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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이제까지 배우던 속학(俗學)을 버리고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信黙)화상께 예(禮)하고 삭발한 후 가사를 입었다. 처음에 「전등록」을 열람할 때에 익숙하기도 전에 이미 깊은 뜻을 깨달았으므로 노숙(老宿)들이 다나와서 물었다 신유년(1561)에는 선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점점 드러났다. 한 때에 학문하는 사대부와 시인들로서 박사암(朴思菴), 이아계(李鵝溪), 고제봉(高霽峯), 최가운(崔駕運), 허미숙(許美叔), 임자순(林子順), 이익지(李益之)의 무리가 모두 더불어 즐거이 사귀어 부르고 화답한 시와 편지가 문단(文壇)에 알려져 사람들이 미담(美談)으로 삼았다. 일찍이 하곡(荷谷)과 더불어서 서로 약속하여 한퇴지(韓退之)의 글 중에 가장 긴 글을 한번 보고는 틀림없이 외우니 하곡이 곧 손으로 쓴 한문(韓文) 책으로써 약속을 갚아 주었다. 기고봉(奇高峰)이 말하기를 “이것만 믿고 스스로 만족히 여기면 공부가 반드시 진보되지 않을 것이니 헛된 공부에 힘을 허비함이 가석하다”하니 스님께서 정신이 번쩍 들어 교훈을 받고 부지런히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소재상(蘇齋相)에게 사서(四書)를 배우고 또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서 이로부터 문장이 더욱 진보되고 불경 천함(千函)을 또한 모두 열람하니 경을 익히는 스님네들이 산문에 구름 모이듯 하였다. 을해년(1575)에는 여러 스님들의 추대로 선종의 주지가 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비로소 청허(淸虛)의 문하에 가르침을 청하였다. 노사(老師)가 심지(心地)를 일깨워 주어 바로 성종(性宗)을 전해주니 스님은 말을 듣자 곧 크게 깨달아 모든 글을 살어버리고 무익한 습성을 끊어 버려서 전에 하던 문장의 유희를 기어(綺語)라고 참회하고 안심정성(安心定性)의 공부에 뜻을 오로지 하여 고행(苦行)올 닦기 2년에 그 바른 법을 다 얻었다. 무인년(1587)에 노사(老師)를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가서 보덕사(普德寺)에 하안거를 세번 지내고 남쪽으로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동에 머물다가 병술년(1586) 봄에 우천산(㳓川山) 상동암(上東庵)에 이르렀는데 하룻밤 소낙비에 뜰 꽃이 다 떨어졌다. 스님이 문득 무상(無常)을 깨닫고 문인(門人)을 불러 말하기를 “어젯날 피었던 꽃이 오늘 빈 가지로다. 인간 세상의 변하고 멸함이 또한 이와 같도다 뜬 생이 하루살이와 같거늘 세월을 헛되게 보냄이 실로 불쌍하고 민망하도다. 너희들이 각기 신령스러운 성(性)을 갖추었으니 어찌 돌이켜 구하여 한 큰 일을 마치지 아니하려는가. 여래가 나의 마음속에 있으니 어쩨 반드시 밖으로 달려 구하여 세월만 허비하랴” 하고 곧 문도들을 흩어 보내고 홀로 선실(禪室)에 들어가 첨묵을 지키고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혹 열흘동안 나오지 아니하였다. 사람들이 혹 엿본즉 오뚝히 앉아 있는 것이 소상(塑像) 같았다. 기축년(1589)에 오대산(五臺山)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무르다가 어쩌다가 역적의 옥사에 그릇 걸리어 강릉부(江陵府)에 구속되었을 때에는 선비들의 진정 (陳情)으로 석방되었다. 경인년(1590)에 금강산에 들어가 또 하안거(夏安居)를 세번 지냈다.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영동에 침입하여 유점사에 이르렀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우리나라 사람이 왜적의 앞잡이로 왔다” 하니 스님이 말하기를 “만약 왜적이라면 글로 써서 타이르기 어렵지마는 혹시 우리나라 사람이 있다면 역시 타이를수 있겠다” 하고 십여명 제자를 거느리고 절 문에 바로 들어가니 적들은 제자들을 다 묶었다. 스님 홀로 중당(中堂)에 이른즉 왜적의 두목이 스님이 보통 승려가 아닌 줄 알고 주객(主客)의 예(禮)로써 접대하면서 제자들을 풀어주었다. 스님께서 글로 써서 문답하니 모든 왜가 공경하여 복종하고 산 깊은 곳에 숨어 있으라고 가르쳐 주었다. 스님께서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여래께서 세간에 나오신 것은 원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적들은 성질이 괴악하므로 우리 백성을 함부로 죽일 것이 염려된다. 내가 마땅히 가서 미친 적을 타일러 흉한 칼날을 함부로 하지 말게 하면 우리 부처님의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아니함이 될 것이다” 하고 곧 고성(高城)으로 들어간즉 왜장 3인이 함께 예우하였다. 스님께서 글로 써서 그들에게 살륙을 즐겨하지 말기를 권하니 세장수는 다 합장하며 가르침을 받고 3일 동안 만류하여 음식을 잘 차려 대접하고 성밖에까지 나와 전송하였으니 영동(嶺東) 아홉고을이 살육을 면한 것은 대개 스님의 공이었다. 선조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자 스님께서 의분(義憤)이 강개하여 여러 스님네들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 국토에 태어나 숨쉬고 먹고 편안히 살기를 수십년 한 것은 모두 다 임금의 은혜다. 그런데 이 위급한 때를 차마 당하여 앉아서 볼 것이냐“ 하고 곧 스님네 수백명을 모집하여 빨리 순안(順安)으로 달려간즉 모든 의승(義僧)들이 다 와서 모여 군사 수천명이 되었다. 이 때에 청허노사께서 조정의 명령을 받아 여러 도(道)의 승병의 총섭이 되었다가 노쇠함으로써 사양하고 스님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게 하매 드디어 스님은 큰 군사를 거느리고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명나라 장수와 협동하여 이듬해 정월에는 평양을 부수고 행장(行長)을 달아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도원수 권율을 따라 영남에 내려가서 의령에 주둔하여 베고 사로잡은 것이 자못 많았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당상(堂上)의 계자(階資)를 주었다. 갑오년(1594) 봄에 명나라 총병 유정(劉定)이 스님으로 하여금 부산에 있는 왜영에 들어가 청정(淸正)을 타이르게 하니 무릇 세 번이나 왕복하면서 적의 사정을 다 알아 왔다. 청정이 묻기를 ”본국에는 없고 일본에 있다“ 하였다. 청정이 ”웬 말인가“ 하니 스님께서 ”지금 우리나라에서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보고 반드시 취하려 하니 이것은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청정이 놀라며 탄복하였다. 임금이 스님을 불러 대궐 문안에 들어오게 하여 평생의 경력을 자세히 묻고는 말하기를 ”옛적에 유병충(劉秉忠)과 요광효(姚廣孝)가 모두 산인(山人)으로서 특수한 공을 세워서 이름이 후세에 전한다. 지금 국가의 사세가 이와 같으니 네가 만약 머리를 기른다면 마땅히 백리의 지방이나 삼군의 대장으로 맡기겠노라“ 하니 스님은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사퇴하였다. 임금이 무기창고의 병기(兵器)를 내주었다. 스님께서 영남에 돌아와서 용기(龍起), 팔공, 금오 등 여러 산성을 연달아 쌓아 우뚝하게 방어를 만들어 각기 무기식량 창고 등을 완비시킨 연후에 곧 인장(印章)과 전마(戰馬)를 반납하고 병적을 비국(備局)에 바치고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간절히 만류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정유년(1597) 겨울에 명나라 제도 마귀(麻貴)를 따라 도산(島山)에 들어가고 무술년(1598)에 또 유제독을 따라 예교(曳橋)에 들어가 모두 수공(首功)이 있었다. 전후에 군량을 조달한 것이 4천여석이요 무기 갑옷이 만으로 헤아렸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가선(嘉善)의 계자를 올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신축년(1601)에 부산성을 쌓고 내은산에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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