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는 역사 기록은 아니다. 문학사전적인 풀이에 의하면 그것은 신화, 전설, 민담을 통칭하는 것으로서 구비문학의 형태를 띠고 전승되어 오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면 문자로 기록, 정착되는 경우가 생긴다. 우리는 이른바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정사(正史)와는 별개의 흐름으로 민중들의 입무덤(口碑)에 안치되어 오는 수많은 설화들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의 세계야말로 풍성하면서도 다양한 무형문화의 정신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설화들 중에 상당한 몫으로 불교 설화들이 있다. 불교 설화는 특정 종교(宗敎)의 특정 교의(敎義)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겠으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그 자체로 민족사의 민족학(또는 문화인류학)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불교적 깨달음을 담고 있는 이 설화들은 곧 참된 인간적 자각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으며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사라는 역사토양과 시대 배경 속에서의 진실의 체현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특히나 오늘날 각박한 물질문명 속에서 더욱 가난해진 우리의 영혼들에 빛을 뿌려주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 글에서 그 한가닥을 더듬어 보고자 하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불교설화들이 그러하다.
고려 시대 후기의 인물인 일연은 「삼국유사」의 불교설화를 통해 삼국시대와 그 불교를 어찌 밝히고자 했으며 또한 자기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려 한 것인가.
신라의 골품제 사회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유물이라 할 수 있는, 성골과 진골을 중심으로 한 씨족적·폐쇄적 독재사회였다. 그리하여 최 치원, 최 언위, 최 승로 등 6두품 출신의 지식인들이 나름대로 개방사회로의 개혁을 소망하게 되었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의 호응을 받아 폐쇄적 골품제 사회를 파기하는 역사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 창업된 고려 사회는 신라의 육두품 출신들을 비롯한 창업 공신들을 부상시킬 수 있었으되 이들은 한편으로 불교를 배척하고 다른 한편으로 유교적 봉건 이념을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또한 세습 귀족으로 그 권세를 영구히 하고자 하였으니, 김 부식은 그러한 반동적 역사의 수성(守成) 시대가 절정에 이르렀던 때의 인물이었다. 왕실과 귀족 사이에 역사 담당층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역사인식이 보수적이면서도 반민중적 권위주의와 사대주의적 봉건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고려 사회의 문신 귀족에 의한 전제 정치의 모순은 일백년에 걸치는 무신란의 시대를 낳게 하였고 또한 몽고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상황을 가져오게 하였다. 무신란과 몽고란의 참담한 시련을 통하여 고려 사회는 역사의 개혁이 요구되고 있음을 자Z1하게 되었다. 이 규보의 한문서사시 「동명왕편」, 이 승휴의 「제왕운기」, 그리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나름대로 진보적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종류의 글들이었다. 곧, 사대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민족주의적 자각을, 그리고 당면한 현실적 모순에 대해서는 그 사회개혁의 당위성을 민족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과 이해를 통해 성찰토록 하고 있는 것이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불교 설화는 나름대로 왕실불교(귀족불교)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를테면 민족불교(민중불교)의 관찰 내용을 우의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다시 말해, 당연한 고려 사회의 모순과 타락한 불교계의 현실을 ‘삼국’의 ‘유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그 개혁의 원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불교 설화는 그 자체로는 역사 기록이 아니기때문에 저자인 일연의 의도를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표현수단이 된다. 불교 설화는 기전체의 정사체로는 기록할 수 없는 내용을 수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간접적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를 획득케 한다. 불교 설화는 또한 불교 교리의 정통성 시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령 혜숙-대안-낭지-보덕-혜공-원효-사복과 같이 기행을 일삼는 스님들의, 정도에서 벗어난 ‘설화’들을 구애받음 없이 기술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원광-자장-의상과 같이 왕실불교 내지 귀족불교를 표방하던 이들을 ‘설화’를 통해 암시적으로 풍자하거나 비판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반면에 성골(자장), 진골(의상), 두품(원효) 출신도 못 되는 상민(대안) 내지 천민(혜공) 출신의 불교인들에 관한 ‘설화’를 풍부히 수록함으로써(보기를 들면 조신-사복-광덕-엄장-노힐부득-단단박반-지통-진정-욱면 들이다) 신라 사회의 모순과 타락한 불교 현실을 공박할 뿐 아니라 “중생이 곧 부처”인 민중불교의 참 뜻을 헤아려 보게 하였다.
「삼국유사」의 불교 설화들이야말로 사학자-종교인-문화인이 서로의 온축을 모아 진지하게 그리고 학술적으로 규명해 보아야 할 귀중한 문화 유산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감천만인 것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노력들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학자들은 이것이 역사 기록이 아닌 설화라는 것을 이유로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듯한 점이 보인다. 불교인들은 불립문자의 일초직입(一超直入)하는 돈오의 선지(禪旨)에서 벗어나는 역사 연구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문학인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이 설화들이 갖고 있는 탁월한 문학성을 왜곡시키거나(보기를 들면 이 광수의 「꿈」과 같은 소설이 그러하다) 변질시키고 있다(보기를 들면 원효 설화를 소재로 하는 무수한 시, 소설, 영화, 텔레비젼극 들이 그러하다).
그리하여 「삼국유사」의 불교 설화들은 아직까지 중세시대의 곰팡내를 털지 못한 채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한문 원본 속에 그대로 방치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이에 문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들 불교 설화들을 ‘민족 문화’의 큰 기둥으로 새롭게 세울 수 있는 길은 없겠는지, 다시말하자면 그 설화들이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역사성-종교성-예술성의 세계에 대해 새로운 해석력을 키워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앞에서 삼국 시대의 불교를 왕실불교-귀족불교-민중불교의 세 가지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으로 갈래를 잡아보았다. 그것이 삼국유사의 설화들을 통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대표적인 경우를 골라 살펴본다.
●왕실불교
원광의 경우 귀산과 추항이라는 두 청년이 원광을 찾아와 “일언(一言)을 주시어 종신(終身)의 계(誡)를 삼게 하소서”하고 청하였다. 원광이 이르되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조항이 열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이며 아들이니(爲人臣子) 아마 능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라 하였다. 이것은 중생제도의 정신에서는 벗어난 것임을 시사한다. 원광은 이러한 전제에 단서를 붙이어 ‘세속 5계’를 내려주니 충·효·신에 임전무퇴·살생유택이라는 것까지 강조한다. 보살계와 세속5계가 왜 다른 ‘계’이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유보한다.
자장의 경우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이가 죽은 강아지를 칡 삼태기에 담은 채나타나“자장을 보고자 왔다” 하니 자장이 광인이라고 쫓아내라 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아상(我相)을 가진자 어찌 나를 알아보리오” 하고 가버리니 자장이 이에 급히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도리어 쓰러져 죽었다. 대국통(大國統)의 지위에 올라 부국강병주의의 호국불교로 국민동원체제를 이룩한 자장은 죽음에 임박해서도 ‘아상’을 버리지 못한 한계인이었음을 밝히어 참 불교가 갈 길을 시사한다.
●귀족불교
의상의 경우 의상이 목욕재계하고 모든 준비를 정성껏 갖추어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해 칠일 기도를 드려 염주를 얻었다. 다시 칠일 기도를 드려 보살(眞身)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그러나 어떤 일이 있었던가에 대한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목소리를 들었다. 일러주는 대로 절을 지으니 낙산사이다. 의상은 보살을 만난 것이라기보다 그 목소리를 들어 지시대로 따른 셈이니 보살과 대화할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섬기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제대로 얻었다 할 수 없다.
원효의 경우 의상의 뒤를 이어 원효가 보살을 보고자 왔다. 농사군 여편네를 만났다. 벼를 달라고 하니 흉년이라 줄 게 없다하였다. 또 빨래하는 아낙을 만났다. 마실 물을 달라했더니 개짐을 빤 더러운 물을 주니 그가 마시지 않았다. 바로 이 두 여자가 보살(眞身)임을 나중에 알고 다시 만나려 하였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의상이 목욕재계에 정성을 다 바쳐 간신히 보살의 목소리에 접했다면, 원효는 정성바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살을 만나서 대화까지 나눌 수 있었다. 다만 그는 개짐을 빤 물이 성수(聖水)임을 깨닫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보살은 성(聖)의 모습으로서보다도 속(俗)의 천연스러움 속에 자기를 드러내고 있는 바, 의상과 원효의 구도적 자세가 대비되고 있다.
●민중불교
욱면의 경우 욱면은 계집 종으로 주인을 따라 절에 치성을 드리러 갔다. 주인은 욱면이 염불하는 것이 미워서 곡식 두 섬을 하루 저녁에 찧게 했다. 또 그래도 미워서 새끼로 두 손바닥을 꿰뚫어 말뚝에 매어놓았다. 그렇게 된 처지에서도 욱면은 좌우로 밀어 합장하며 스스로 격려했다. 이때 “욱면은 당(堂)에 들어 염불하라”는 소리를 듣고 이어서 육신을 버리고 하늘로 솟구쳐 진신(보살)이 되었다. 누구나 만나기를 소망하는 것이 보살이라면 욱면은 그 단계를 뛰어넘어 보살 자체가 된 것이다.
조신의 경우 조신은 귀족 집의 문지기로 주인집 딸을 짝사랑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주인집 딸과 결혼했으나 병들고 굶주려 거지가 되어 괴로움만 겪게 되었다는 그런 꿈이었다. 조신의 꿈은 인생무상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기보다는, 고대 노예제 사회에 있어서의 중생들에게 불교가 어떤 구원의 종교인가를 반문하게 하는 설화일 것이다. 그것은 계집종의 신분에서 구도숭의 단계를 뛰어넘어 단숨에 보살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는 욱면의 설화와 대조된다. 해탈 아니면 허무이다. 한국불교는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중세 봉건제 사회로의 역사발전 이행기에 한반도에 정착하여 그 진보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바 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중세 봉건제 사회를 타파하여 근대 민주제 사회를 열어나가는 역사 전환기에 서 있다. 중세 불교에서 근대 불교로의 전환을 생각해보려 할 때, 고대사회-중세사회의 이행 단계를 짚는 「삼국유사」의 불교설화는 새로운 신선함으로 재해석되어야 하겠음을 깨닫는다. 바로 민중의 광활한 대지 위에 서 있는 중생제도의 인간구원으로서의 설화가 가지는 올바른 뜻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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