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러한 민속극 특히 가면무극에 있어 반불교적 요소를 보는 우리의 시각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문제가 있다. 우리는 지금껏 이조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상대적 존재로서, 억압받고 성장의 양분공급이 중단된 의미로서의 소극적인 불교를 보는 면이 없지 않았다. 실제로 승려는 민중에게 있어 더 이상 지난날의 지고하고 위엄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며, 징발당하여 사원을 위해 노역할 아무런 의무가 이조의 민중에겐 없었다. 문란해진 도첩제로 정통적인 불교 승려 외에 갑은 가난을 못이겨, 을은 노비신분을 위장한 피난처로 절을 찾았으며, 당시의 불교계는 오늘날과 달리 이들을 통제, 교도할 실제적 역량이 부족했다. 조금 과장한다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당장 근처 절을 찾아가 머리깎고 승려가 될 수도 있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승려라는 신분 역시 지난날의 선택받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소를 잡고 광대짓을 하며 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그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천민의 하나로 격하되어 버렸다. 그들은 탁발나온 시주승께 곡식 한줌 퍼주면서 슬쩍 농찌끼도 걸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불과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오히려 여기에 있었다면 역설적인 가설일까. 즉 다시말해 불교는 신라나 고려사회에서처럼 왕권하에 예속된 특권자로서 민중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든 친숙한 수평적 관계를 가지게된 것이란 점이다. 마치 원시불교가 소승과 대승으로 나뉘어져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각국의 기층 문화와 민족성 등에 접목되며 교리 해석과 계율면에서 상당히 탄력성을 가지고 발전해 나간 사실이 불교라는 성스러운 영역에 대한 왜곡이나 침해가 아니라 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본질의 발전으로 보는 측면과도 같다 하겠다. 우리의 민속극 역시 반불교적이랄 수 있는 많은 풍자와 노골적인 묘사로 인해 불교의 정통정과 권위에 손상을 입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간 정서에 한걸음 더 친숙히 접근했다는 적극적인 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우기 전편에서 살펴본 것 같이 민속극 도처에 널린 풍성한 불교 용어와 시종일관 짙은 불교적 색채는 불교가 이미 민중의 생활기층에 깊숙히 뿌리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불교는 더 이상 외세종교가 아니라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공동운명체로 육화(肉化)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한 예로 현존하는 유일한 인형극인 꼭둑각시극을 들 수 있다. 주인공인 박첨지 인형의 해설로 전개되는 이 극은 박첨지와 그의 처 꼭둑각시 및 첩 덜머리집과의 삼각관계. 용강 이심이라는 괴물, 동방삭의 출현. 평안감사 매사냥, 상여(建寺), 건축원(建祝願) 등 언뜻 보기에 전혀 무관한 여러 상황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꼭두각시극의 휘날레에 해당하는 건사축원(建寺祝願)의 과장이다. 굳이 김재철의 주장을 빌지 않더라도 이 마지막 과장엔 건사축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박첨지와 상좌승이 명당자리를 골라 절을 짓고 복을 비는 것이 전부이다. 민중이 불교를 배척하고 승려를 백안시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발상이다. 이는 곧 우리의 민속극 속에 몇 프로의 불교적 요소가 잔재해 있느냐의 문제를 넘어 민중의 삶 자체가 염원이 불교적 세계관으로 귀의하고 있었음을 반증해 준다. 다른 쟝르에서도 이러한 불교적 발상 및 세계관을 표방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흔히 ‘별주부전’, ‘토끼전’ 등으로 불리우는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인 ‘수궁가’만 해도 그렇다. 수궁가는 원래 남전장경 (南傳藏經) 중의 자타카(Jataka) 및 인도의 설화 문학서인 마하바스투(Mahavastu) 등에 근거한 설화문학으로 중국을 거쳐 17,8세기에 이르러 한편의 완전한 구성을 갖춘 우리의 문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물론 인도 원전과는 등장인물에서부터 원숭이와 악어가 토끼와 자라로 바뀌는 등의 차이가 있으나, 이는 남방의 짐승인 원숭이나 악어 등을 보지 못한 우리에게 보다 친근감있는 현실적인 대상들로 바꾸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잠깐 자타카를 살펴보면 석가의 전신인 원숭이와, 석가를 해치려는 제바달다의 전신인 악어가 등장하여 끊임없는 보살행과 사악한 행위와의 대립을 이루며 인과 및 윤회사상에 입각한 석가의 전생담을 들려주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가 한국적 상황에 접목되며 본래의 종교적 의미보다는 당시 이조사회의 수탈당하던 민중과 착취자인 관리와의 대립으로 슬쩍 변모되긴 했지만 어쨌든 그 발상 자체는 석가의 본생담에 근원을 둔 불교드라머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불교적 색채가 농후한 것중 ‘심청가’가 있다. 어찌 보면 자식의 효행으로 부모를 구하는 유교의 중심사상인 ‘孝’ 를 강조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이 드라머는 사건의 발단에서 종결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불교적 기반을 갖고 있다. 우선 심봉사가 눈을 뜰 욕심으로 공양미 삼백석을 뒷절화주승에게 약속하는 것이라든가, 심청이 인당수에 빠진 후 용궁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는 것, 다시 환생하매 연꽃을 빌어 나타나는 것 등은 그대로 불교적 세계관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하겠다. 이처럼 우리의 민속극에는 불교적 소재를 빈 것에서부터 불교의 영향아래 성장해간 것 해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모친의 품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그중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무속(巫俗) 의 분야다. 앞서 언급한 바 처럼 불교가 전래되며 슬그머니 불교의 그늘로 들어가 불교와 접목되어 버린 무속은 오늘날 가장 토속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불교적 색체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중의 하나다. 특히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는 각 지방의 무가(巫歌)를 볼라치면, 차라리 불가(佛歌)라 불러도 좋을만큼 구구절절 부처에 대한 칭송이요, 불법의 가호를 비는 축원이다. 다음은 경남지방의 ‘씻김굿’ 에 나오는 무가의 한 대목으로 망자의 영혼을 씻어 극락세계로 보내며 축원하는 부분이다.이제저제 외시는 축원은 다른 축원이 아니라 어열씬 금일 영가씨들 지장보살 원력으로 부처님 원력으로 나무서방정토세계 문열어 놓고 왕생극락가실 때에 육지를 외어 가시면 극락전을 가시나이다. 나무아미타불 이와같이 인간은 이승에서의 죽음으로 그 생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승, 즉 극락세계에 환생하여 새로운 사후(死後)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불교적 내세관을 짙게 깐 무가의 한 구절이다. 특히 우리의 무가가 죽음 및 환생을 주제로 불교와 깊이 연관되어 있고, 실제로 의식에 있어 불경이 많이 구송되고 있는 등은 양자간의 상관관계를 보다 적극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대표적 서사무가로 불리우는 ‘바리공주’의 구성 역시 자신이 여식(女息)이라는 이유로 낳자마자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부모가 죽음에 이르자 저승길도 마다않고 불로초와 약수를 찾아 고행의 길을 떠나고 있다. 물값 삼년, 나무값 삼년, 불값 삼년의 도합 구년간의 머슴살이도 모자라 무장승과 인연을 맺어 일곱 자식까지 낳은 후 비로소 바리공주는 부모를 살릴 약수를 얻게된다. 이토록 처절한 고생끝에 얻은 약수를 갖고 돌아왔을 땐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신 후였지만 약수의 신묘한 힘으로 부모는 환생을 하고 그녀는 무당이 된다는 줄거리를 사설로 한 ‘비리공주’무는 마치 목련존자의 설화에서 보듯 자식의 공덕으로 부모를 살려내는 감동적 죽음과 환생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실제 지노귀굿(망자를 위한 굿)의 맨 마지막 부분에 불리워지는 두시간여에 가까운 이 긴 서사무가의 종결은 무녀가 곶추세운 장고를 잦게 두드리며 외우는 ‘나무아미타불’로 마무리짓고 있다. 그 어느것 하나 불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것이 굿이든, 가면무극이던간에 우리의 민속연희는 특별히 조직된 무대를 갖지 않았었다. 그저 무녀와 악사가 신굿을 할 정도의 몇 장 돗자리가 아니면, 언덕배기 야산 공터나, 사람들이 둥그렇게 에워쌀 읍내의 넓직한 장터면 족했다. 워닥에 구성 자체가 시공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것이기도 했지만 굳이 경제상의 이유만이 아니라 우리의 민속극은 서구의 사실주의 연극에서처럼 응접실 혹은 요란한 장식이 드리워진 서재를 갖지 않았었다. 실제로 그들(서구인)은 한때 이런 제한된 시공에 연극을 끼워 맞추기 위해 삼일치법(三一致法)을 만들기도 했고, 이러한 전통을 거부하고 일어선 일각에 대해 부조리극 혹은 부조리작가라는 칭호를 불이기도 했다. 한국의 무대는 비어있다. 일반적으로 동양의 무대는 빈무대다. 꽉 차있는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고, 무엇이 눈앞에 보이면 보이는 만큼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는 짧아진다. 연희자의 재치있는 재담 한 마디에 대궐과 장터를, 이승과 저승을 맘껏 넘나들며 웃고 웃을 수 있었던 우리에겐 무대는 비어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빈 무대라야만 했다. 그것은 그냥 야무 것도 없는 죽어있는 상태(nothing)의 개념이 아닌 무한한 생명과 창조의 에네르기를 가진 살아 약동하는 의미의 ‘비어있음’이었다. 이는 마치 불가의 수행에서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중요시하여 우선으로 삼는 것을 연상케 한다. 비어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죽어버린 정지의 상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살아 숨쉬는 무한한 변화의 공간임을 우리 민족은 붓다의 가르침으로 일찌기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