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미록신앙의 실천적 성격 백제 미륵신앙의 실천적 성격은 현세에서 미륵용화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민중의 역사적 사회적 실천에 있다.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이미 교조 중심의 승통불교 전통에서 쫓겨난 백제 미륵신앙은 민중의 사회사 속에서 민중 구세주의의 본래성과 순수성을 지켜 왔다. 미륵신앙 안에서는 종교적 신앙과 민중의 삶이 전혀 구분되지 않았고 미륵신앙에 대한 열망은 곧 새 세계의 실현에 대한 열망이었다. 따라서 미륵불은 민중의 현실 어디에서나 쉽게 조성되었고 민중의 구체적인 생활고까지도 해결하는 실천적인 역사 변혁 신앙으로 발전되어 왔다. 중세 유럽의 천년왕국 운동에서는 세계가 초자연적인 신(神)의 섭리에 따라 변혁된다 하여 인간을 세계 변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 주체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미륵신앙에서는 미륵하생을 위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정치세계가 인간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때 하생성불한 미륵을 매개로하여 모든 중생이 주체적 성불을 이루게 됨으로써 미륵 용화세계가 완성된다고 믿는다. 미륵불은 현 세계의 심판자가 아니라 완성자이므로 모든 중생이 현 시대의 모순과 불완전을 변혁하여 용화세계를 실현하는 것이 미륵신앙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민중을 비주체적인 대상으로 묶어두려 했던 지배체제는 민중의 미륵신앙에서 비롯된 실천을 불법(不法)이라든지 폭력 혁명으로 적대시하게 된다. 그러나 폭력의 논리 자체는 이미 지배자의 논리이므로 그것은 정치, 역사, 사회 전반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미륵신앙에서 비롯된 민중혁명운동이, 지배자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민중의 반폭력이요 민중 생존의 지혜이자 정의혁명이라는 관점에서, 그 정당성이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미륵신앙은 민중의 고통이 극에 다다르던 시기에 더욱 깊이 신앙되었고, 그때마다 지배자의 구조적 폭력에 시달리던 민중들은 새 세계의 실현을 기치로 내걸고 사회와 역사의 변혁에 앞장서는 실천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전통 민간신앙인 용(龍)신앙과 서로 융합된 실례가 조선 후기에도 계속 발견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백제 미륵신앙은 백제가 멸망한 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민속과 무속에 완전히 스며들어 민중의 종교로서 그 뿌리를 깊이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민중의 실천적인 역사 변혁의 의지와 노력에는 비록 그것이 미륵신앙을 내세우지는 않더라도, 그 바탕에는 민중 구세주의로서의 백제 미륵신앙이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 민중의 사회사에 나타난 민중운동의 전통은 민중의 주체성 실현을 위한 노력임과 아울러 전륜성왕의 정치 체계를 수립하여 이땅에 미륵이 하생토록 하겠다는 백제 미륵신앙의 실천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민중운동의 성격이 단순히 현실의 불만을 표시하거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고, 새로운 통치 질서를 요구하는 왕권 타도라든지 봉건제 철폐와 같은 근본적인 역사 변혁에 있다는 점에서 민중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실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곧 백제 미륵신앙은 미륵을 신앙하는 종교적 행위를 본질로 삼거나 강조하지 않고 신앙의 결과인 미륵하생 용화세계의 구현에 더욱 깊은 의지를 보임으로써 이 나라 민중의 실천신앙이요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실천 신앙으로서의 백제 미륵신앙은 민중의 일상생활 한가운데에서 늘 삶의 원동력이 되어 왔을 뿐 교조주의적인 종교 질서 따위는 거부한다. 나아가서 지배체제의 문화적 질서로서의 종교 그 자체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백제 미륵신앙은 종교가 아니라 민중의 세계관이요 삶 그대로이기 때문이다.5. 백제 미륵신앙의 개벽적 성격 백제 미륵신앙은 모순으로 가득차고 미완성으로 님아 있는 현실 세계가 미륵용화세계에서는 총체적이며 전면적으로 극복되고 완성된다고 믿는 점에서 개벽적 (開關的)이다. 서구의 천년왕국 신앙에서는 악의 세력으로 규정된 현실의 체제는 구세주의 도래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되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면, 신자(信者)는 가장 높은 위치를 얻게되지만 악의 세력은 그들의 설 땅을 잃게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미륵신앙에서는 현실의 모든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구원된다는 개벽적인 이상 세계를 그 목표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 체계와 이상 세계의 대결 구조가 미륵용화세계에서는 어느 한편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대결 구조 자체가 없어지는 총체적 완성을 이룸을 말한다. 백제 미륵신앙은 무속과의 습합 속에서 그러한 면모를 보여 주는데, 함흥무가(咸興巫歌)인 ‘창세가(創世歌)’와 황천무가(黃泉巫歌)인 ‘바리공주’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창세가’는 무속의 창세 신화에서 전승된 것인데 거기에는 미륵의 세상과 석가의 세상이 대결 구조로 나타나 있다. 곧, 태초에는 미륵의 세상으로 인간세상이 태평하였는데, 석가가 출현하여 미륵의 세상을 빼앗아 버리자 미륵은 석가의 세상이 다하면 다시 오리라 하고 떠나버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미륵과 석가의 대비는 물론 석가를 비판하고 미륵을 높이려는 그런 단순한 뜻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석가는 세속에 오염된 물질주의의 석가로서, 엄청난 물량과 규모를 자랑하는 요즈음의 교회처럼 가난한 백성을 등지고 지배자의 권력을 옹호하는 불교가 되어있는 모습으로서의 석가이다. 또, 석가가 미륵의 세상을 빼앗았다 함은 미타정토신앙의 미륵신앙에 대한 압박의 현상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미륵의 세상이 원초의 세상이고 석가의 세상이 현재의 선천세계(先天世界)로 인식된다면, 다가올 미륵의 세상은 선천세계의 모순과 고통을 극복하는 개벽적 후천세계이며 그러한 세계는 원초적인 미륵의 세상에로의 원시반본(原始返本)을 뜻한다. 여기에서 후천개벽적인 미륵신앙의 싹이 보이며 석가의 세상을 미륵이 구원한다는 미륵신앙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창세가’는 미륵불의 출현에 대한 갈망과 개벽적인 새 세계의 실현에 대한 의지가 전통적 민간신앙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 준다. ‘바리공주’ 설화 또한 무속신앙이 미륵신앙과 서로 결합되었음을 보여 준다. 바리공주는 왕이나 장군신의 딸로 태어나는데 일곱번째 딸로 태어나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런데 그 딸은 신과 자연과 동물들의 보호를 받아 성장하게 되고 불치의 병을 앓게 된 부모는 버렸던 막내딸을 찾아와 생명수를 구해오도록 한다. 그 딸은 미륵님과 혼인하여 생명수를 가져와서 죽은 부모를 다시 살리고 자신은 무신(巫神)이 된다. 이 바리공주는 천덕꾸러기로 태어나 세상에서 버림받은 토착혼으로서, 갖가지 외래 정신에 시달려 온 우리의 고유한 민간신앙이 미륵신앙과 결합되어 불치병에 시달리는 죽음의 세상을 다시 살려낸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버림받은 자가 버린 자까지도 구원한다는 점에서 바라공주 설화는 이세계를 구원할 생명력이 다름아닌 억압받는 민중에게 있음을 보여줌과 더불어 민중 구세 사상이 정치적 구세주의를 구원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민간신앙 속에 토착화된 백제 미륵신앙은 현세의 역사적 모순과 억압 속에서도 민중이 주최가 되어 이루는 실천을 통하여 갈등과 대립이 없는 중생의 총체적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그것은 이땅 위에 미륵하생의 불국토를 구현하는 개벽의 실현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