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대각운동의 전개

3. 독립운동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본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은 조선불교를 일본불교로 동화(同化)시킬 계획을 하고 있었다. 불교의 탈을 쓰고 정치적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겉으로는 압박과 천대에 시달린 조선불교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체하면서 내심으로는 민족정신 말살정책이라는 무서운 마수를 뻗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10년 한·일합방이 되면서부터 모든 것을 총독부의 산하에 예속시켰으니, 불교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1911년 사찰령이 공포되면서 완전히 자치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아무리 깊은 산중에서 수도와 염불을 하면서 나약해진 불교라고 할지라도 그냥 좌시만 하지는 않았다. 그들 중 선각자들은 세간을 떠난 승려의 입장에서 국가나 민족의 운명을 예리하게 직시하면서 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일제에 항거할 뿐만 아니라 불교도 혁신하여 새로운 불교상을 제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들은 각 방면에서 사회에 참여하면서 직접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그 중의 대표자들이 백용성·한용운·박한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성선사는 새불교운동의 기수로서 이 민족과 불교의 살 길을 찾기 위해 무한히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1910년에서 1940년까지 약 30년 동안 후반기의 그의 생애는 민족의 독립을 떠난 생활은 없었으며, 모든 행동이 호법과 항일운동의 범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이미 밝혔듯이 그는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산중의 선회(禪會)와 납자들의 지도를 그만두고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그의 눈에는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서구의 세력을 타고 물밀듯이 틀어오는 기독교의 세력에 대해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기독교의 침입을 서양의 침략으로 보았던 것이다.
선사는 이 두 침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이 민족의 나아갈 길과 바른 안목을 제시하기 위하여 저술과 역경에 착수했으며, 선을 대중에게 보급시켰다. 또 포교당을 세워 새로운 방법으로 포교에 전력투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일본제국주의는 더욱 압박을 가했으며, 숨도 크게 쉬지 못하게끔 몰아쳤던 것이다. 여기에 덩달아 부패하기 시작한 일부 승려들은 일제의 앞잡이로 이권에 눈이 어두워 강은 아부와 추태를 다 부리고 있었다.
선사가 서울 시내에서도 가장 중심지역인 종로 3가 봉익동 1번지에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하여 꾸준히 대중의 잠을 깨우치며 계몽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선사는 만해 한용운과는 16세의 차이였으며, 만해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용성선사를 찾아와서 지도를 받곤 하였다.
1919년 2월 고종의 국상(國喪)을 당하여 온 국민이 슬픔에 차 있을 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였다. 이 때를 활용하여 각 종교단체에서는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있었으며, 여기에 주동역할을 한사람이 불교에서는 한용운, 천도교에서는 최린, 기독교에서는 이승훈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각 종교의 대표자로는 천도교 손병희, 장로교 길선주, 감리교 이필주, 불교 백용성이 선출되었다.
이렇게 하여 용성선사는 3·1독립선언서의 서명에 있어서 네번째로 서명하였다. 그때 당시 독립운동에 가담하거나 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대표자가 된다는 것은 목숨을 내어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바로 사형까지도 각오해야 했던 일이다. 만해가 여기에 선뜻 응할 인물을 불교계에서 찾으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백용성선사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 뜻을 전하였을 때, 선사는 도장을 내어주면서 쾌히 승낙하였다. 용성선사는 만해에게 도장을 맡기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하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선사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열화와 같았다. 여기에 서명한 뒤 궁금하여 2월 26일에는 만해스님이 주석하던 심우장에 가서 밤늦도록 상의한 일도 있었다.
3월 1일, 선사는 마지막 각오를 하고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 근처에 있는 태화관(泰和館)으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에는 자신을 포함한 29명이 참례하였고, 나머지 4명의 기독교 목사들은 자신의 교회에 부흥회가 있다는 이유로 불참했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같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만세삼창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처음에는 지방법원 예심에서 심리하여 내란죄(內亂罪)에 해당시켰다. 이것을 고등법원 특별재판부에서는 내란죄가 아니고 국가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판결하였다. 그리하여 징역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게 되었다. 취조서에 의하면, 검사가 “앞으로 또 독립운동을 하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기회가 온다면 또 할 것”이라고 하고 있었으며,“독립운동이 옳다고 생각하기에 그 뜻을 굽힐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선사의 독립운동은 각자(톨者)의 입장에서 볼 때, 억압받는 민족을 위한 일이기에 아무런 이유나 이해타산이 없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16명이 참여했지만, 서명하는 조건이 까다로웠다. 즉 서명하기 전에 돈을 5천원이나 받았으며, 또 체포되어 감옥살이하는 도중 가족의 생활비까지 요구했으니 설사 불교계에서 2명만이 서명에 동참했다 하더라도 민족의 독립을 위하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선사는 서대문 감옥에서 많은 경험과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였다. 즉 「한글 화엄경」의 서문인 ‘저술과 번역에 대한 연기’에 의하면,

“독립선언서 발표의 대표의 일인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철창생활의 신산한 맛을 체험하게 되었다. 각 종교신자로서 동일한 국사범으로 들어온 자의 수효는 모를 만치 많았다. 각각자기들이 신앙하는 종교서적을 청구하여 공부하기도 하며 기도도 하더라. 그 때에 내가 열람하여 보니 모두 조선글로 번역된 것이요, 한문으로 그저 있는 서적은 별로 없더라.
그것을 보고 즉시 통탄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이렇게 크고 큰 원력을 세운 것이다…….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전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라고 하고 있다. 선사는 옥중에서 많은 경험과 타종교와 불교의 비교에 의해서 불교의 나아갈 길, 민족의 장래 등에 대하여 많은 고뇌를 하였다. 그의 3년 동안의 감옥생활은 30년 동안의 좌선생활에 못지않은 새로운 경험과 체험으로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21년 3월에 출옥과 동시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역경과 저술에 착수하게 된다. 또 새로운 불교운동을 시작하기 위하여 대각교(大覺數)도 창립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민족대표가 된 선사에 대한 일제의 감시감독과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였다. 향상 요시찰 인물이 된 용성선사의 행동에는 많은 제약과 간섭이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각교를 창립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특히 경전의 한글번역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이 시대에 일제는 우리글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때였으므로 더욱더 어려움이 많았다. 한 가지 예로서 경전을 번역하여 반드시 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출판이 가능했다. 그런데 선사는 일본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불기(佛紀)를 사용하였다고 여러번 경찰서에 불려간 적도 많았으며, 출판을 거부당한 일도 여러번 있었다.
또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농토를 빼앗기고 만주로 간 농민들과 독립지사들을 위하여 만주의 용정(龍井)에 약 21만평의 땅을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대각교당을 세웠다. 선사는 일본인들이 보기 싫다고 하면서 만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여기서 독립자금과 독립지사들의 활동무대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제의 마수는 뻗치기 시작하였다. 즉 일제의 정탐꾼이 신도를 가장하여 가까이 했으며, 드디어 선사의 문하에서 출가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가 된 정탐꾼은 결국 만주의 대각교당의 문을 닫게 하고야 말았다.
뿐만 아니라 선사는 일제의 침략에 의해 한국불교가 왜색화되어 가고 급기야는 승려들이 취처함을 보다 못해 1927년에 승려취처의 부당성을 통렬히 비판하는 건백서(建白書)를 2차에 걸쳐 올리기도 하였다. 이것이 해방 뒤 대처 비구의 정화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이 탄생되는 계기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사의 후기의 생애는 어느 한 부분도 민족의 독립운동과 연관되지 않음이 없었으며, 동시에 일생을 무승적·무호적의 생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도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5년 앞둔 1940년 2월 24일에 열반에 들고 말았다.
선사의 독립운동은 바로 민족의 자각에서 시작된다고 보았으며, 그 관점에서 전개한 운동이 대각운동(大覺運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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