 진이 빠졌다. 가이드는 일정을 제멋대로 바꾸려고 한다.
“오전 일정인 바레이 호수는 생략하기로 하시죠. 인공호수인데 지금은 건기라서 물도 많이 마르고, 더구나 호수 중앙의 신전을 오가는 배는 물도 새고 위험합니다. 그 돈으로 과일이나 사 먹고 쉬다가 오후에 톨레샵 호수로 가시죠.”
‘지가 가기 싫으니깐 배의 물이 새네 마네 하네. 아니! 모든 관광사 일정에 들어간 곳이 그럴 리는 없지. 또, 어디 물건 파는데 가는 거겠지.’
조금 전까지는 그다지 관심도 없던 곳이 가이드에 대한 반감 때문에 꼭 가야할 곳으로 변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보석상에서 질렸다. 그런데 가이드에게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는다. 난 선물의 집에 가고 싶지 않다. 난 발레이 호수의 멜본 신전에 가고 싶다. 더구나 그곳은 일정표에 버젓이 쓰여 있는 곳이다.
“여행 일정에 공 식 적으로 있잖아요?”
건너편 좌석에 앉아 있는 형부를 뚝 친다. 가이드는 형부에게 꽤 신경을 쓴다.
“배 위에서 과일 먹으면 좋∼지, 갑시다!”
“그럼, 가죠.”

3. 호수의 배 위에서

우리는 섬으로 초대받은 손님 같았다. 배가 발동을 걸고 움직일 때, 하얀 나비가 갑자기 나타나서 뱃전을 빙글빙글 날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길조였다. 그런데 나비는 호수 위 잔잔한 바람에 밀려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허공으로 내려앉곤 하면서 뱃길을 인도하는 듯이 날았다.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나비는 진정한 안내자 같았다. ‘하얀 나비가 우리를 인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관광객들이 흔히 갖는 들뜬 기분은 우리 배에는 없었다. 어느 누구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숙연하지도 않았다. 우리 모두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의 초점을 저 먼 섬에 맞추면 나타나고야 마는 나비는 무거운 모든 것, 붉은 돌과 검은 코끼리, 높은 곳을 향한 그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고 있었다. 앙코르왓은 위대하고 감동적이었지만, 애수에 젖어 있었고 허무했다. 그 무엇도 허공을 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얀 나비는 바람 같은 날갯짓만으로 호수 위 허공을 충만하게 하고 있었다. 나비의 충만한 허공은 자연 그대로의 계시였다. 우리는 그렇게 섬에 들기 전에 마음의 목욕을 하고 있었다. 배가 섬에 닿을 무렵 나비는 항해의 끝을 알려 주려는 것처럼 뱃머리에 내려앉았다.

4. 밀본 신전 옆 파란 나무 법당

그제, 어제 본 앙코르 톰, 앙코르왓에 비교한다면, 가이드 말마따나 볼 것 없는 곳이었다. 앙코르 최대의 인공 호수 안의, 인공 섬의 무너진 돌무더기 터다. 사람들은 신전 터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그늘 밑 해먹에 누워 코코낫을 주문했다. 섬은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그런데도 부처님 두 분이 서쪽 방향으로 모셔져 있었다. 마치 부부 부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처님을 모신 뒤쪽에 파란 페인트의 얼기설기 지은 집이 보였지만, 남의 살림집을 엿보는 것 같아 이내 돌아섰다.
파란 집 밑에서 이가 다 빠진 할머니가 난영 언니와 나를 보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런데 돌덩어리들 위에 입혀 놓았던 크메르의 미소가 할머니의 얼굴에 있었다. 커다란 바위얼굴의 미소가 할머니의 주름살투성이의 작은 얼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섬에 온 이유는 이것이면 되었다 싶었다. 나는 고무되어서 “쑤수디네(안녕하세요)!”하고 딱 하나 아는 크메르어로 인사를 건넸다. 할머니는 더 크게 입을 벌려 웃는 표정을 짓더니 옆에 있는 상자를 열어 보였다. 콜라, 맥주 캔들이 얼음과 함께 들어 있었다. ‘그래, 여긴 관광지야. 이곳에서 그냥 웃는 미소는 없어.’ 할머니의 미소와 아이스박스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미소는 단순히 물건을 팔기 위해 지은 가짜 미소는 아니었다. 설령 물건을 팔기 위한 수단으로 웃었더라도 할머니의 미소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난영언니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같이 코코낫을 나누어 먹으면서 쉬었다. 난영 언니는 형부에게 할머니의 미소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난아, 그 할머니 것도 팔아줘야 되는 거 아니야? 이 집에서만 사면 안 돼지.”
“아니에요. 그 할머니는 물건을 팔 건 안 팔건 그런 건 이미 달관한 얼굴이에요. 아마도 수행을 많이 하신 분 같아요.”
나는 난영 언니의 입에서 들은 ‘수행’이라는 단어가 낯설면서도 신선했다. 언니는 “예수를 세계로, 세계를 예수로”를 구호로 하는 교회에 다니는 착실하고 또한 절절한 기독교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법당에서 기도 많이 하셨나보네.”
“형부는…, 법당이 어디에 있는데?”
“파란 집.”
“뭐? 재희 언니, 같이 가자.”

할머니는 내가 살림집이라고 생각한 법당 앞마당에서 꽃을 따고 계셨다. 역시 물건을 파는 할머니만은 아니었다. 법당 앞 꽃과 할머니의 미소가 함께 잘 어울렸다. 법당을 찾아온 우리를 돌 같기도 하고 꽃 같기도 한 미소로 맞아주시면서 법당으로 올라가라고, 절을 하고 가라고, 경배의 자세를 보여주셨다. 그렇게 우리를 섬기면서 맞아 주셨다.
파란 법당에 들어서자 이 섬의 꽃들로 꾸며진 제단 위에 부처님이 앉아 계셨다. 그 옆에는 남방의 황톳빛 가사를 두른 스님이 할머니와 같은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일어나셔서 할머니처럼 합장해 주셨다.
그런데 내 발 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어지러웠다. 나는 이곳을 나도 잊어버린 꿈에서 보았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이곳의 시간과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것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찾아야하는 그 무엇인 것이었다.

5. 섬을 나오는 배 위에서

“언니, 그 작은 섬 법당 마당에 부처는 왜 둘일까요? 마치 부부 부처 같지 않아요? 아까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부부 같아요.”
“얘는? 그 할아버지 비구야!”
“우리가 살아있는 전설의 섬에 들어갔다 온 거 같지 않아요? 물 한가운데 세상의 배꼽과도 같은 작은 섬이 떠 있지요. 그 섬에는 신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고, 신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고 있다는 신화가 기억나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와 비구는 세상의 중심을 지키는 부부인 것 같아요. 그 둘은 옛날부터 그 섬에 있었던 사랑인 것 같아요. 우리가 조금 전 다녀온 저 섬에서는 세상을 지키려는 사랑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되살아날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먼 미래에 부부는 태고 적의 이야기처럼 인간을 넘어선 그 무엇이 될 것에요. 세상과 사랑을 함께 안은 그 무엇이 되어 우리들의 동경이 될 테지요. 이 섬에서 부부처럼 느껴지는 두 부처가 서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우리는 방금 전에 과거가 살아있는 현재에, 미래가 실현되어 있는 현재에 다녀온 것 같지 않아요? 적어도 우리에게 그 섬은 영원한 현재의 섬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거기에 <존재>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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