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 고문 다께다 한지(武田範之)를 중심으로 Ⅲ. 원종(圓宗)에 대한 재검토 ①다께다와 원종의 성립 원종은 1908년 3월 6일 각도 사찰 대표 승려 52명이 원홍사(元興寺)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 종무원을 설립함으로써 성립된다. 31)그리고 나서 이용구의 소개로 다께다가 원종의 고문이 되었다 32)고 함으로써, 원종의 성립 이후에 비로소 다께다가 원종과 관련을 맺게 되는것이며, 원종의 성립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될 경우, 이회광33)을비롯 한 원종 참가자들의 자발적인 친일만 문제가 될 뿐, 다께다와 일본 제국주의는 역사적으로 면책(免責)되고 만다. 그러나 실상 다께다는 원종 성립 당시부터 깊숙이 개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종은 그의 의도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 논자의 견해이다. 원래 다께다는 한일합병이 되기 수십년 전에 조선불교를 부흥하고자 하는 뜻을 가만히 품게 되었다34)는 것이며, 이를 위해 1907년 3월 12일 일진회 회장 이용구에게 「권불교재흥서(勸佛敎再興書)를 써서 준다. “우리 종단(曹洞宗) 추엽산(秋葉山) 묵선(黙仙) 화상은 일본에서는 고승으로 칭송되는데, 경성(京城)을 지나는 길에 내가 설하는 조선불교의 재흥의 방략을 받아들여 현재는 통도사에 머물면서 중승(衆僧)에게 그 방략을 지시하고 있소. 어제 저녁 한경원(韓景源)35)군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묘계(妙計)는 이 회장(이용구)에게 편지를 보내서 주선해 줄 것을 청하소서 … 중략… 먼저 합의소(合議所)를 성내에 설치해서 모(某)회라 칭하고 각 사의 뛰어나고 시무(時務)에 통한 승려를 뽑아서 각 사의 대표로서 합의소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흥교(興敎)의 방법을 강구하고 …36) 이 편지〔勸佛敎再興書〕는 l908년 원종 성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거니와 37) 각사찰의 합의소를 경성에 설치하고자 한 것이 바로 원종 성립의 복안(腹案)이었던 것이다. 합의소를 설치하고자 하는 다께다구상의 저변에는 조선 불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조선낭인으로서의 간교한 책략이 숨어 있다. 다른 종파의 승려들은 제각기 자기네들 종파에 소속시키고자 혈안이 되고 있었을 때 38) 통도사에 내려가 있던 묵선(黙仙) 화상이 다께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통도사에는 세 파(派)가 있소. 하나는 정토종에 의지하고자 하며, 하나는 본원사파{本願寺派)에 의지하고자 하며 하나는 조동종에 의지하고자 하오. 그러므로 중승(衆僧)이 여우와 같이 의심을 하고 있소. 마땅히 의뢰심을 쉬고(조선불교의 통일 없이 직접 일본 불교에 소속시키지 말고-논자) 경성내에 합의소를 창건해서 스스로 분기케 하는 것이 좋겠소”39)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종파적 이해관계에서 조선불교를 자기네 종파에 소속시키고자 하는것이 조선불교도들에게 의심을 심어주게 되어 비효율적이며 통제하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경성내에 합의소를 설치하기로 의견이 좁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다께다가 이용구에게 조선불교의 통일기관을 설치하는 데에 주선해 줄 것을 청하자 40)이용구는 이회광을 다께다에게 소개시키게 된다. 이후, 이회광과 다께다는 함께 상의하여 원종을 설치하게 되고, 다께다는 자연스럽게 고문으로 추대받아 취임하는 것이다. 1908년 7월 27일 다께다는 이회광 등 8도 44개 사찰 주지 48명을 대신하여 「청원서」를 작성해 주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略 )에게 제출케 하고 있다. 이 「청원서」에서늠 9개 항을 청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41) 一 경성에 대한국 종무원을 설치, 내부 대신의 감독으로 직계로 l3도의 불교 각사(寺)를 총괄하는 일. ― 국민 자유로 삼보를 숭신(崇信)하고 장례식, 제사 등 공공연히 불식(佛式)을 준용함에 있어서 방해받지 않을 것. ― 승니(僧尼)가 어느 곳에서나 연설을 공개해서 법을 가르치고 재시(齋施)에 응하는 일 ― 종무원의 발령(發令)은 매년 내부대신의 인가를 경유(經由)할 것. ― 종무원 원종 관장(종정) 1인은 내부대신의 추천과 인가가 있을 것. ― I3도 각 사 주지 및 종무원 부장 주사 등 각 도 지원장 등은 관장이 임면(任免)을 행할 것. ― 종무원은 13도 각 사의 보물 및 소관 산림, 전원 등의 권리를 보장할 것. ― 13도 각과는 종무원의 비용을 분담할 것. ― 종무원이 만일 남행(濫行)이 있으면 각 사는 곧 내부대신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 이와같이 볼 때, 원종은 조선불교를 통한 조선 민중의 정신의 지배를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전위였던 조선낭인 다께다에 의해서 설치, 경영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②다께다와 원종의 명칭 다께다가 원종42)을 설치, 경영하였다는 본고의 논리가 받아들여진다면 ‘원종(圓宗)의 명칭도 다께다가 지었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의 생각이 투영된 명칭으로 생각된다. 원종이란 종명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없었던44) 명칭이다. 따라서 원종이라는 명칭은 대개 과거의 불교전통에서 있었던 종명을 다시 되살려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종명 명명(命名)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원종’이란 종명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논자의 다께다 관련설을 제시하기 전에, 우선 기존의 제설(諸說)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능화설(說)이다. 원종이라 이름한 것은 제사(諸寺)의 대표 승려들이 회의하여 함께 세웠으므로 그 원융무애의 뜻을 취한 것이다. 아울러서 「종경록(宗鏡錄)」의 원종을 따온 것도 아니며 또한 화엄의 원종에서 따온 것도 아니다.45) 이능화 설의 요지는, 원종이란 명칭은 무슨 교리적 배경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며, :“여러 사찰의 대표 승려들이 회의하여 함께 세웠으므로 원종이라 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셜득력이 약하다. 종명은 그 종(宗)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그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회의하여 만든 종단이므로 원종이라지었다고는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원종참여자들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46) 둘째, 다까하시 설이다 이 원종의 정의(定義)에 대하여 이능화 씨는 제사 대표승려의 공의(共議)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므로 원융무애의 뜻을 취한 것이라 설명하고 었으나, 내가 직접 이회광 스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영명사 연수(延壽)의 「종경록(宗鏡錄)」을 취하여 선교겸수(禪敎兼修) 종문을 표방한 것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정당한가를 알 수가 없다.47) 다까하시가 직접 이회광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했으나 두 가지 이유에서 이회광이 언급한「종경록」에서 직접 따왔다는 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첫째, 이회광을 비롯한 원종 참가자들은 원종의 전신(前身)이었던 불교연구회48)의 일본 지향적 성향49)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불교 재생의 힘을 우리 불교의 전통 속에서 구하고자 한 사람들이 아니다. 둘째, 원종의 관심은 선(禪) 위주의 선종으로서 설립될 것인가 아니면 교(敎) 위주의 교종으로서 설립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결코 원종의 성립 이유는 교판(敎判)과 수행방법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회광과 다께다를 비롯한 원종의 관심은 합병 이전에는 내부대신의 인가, 합병 이후에는총독의 인가를 얻는 일에 집중되었다. 세째, 다까하시가 친히 이 회광으로부터 들었다는 언급은 이회광이 도일(渡日)했을때, 일인(日人)의 물음에 대한 답변인 것으로 보이며,50) 따라서 그런 그의 언급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볼 때, 이회광의 발언은 종명 명명에 그 어떠한 교리사적 배경도 없었음에 불구하고, 대외적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종경록의 선교겸수 운운(云云)했다고 생각되며, 그 진정한 이유를 숨기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에 가는 것이다. 세째, 김포광(金包光) 설이다. “조선 불교의 일용행사(日用行事)가 선(禪) 또는 교(敎)의 일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참선, 간경, 염불 내지 밀교까지 원수(圓修)한다는 의미에서 종명을 의정(議定)하여 원종 종무원을 설립한 것이다.51) 김포광 설에 대한 비판은 다까하시 설에 대한 비판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네째, 김영태 설이다. 종래의 승단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종명을 붙이고 종무원을 설립하면서 원종이라 하였던 것이므로 따로 종조와 종통과 종지가 있었던 것에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만 종래 종파가 없었던 산승시대(山僧時代)처럼. 선과 교를 겸행(兼行) 원수(圓修)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원융무애의 뜻으로 원종(圓宗)이라는 종명을 붙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52) 김영태 설은 그 후반의 보완 설명에서 김포광 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전반부에서 원종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종명을 붙이고 종무원올 설립하면서 원종이라고 했다는 지적은 탁견(卓見)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본고의 논리와 궤(軌)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다만 ‘일본의 영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 실체를 밝혀 놓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이제, 논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께다 관련셜올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다께다는 원종을 설치, 경영하고자 그 성립을 막후에서 조종한 자이며, 성립 이후에는 고문으로 추대받은 자이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의 전위(前衛) 조선 낭인 다께다의 정치이념은 아시아주의이며, 아시아주의의 불교적 나타남이 바로 원종주의(圖宗主義)53)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원종주의 구현의 차원에서 그가 설치토록 한 종단의 명칭을 원종으로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의 종교이념인 원종주의를 논한 저술로 「원종육제론(圓宗六諸論)」이었음은 앞서 살핀 바 있다. 「원종육제론」은 조선 승려들중에서 소납(小衲, 다께다)이 경영하는 종무원에 대해서 반기(反旗)를 드는 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급히 「육제론」을 기초하게 되었다.54)라고 그 저술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원종육제론」에서의 원종은 이회광의 원종을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일단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조선불교 원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원종육제론」 그 자체가 보여 주고 있다. 「원종육제론」에서의 원종은 단순히 조선불교 원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원만한 종교라는 의미인데, 그 전체에 걸친 최초의 표어로서 “위로 조동종, 아래로 임제종에 걸쳐서 원종을 흥릉케 하기 위해서는 크게 육제(六諸)를 논하게 된다고 했다. 이로써 볼때, 그에게 있어서의 원종은 조동종과 임제종을 모두 포괄하는 상위개념인 것이지 결코 조동종에 연합되고 종속되어야 할 하위개념으로서의 조선불교 원종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논자는 그와 같은 그의 입장을 원종주의라고 명명했거나와, 그의 원종주의는「원종육제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단화종제분(團和宗体分) 제2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단화종제(團和宗体)라는 것은 단화(團和, 團結和合)가 그의 원종주의의 핵심〔宗体〕이라는 뜻이다. 원래 화합은 승가의 본질이지만 여기서 다께다가 특별히 그것을 원종의 종체라고 내세우는 것56)은 곧 지배자의 논리이다. 그들 스스로 침략과 지배를 일삼으면서 피지배의 조선민중과 각성한 조선승려들에게 화합을 외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원종주의가 피지배 민중들에게 아시아가 연대해야 한다고 외치는 아시아주의와 통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런 의미에서 다께다의 원종주의가 정치적 침략의 논리인 아시아주의의 종교적 표현이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화종제분 제2에서 그가 “이제 원종을 조선에 선양함에 있어서 ..”라고 했을 때, 원종이 지시하는 바는 조선 불교의 원종을 뜻한 것이 아니라그의 종교 이념인 원종주의를 조선에 선양코자 함에 있어서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이 타당한 것이라면 조선 불교 원종의 명칭은 다께다가 명명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원종주의 종교 이념의 영향으로부터 온 것이다58) ③원종과 조동종의 연합 원종과 조동종 연합의 시도는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비로소 이회광이 장래 조선 불교의 존립에 위기의식올 느껴 추진된 것으로 gms히 생각되어 왔다.59) 그러나, 실제로 원종은 성립한 그해, 1908년 일본 조동종 총무원에 보호를 청하고 있다. 다께다는 1908년 9월20일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의견」을 기초(起草)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년 4월에 54명의 유지 승려가 원종 총무원을 원흥사에 설립하고 있어도 내외의 사정에 어둡고 제도상의 지식(智識)에 결핍되어서 보호를 일본 조동종 종무원에 빌어서, 조동종 관장으로 하여금 통감부에 이첩하기에 이르렀다.60) 이로써 볼 때, 다께다는 원종을 성립시킨 당시부터 일본조동파의 연합(보호)종을 의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대, 원종과 연합할 상대(counter-part)로서 조동종이 선택된 것은 다께다가 조동종 승려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종파적 이해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 불교의 종파 중에서 가장 순조롭게 연합할 수 있는 유사성을 조동종이 가장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61) 그와 같은 가능성을 다깨다가 확인한 것은 1908년 봄 이회광 등이 일본에 유람갔을 때, 조동종의 사원조직이 조선의 것과 흡사함에 대단히 기뻐한 것을 보고나서였다.62)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을 그 배경에 두고서, 한일합병이 되자 조동종과의 연합이 가시적(可視的)으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원종은 1908 성립된 이후에 통감부의 인가를 얻는 일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다께다 역시 수차례 건의서를 통감부에 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이회광은 그해 9월 조동종 관장 이시까와{石川素童)를 만나 연합문재를 논의하게 된다. 이때 이시까와는 연합이 아닌 철저한 종속관계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일정한 기간 원종을 조동종의 부속으로 두고자 했다.63) 그리하여 1910년 10월 이회광은 이시까와를 대신한 흥진설삼(弘津說三)과 7개항의 연합조약64)을 체결하게 된다. 一, 조선 전체의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과 완전하게 또 영구하게 연합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한다.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을 위촉한다. 一,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 원종 종무원 설립인가를 얻도록 알선하는 일을 맡는다.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한다.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해서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훤이 지정하는 곳과 사찰에 숙사(宿寺)를 정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 승려 교육에 종사케 한다. 一, 본 연맹은 쌍방의 뜻이 합하지 않을 때에는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한다. 一, 본 연맹은 관할하는 곳의 승인을 얻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명치(明治) 43년 4월 6일 조선 원종 대표자 이회광(李晦光) 조동종 종무 대표자 흥진설삼{弘津說三) 원종과 조동종의 이 같은 연합은 1911년 6월 총독부가 사찰령(寺刹令)과 7월에 동(同) 시행규칙을 발표함으로써 무위(無鳳)로 돌아가게 된다. 이로써 총독부의 입장과 다께다의 입장이 달랐음을 알수 있는데, 총독부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통하여 조선을 지배하고자 한 반면 다께다와 같은 경우는 회유적 방법65)을 병행코자 하였으나 병합 이후에는 강경파들이 득세하여 회유와 같은 유화정책은 필요없으며, 군대와 헌병을 통해서 억압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께다가 생각한 조선불교에 대한 조동종을 통한 간접통제 방식은 채택되지 아니한 것이며66) 사찰령을 내려서 총독부가 직접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l919년 3월 전민족적 저항운동인 3.1 운동을 초래하는 한 계기가 곧 총독부의 무단통치에 있었음67)을 생각한다면, 조선불교의 통일기반으로 원종이라는 꼭두각시 집단을 만들고 조종하여 일본 불교의 조동종과 연합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온화하게 조선불교를 종속시키고 조션민중의 정신 지배를 획책한 다께다의 책략 더욱 교활했음을 알 수 있다. 원종 고문 다께다 한지(武田範之)를 중심으로 Ⅲ. 원종(圓宗)에 대한 재검토 ①다께다와 원종의 성립 원종은 1908년 3월 6일 각도 사찰 대표 승려 52명이 원홍사(元興寺)에서 총회를 열고 원종 종무원을 설립함으로써 성립된다. 31)그리고 나서 이용구의 소개로 다께다가 원종의 고문이 되었다 32)고 함으로써, 원종의 성립 이후에 비로소 다께다가 원종과 관련을 맺게 되는것이며, 원종의 성립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될 경우, 이회광33)을비롯 한 원종 참가자들의 자발적인 친일만 문제가 될 뿐, 다께다와 일본 제국주의는 역사적으로 면책(免責)되고 만다. 그러나 실상 다께다는 원종 성립 당시부터 깊숙이 개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원종은 그의 의도에 의해서 계획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 논자의 견해이다. 원래 다께다는 한일합병이 되기 수십년 전에 조선불교를 부흥하고자 하는 뜻을 가만히 품게 되었다34)는 것이며, 이를 위해 1907년 3월 12일 일진회 회장 이용구에게 「권불교재흥서(勸佛敎再興書)를 써서 준다. “우리 종단(曹洞宗) 추엽산(秋葉山) 묵선(黙仙) 화상은 일본에서는 고승으로 칭송되는데, 경성(京城)을 지나는 길에 내가 설하는 조선불교의 재흥의 방략을 받아들여 현재는 통도사에 머물면서 중승(衆僧)에게 그 방략을 지시하고 있소. 어제 저녁 한경원(韓景源)35)군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이 묘계(妙計)는 이 회장(이용구)에게 편지를 보내서 주선해 줄 것을 청하소서 … 중략… 먼저 합의소(合議所)를 성내에 설치해서 모(某)회라 칭하고 각 사의 뛰어나고 시무(時務)에 통한 승려를 뽑아서 각 사의 대표로서 합의소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흥교(興敎)의 방법을 강구하고 …36) 이 편지〔勸佛敎再興書〕는 l908년 원종 성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거니와 37) 각사찰의 합의소를 경성에 설치하고자 한 것이 바로 원종 성립의 복안(腹案)이었던 것이다. 합의소를 설치하고자 하는 다께다구상의 저변에는 조선 불교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고자 하는 조선낭인으로서의 간교한 책략이 숨어 있다. 다른 종파의 승려들은 제각기 자기네들 종파에 소속시키고자 혈안이 되고 있었을 때 38) 통도사에 내려가 있던 묵선(黙仙) 화상이 다께다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통도사에는 세 파(派)가 있소. 하나는 정토종에 의지하고자 하며, 하나는 본원사파{本願寺派)에 의지하고자 하며 하나는 조동종에 의지하고자 하오. 그러므로 중승(衆僧)이 여우와 같이 의심을 하고 있소. 마땅히 의뢰심을 쉬고(조선불교의 통일 없이 직접 일본 불교에 소속시키지 말고-논자) 경성내에 합의소를 창건해서 스스로 분기케 하는 것이 좋겠소”39)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종파적 이해관계에서 조선불교를 자기네 종파에 소속시키고자 하는것이 조선불교도들에게 의심을 심어주게 되어 비효율적이며 통제하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서 경성내에 합의소를 설치하기로 의견이 좁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다께다가 이용구에게 조선불교의 통일기관을 설치하는 데에 주선해 줄 것을 청하자 40)이용구는 이회광을 다께다에게 소개시키게 된다. 이후, 이회광과 다께다는 함께 상의하여 원종을 설치하게 되고, 다께다는 자연스럽게 고문으로 추대받아 취임하는 것이다. 1908년 7월 27일 다께다는 이회광 등 8도 44개 사찰 주지 48명을 대신하여 「청원서」를 작성해 주며,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略 )에게 제출케 하고 있다. 이 「청원서」에서늠 9개 항을 청원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41) 一 경성에 대한국 종무원을 설치, 내부 대신의 감독으로 직계로 l3도의 불교 각사(寺)를 총괄하는 일. ― 국민 자유로 삼보를 숭신(崇信)하고 장례식, 제사 등 공공연히 불식(佛式)을 준용함에 있어서 방해받지 않을 것. ― 승니(僧尼)가 어느 곳에서나 연설을 공개해서 법을 가르치고 재시(齋施)에 응하는 일 ― 종무원의 발령(發令)은 매년 내부대신의 인가를 경유(經由)할 것. ― 종무원 원종 관장(종정) 1인은 내부대신의 추천과 인가가 있을 것. ― I3도 각 사 주지 및 종무원 부장 주사 등 각 도 지원장 등은 관장이 임면(任免)을 행할 것. ― 종무원은 13도 각 사의 보물 및 소관 산림, 전원 등의 권리를 보장할 것. ― 13도 각과는 종무원의 비용을 분담할 것. ― 종무원이 만일 남행(濫行)이 있으면 각 사는 곧 내부대신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 이와같이 볼 때, 원종은 조선불교를 통한 조선 민중의 정신의 지배를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전위였던 조선낭인 다께다에 의해서 설치, 경영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②다께다와 원종의 명칭 다께다가 원종42)을 설치, 경영하였다는 본고의 논리가 받아들여진다면 ‘원종(圓宗)의 명칭도 다께다가 지었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적어도 그의 생각이 투영된 명칭으로 생각된다. 원종이란 종명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도 없었던44) 명칭이다. 따라서 원종이라는 명칭은 대개 과거의 불교전통에서 있었던 종명을 다시 되살려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종명 명명(命名)의 경우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원종’이란 종명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가? 논자의 다께다 관련설을 제시하기 전에, 우선 기존의 제설(諸說)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능화설(說)이다. 원종이라 이름한 것은 제사(諸寺)의 대표 승려들이 회의하여 함께 세웠으므로 그 원융무애의 뜻을 취한 것이다. 아울러서 「종경록(宗鏡錄)」의 원종을 따온 것도 아니며 또한 화엄의 원종에서 따온 것도 아니다.45) 이능화 설의 요지는, 원종이란 명칭은 무슨 교리적 배경이 있어서 지어진 이름이 아니며, :“여러 사찰의 대표 승려들이 회의하여 함께 세웠으므로 원종이라 했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셜득력이 약하다. 종명은 그 종(宗)의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그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회의하여 만든 종단이므로 원종이라지었다고는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원종참여자들조차 분명히 알지 못한 사연이 있었던 것 같다.46) 둘째, 다까하시 설이다 이 원종의 정의(定義)에 대하여 이능화 씨는 제사 대표승려의 공의(共議)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므로 원융무애의 뜻을 취한 것이라 설명하고 었으나, 내가 직접 이회광 스님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영명사 연수(延壽)의 「종경록(宗鏡錄)」을 취하여 선교겸수(禪敎兼修) 종문을 표방한 것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정당한가를 알 수가 없다.47) 다까하시가 직접 이회광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했으나 두 가지 이유에서 이회광이 언급한「종경록」에서 직접 따왔다는 설은 설득력이 약하다. 첫째, 이회광을 비롯한 원종 참가자들은 원종의 전신(前身)이었던 불교연구회48)의 일본 지향적 성향49)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불교 재생의 힘을 우리 불교의 전통 속에서 구하고자 한 사람들이 아니다. 둘째, 원종의 관심은 선(禪) 위주의 선종으로서 설립될 것인가 아니면 교(敎) 위주의 교종으로서 설립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결코 원종의 성립 이유는 교판(敎判)과 수행방법의 차이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회광과 다께다를 비롯한 원종의 관심은 합병 이전에는 내부대신의 인가, 합병 이후에는총독의 인가를 얻는 일에 집중되었다. 세째, 다까하시가 친히 이 회광으로부터 들었다는 언급은 이회광이 도일(渡日)했을때, 일인(日人)의 물음에 대한 답변인 것으로 보이며,50) 따라서 그런 그의 언급을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볼 때, 이회광의 발언은 종명 명명에 그 어떠한 교리사적 배경도 없었음에 불구하고, 대외적 위신을 세우기 위하여 종경록의 선교겸수 운운(云云)했다고 생각되며, 그 진정한 이유를 숨기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에 가는 것이다. 세째, 김포광(金包光) 설이다. “조선 불교의 일용행사(日用行事)가 선(禪) 또는 교(敎)의 일방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참선, 간경, 염불 내지 밀교까지 원수(圓修)한다는 의미에서 종명을 의정(議定)하여 원종 종무원을 설립한 것이다.51) 김포광 설에 대한 비판은 다까하시 설에 대한 비판의 논리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네째, 김영태 설이다. 종래의 승단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종명을 붙이고 종무원을 설립하면서 원종이라 하였던 것이므로 따로 종조와 종통과 종지가 있었던 것에 아니었다고 하겠다. 다만 종래 종파가 없었던 산승시대(山僧時代)처럼. 선과 교를 겸행(兼行) 원수(圓修)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원융무애의 뜻으로 원종(圓宗)이라는 종명을 붙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52) 김영태 설은 그 후반의 보완 설명에서 김포광 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전반부에서 원종이 일본의 영향을 받아 종명을 붙이고 종무원올 설립하면서 원종이라고 했다는 지적은 탁견(卓見)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본고의 논리와 궤(軌)를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다만 ‘일본의 영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 실체를 밝혀 놓지 못해서 아쉬울 뿐이다. 이제, 논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께다 관련셜올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다께다는 원종을 설치, 경영하고자 그 성립을 막후에서 조종한 자이며, 성립 이후에는 고문으로 추대받은 자이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의 전위(前衛) 조선 낭인 다께다의 정치이념은 아시아주의이며, 아시아주의의 불교적 나타남이 바로 원종주의(圖宗主義)53)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원종주의 구현의 차원에서 그가 설치토록 한 종단의 명칭을 원종으로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의 종교이념인 원종주의를 논한 저술로 「원종육제론(圓宗六諸論)」이었음은 앞서 살핀 바 있다. 「원종육제론」은 조선 승려들중에서 소납(小衲, 다께다)이 경영하는 종무원에 대해서 반기(反旗)를 드는 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급히 「육제론」을 기초하게 되었다.54)라고 그 저술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원종육제론」에서의 원종은 이회광의 원종을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일단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조선불교 원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원종육제론」 그 자체가 보여 주고 있다. 「원종육제론」에서의 원종은 단순히 조선불교 원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완전원만한 종교라는 의미인데, 그 전체에 걸친 최초의 표어로서 “위로 조동종, 아래로 임제종에 걸쳐서 원종을 흥릉케 하기 위해서는 크게 육제(六諸)를 논하게 된다고 했다. 이로써 볼때, 그에게 있어서의 원종은 조동종과 임제종을 모두 포괄하는 상위개념인 것이지 결코 조동종에 연합되고 종속되어야 할 하위개념으로서의 조선불교 원종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논자는 그와 같은 그의 입장을 원종주의라고 명명했거나와, 그의 원종주의는「원종육제론」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단화종제분(團和宗体分) 제2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단화종제(團和宗体)라는 것은 단화(團和, 團結和合)가 그의 원종주의의 핵심〔宗体〕이라는 뜻이다. 원래 화합은 승가의 본질이지만 여기서 다께다가 특별히 그것을 원종의 종체라고 내세우는 것56)은 곧 지배자의 논리이다. 그들 스스로 침략과 지배를 일삼으면서 피지배의 조선민중과 각성한 조선승려들에게 화합을 외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원종주의가 피지배 민중들에게 아시아가 연대해야 한다고 외치는 아시아주의와 통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나타낸다. 그런 의미에서 다께다의 원종주의가 정치적 침략의 논리인 아시아주의의 종교적 표현이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단화종제분 제2에서 그가 “이제 원종을 조선에 선양함에 있어서 ..”라고 했을 때, 원종이 지시하는 바는 조선 불교의 원종을 뜻한 것이 아니라그의 종교 이념인 원종주의를 조선에 선양코자 함에 있어서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추론이 타당한 것이라면 조선 불교 원종의 명칭은 다께다가 명명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원종주의 종교 이념의 영향으로부터 온 것이다58) ③원종과 조동종의 연합 원종과 조동종 연합의 시도는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비로소 이회광이 장래 조선 불교의 존립에 위기의식올 느껴 추진된 것으로 gms히 생각되어 왔다.59) 그러나, 실제로 원종은 성립한 그해, 1908년 일본 조동종 총무원에 보호를 청하고 있다. 다께다는 1908년 9월20일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의견」을 기초(起草)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년 4월에 54명의 유지 승려가 원종 총무원을 원흥사에 설립하고 있어도 내외의 사정에 어둡고 제도상의 지식(智識)에 결핍되어서 보호를 일본 조동종 종무원에 빌어서, 조동종 관장으로 하여금 통감부에 이첩하기에 이르렀다.60) 이로써 볼 때, 다께다는 원종을 성립시킨 당시부터 일본조동파의 연합(보호)종을 의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대, 원종과 연합할 상대(counter-part)로서 조동종이 선택된 것은 다께다가 조동종 승려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종파적 이해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본 불교의 종파 중에서 가장 순조롭게 연합할 수 있는 유사성을 조동종이 가장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61) 그와 같은 가능성을 다깨다가 확인한 것은 1908년 봄 이회광 등이 일본에 유람갔을 때, 조동종의 사원조직이 조선의 것과 흡사함에 대단히 기뻐한 것을 보고나서였다.62)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을 그 배경에 두고서, 한일합병이 되자 조동종과의 연합이 가시적(可視的)으로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원종은 1908 성립된 이후에 통감부의 인가를 얻는 일에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다께다 역시 수차례 건의서를 통감부에 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이회광은 그해 9월 조동종 관장 이시까와{石川素童)를 만나 연합문재를 논의하게 된다. 이때 이시까와는 연합이 아닌 철저한 종속관계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일정한 기간 원종을 조동종의 부속으로 두고자 했다.63) 그리하여 1910년 10월 이회광은 이시까와를 대신한 흥진설삼(弘津說三)과 7개항의 연합조약64)을 체결하게 된다. 一, 조선 전체의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과 완전하게 또 영구하게 연합동맹하여 불교를 확장한다.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 고문을 위촉한다. 一, 조동종 종무원은 조선 원종 종무원 설립인가를 얻도록 알선하는 일을 맡는다.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의 포교에 대하여 상당한 편리를 도모한다. 一,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하여 각 수사(首寺)에 배치해서 일반 포교 및 청년 승려의 교육을 촉탁하고, 또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로 인하여 포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훤이 지정하는 곳과 사찰에 숙사(宿寺)를 정하여 일반포교 및 청년 승려 교육에 종사케 한다. 一, 본 연맹은 쌍방의 뜻이 합하지 않을 때에는 폐지, 변경, 혹은 개정한다. 一, 본 연맹은 관할하는 곳의 승인을 얻는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명치(明治) 43년 4월 6일 조선 원종 대표자 이회광(李晦光) 조동종 종무 대표자 흥진설삼{弘津說三) 원종과 조동종의 이 같은 연합은 1911년 6월 총독부가 사찰령(寺刹令)과 7월에 동(同) 시행규칙을 발표함으로써 무위(無鳳)로 돌아가게 된다. 이로써 총독부의 입장과 다께다의 입장이 달랐음을 알수 있는데, 총독부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통하여 조선을 지배하고자 한 반면 다께다와 같은 경우는 회유적 방법65)을 병행코자 하였으나 병합 이후에는 강경파들이 득세하여 회유와 같은 유화정책은 필요없으며, 군대와 헌병을 통해서 억압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께다가 생각한 조선불교에 대한 조동종을 통한 간접통제 방식은 채택되지 아니한 것이며66) 사찰령을 내려서 총독부가 직접 지배하게 된 것이다. 결국, l919년 3월 전민족적 저항운동인 3.1 운동을 초래하는 한 계기가 곧 총독부의 무단통치에 있었음67)을 생각한다면, 조선불교의 통일기반으로 원종이라는 꼭두각시 집단을 만들고 조종하여 일본 불교의 조동종과 연합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온화하게 조선불교를 종속시키고 조션민중의 정신 지배를 획책한 다께다의 책략 더욱 교활했음을 알 수 있다. 각 주 27) 위의 책, p. 17. 식인본국 불교의 이 두가지 성격은 다께다의 원종 설치, 경영을 통하여 식민지 불교에도 그대로 전해져 식민지 불교의 성격이 되었다는 것을 맺음말 ①역사적 교훈에서 언급할 것이다28) 五十步百步의 大同小異이다 그럼에도 논자가 굳이 小異를 밝히는 것은 다께다의 경우는 다른 일본불교 승려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고자하기 때문이다. 29) 瀧澤誠, 앞의 책 p.191. 30) 高橋亨, 李朝佛敎(東京 ; 賽文館, 昭和 4), p. 919―p.920. 31) 이능화, 앞의 책, p.937. 성립 당시의 조직은 종정 李晦光, 총무 金玄훌, 교무부장陳윤빼(不훌), 학우부장金톨훌( 金之淳). 서무부장 金石훨(→姜大運), 인사부장 李臨明(→金九河), 감사부장 朴普빼(→ 옳뼈湖), 재무부장徐홉훌(→金龍용), 고풍감사朴훌永 퉁이었다. 32) 高橋후, 앞의 책,p. 920. j 33) B훌光옹 호이며 法名은 뼈f훌이다. 楊州예써 태어남 1q째에 셜악산신흥샤의 定含에게서 숭려가 되었으며 1968년 건흉샤 톨톨의 法율 이어받았다. 건봉샤 애서 교학올가르치기도 했으며 여러 션훤빼 活句훌 빼미했다; 〔한국인명대사천(서율; 신:F문화Ak 1967), p. 333〕 저서에뺑훌훌 2권이 있닥 〔환{, 활교 A댄(서융; 닭역경훤, 1984), p. 370〕 뼈 찾Xl 못했j 그리고 그의됐年代도 分明하지 않rJ 훤종 생렵 땅시의 그는 혜인사 주지의 신뺀였다. 34) ||t홈兵衛, 앞의 책, p. 66l∙i) 일진회 회원이댄 | 36) lll」:홈함꺼훌, 앞의 책, p. 2Z9-23I. 이하, 본고에서의jt앓온 모두 논자가 톨인 것임. 37) 강석주, 박경훈, 활교근세빽년(서율; 중앙일보Ah 1980),k. 1-||上훌兵홉도 앞의 빽, p.231.。써 이 動佛敎再興書가 復의 원종종맴J 깨껄의 결과훌 가져용 맹이가 된 것이다고 했다. | 38) 주 30, 훌照. | 39) ll|1:홈兵術, 앞의 책, p.234. 1907년 3월 18일 이용뿌에재 보낸 다째다의 편지애 인용되어 었다. 40) 위의 책. p.234. 다께다는 이용구에게 보댄 편지(1907.3. l8)에섹 그라므로, 이제 法座下(이용구)가먼저 이를 선양해주고, 뒤에혜납t다께다)이 따라서 용 훤하겠소I라고 뼈. 죠건률교계와의 연결융부탁하고 었다 41) 위의 책, p.319-320. | 42) 밟推心, 훨폐圓宗과李臨光: 「주간불교」, 1989. 1.b1. 字.p.8. 최유심 싸는 위의 글혜써 훨종이 아셔라 엄재원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휠종 인사부 장 李B훌明 스님의 門A 慧톨 스님이 쓴 기륙예 뺑f는|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록 일본혹그 어떤 자료애서도 임제원총9」로 되어 었지 않으며 훤총으로 되 어 었다. 훌훌 스님이 쓴 기록율 公閒, 학계의 학푼객 충융받얘t할것으로 생각된다 . 43 ) 다째다가 직접 옮名했다는 자E.는 없으나, 그 가능갱은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보다 자세환자료의 훌현올기대혜 본다.44) 강영태, 근대활교의 총홍종맥: 근대한국불교사혼{서율; 민촉새 l988), p. I944) 아능화, 앞의 책, p.937. | 46) 위의 책, p.937. 훌照. 웬종이 깨워진 후 당시의 송려가|만약얘 원종의 훌쳐에 대하여 물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하여, 원종의 출처(명칭, 기타)에 대해 모르고 있었옴융보여주고 있다 47) 高홈후, 앞의 책, p.920-921. l 48) 1906년 2월에 洪月 初, 李홈패 둥이 세웠으며 초대회칩얘洪月 初, 2대 회정애 李臨jt이었다. 〔서경수, 일제의 불교정책i 근대한국톨과}륜, p. lQ3.〕 49) 이능화, 앞의 책, p.936. 불교연구회의 친일척 생격온통벼I「창껄인가예 판환 청원서」。뻐 本뺨等, 훌슐於훔土宗, E홉多年∙이라고 한것에 의혜써도캉 알수 있다. | ,o) 김영태, 근대률교의 총홍종팩: p. l96. LI ) 김영태, 한국활교사재셜(서울; 경서훤, l986. ), p.24-!2) 김영태. 근대훌교의 총흥종팩: p. I97. | ) 다쩨다의 종교이념얘 대한논자의 뼈名이다. 대개 師。진와는 日]훨兩國의 國훌上애 나티나긴 했어도, 그 근저에는 大東亞의 사회정책애 었다는 것은i 師 의 文홉에 의해서 明 白한 바이다--〔!||上善兵衝, 앞힘 책, p; 323.〕라고 있는박 다째다에깨서는 종교와 청차는 분리된 벌개의 것이 아니었다. 4) 川上홈兵衝, 앞의 책, p.6%. 현용운, 박현명 퉁이#L、이 되어 원총반대운동인 임쩨총운풍을 천껴하자 국내에 빼포키 위뼈r서 집멸한것이I과 엄재종운동의 천개와 의의에 대혜서는후숲할것이디. i ) 中村之, 朝활ε 끼없음혼切홉 L X:ilf륨-武田훌之σ)思뺑、: 興亞前提史, p.798. 中村之의 이 小쏠文온 「원총육재론」에 대한 혜껄이다.6) 이 특별한까닭에 대혜써는 中村之 역시 와문울표시하피 었다. 식민 본국의 입장@μ{ 보는 陽, 알수 없용4l 당연활 것이마 〔위의 빽, p.799.〕7) 위의 책, p.799. j ,g) 다께다 역시 l%8년 9월 23일 내밤껴신 송뱅준에깨 재훌환 「청원서」여써 한국은원래 10여파의 종지가 잊없으나. 다、른 일째롤금지시키고 션교二派만 폰찌 케 했 다. 이 二減훌 원용하는까닭얘 원종。빠는명챙훌세워셔∙∙?〔ll|--t홈兵術, 앞의 책 p. 337.〕라고 했막 그러나 이부분역시 필총명칭의 유혜률진실되 게 셀명한 것으혹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회팡이 언급한 {교겸수 ii얘 대한 필자의 批判이 다쩨다의 이 말。훌도그대로 척용휠 수 있옳 것이다. 다째다는 훤 종의 정뽑을내세우기 위혀써 il敎二iR의 조션불교휘 천용융 운뀌왔융 뿐으후 생각된다. 9) 옳願子, 大障帝圖時代의 f**t에 판한考뤘: 훌훌f홈史훌, 1훌집(셔율; 생신여대. 1986), p.14-I46.60) 川上홈兵衝, 앞의 책, p.332-333. i 61) 위의 책, F334. 조션불교톨 일본불교와버교할때, 일본각宗 中에 iI宗에 유념활수밖해 없었다. g후홉1I보있었기 때문이다. 그형다면 빼宗 中 가장재도가 완il댐 것은홈洞宗이막 오직 그兩山음홉힘l인宗흥융 除현다면, 彼此의 습펠융除한다연,조동종어1서取 하는 것이 가장편하다. 이것온빈도(다깨다)가조동종용려라고 혜서 말하는것이 아니다62) 위의 확 p. 334. !63)高홈亨, 앞의 책, p.922. |64) 이눔화, 앞의 책, p. 338. 9 | 이 7개항의 내용융分析혜 볼 때, 대퉁환 업정。F4의 영합온할수 없다펀 조동종의 입쟁이 그대로 반영된 총속협약이었다. 〔서경수, 일제의 률교청책: p. 11,.〕 6) 다째다가소속한黑龍슐 뼈아 회유척 方法율 {#行해고자환 입장애 대빼서는 B本얘까t 무단홍쳐 세력이 합병(合{井)율 와도한반연 그룰온 대둥한 차원 에서 합앙(合햄)을 와도한것이라고 주장하나궤변옐 뻗이다; 다같이 제국주의 칭략의 양 날재로서 본질척으로는하나였기 때문이다. 〔훌在彦, 아시아主훌 와 一進會: p. 229.〕 i 66)그동안국패의 연구는, 사철령에 의한 원종파초동총의 번합이 무위로둘@}가고 총톡부외 안P}률 받지 롯한 이유애 대혜서 이∙무런 해도없이 여러 가지로 추측혜 왔으나〔서경수. 앞의 책, p. 1I6.〕 논자의 논지애 빼륙 한, 전혀 댐성。l 없는 추측일 뽕임이 뽑빼. 혜令어l 훌f뼈서는徐景洙 교수의앞의논문, p. 1I9 -120. 훌照. ! 67)률룬 3. 1운동온 일본 제국주의애 대한근본척 정定이얘, 철쿄총독부의 惡政에 대한 저항용용용아와었닥 그러나, 총톡부의 악쟁융흉빼써 일본 제국주의를 부 갱할수 있는 쩨험을조건민중률윤갖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총독부의 불교정책보다는 다쩨다의 책략이 더욱 교활했용울지척로차하는 것이 논자의 와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